타오르는 책 문학과지성 시인선 244
남진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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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의 시집을 두 번째로 읽었다. 첫 번째로 읽었던 시집은 <사랑의 어두운 저편>이었다. 아마 사랑과 실연으로 혼란스러울 때 읽었던 시집일 텐데, 어디에 둔 것인지 보이지 않는다. 남진우는 예나 지금이나 상징주의적 포즈를 취하는 시인으로 유명하다. 그의 시들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다기보다는 신성에 가닿으려고 하며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세계를 그린다. 이번에 읽은 시집 <타오르는 책>에서도 르네 마그리트를 위한 시가 두 개나 있다. 제목도 '무한 속으로' '영원의 풍경'이다.

<타오르는 책>을 읽는 여러 방식이 있겠지만, 나는 독서하는 자들의 연대로서 이 시집을 이해하고자 한다. 시집의 주요 테마 중 하나는 표제작의 제목처럼 '책'과 '독서'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초점을 두고 시를 읽어나갔는데, 같은 독서광으로서 느끼는 바가 많았다. 특히 표제작 '타오르는 책'은 매너리즘에 빠진 독서가의 생애를 잘 보여준다.

남진우는 책과 불의 메타포를 연결하고, 책을 읽는다는 것이 불타오른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재가 되어버리는 책들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그러나 독서가의 생애가 길어지면 독서란 일이 되고 의무가 된다. 책은 쌓여가지만 더 이상 그것은 타오르지는 않는다. 미친듯이 열정적으로 읽었던 기억은 고작해야 추억 속에만 남아 있을 뿐. 그래서 시인은 다시 불타오르는 책을 꿈꾼다. 여느 독서가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바로 다음에 나오는 '책 읽는 남자'는 이 시집에서 가장 매혹적인 시다. 시인은 매일 한 그루씩 책을 베어 넘긴다. 고요히 쓰러지는 책을 한 장씩 찢어 우물거린다. 간혹 벌레가 파먹은 자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무수한 문장들이 새겨놓은 내 몸 안의 알 수 없는 무늬들을 알아채기도 한다. 책나무가 뿜어내는 시원한 향기를 만끽하며 몸을 휘감아오르는 책의 덩굴을 가만히 내려둔 채, 책나무 속에 누워 날아오르는 저 눈부신 새떼를 지켜보는 책 읽는 남자. 책과 나무와 남자와 새의 뒤엉킴이 정말로 아름답다. 애서가를 이렇게 찬란히 묘사한 시가 있었던가 싶다.

그리고 마지막 시 하나를 본다. 사실 순수하게 책에 대해서만 쓴 시는 이 시집에도 그리 많지는 않다. 다섯 개 남짓일 뿐이다. 하지만 어떤 시집에서 그래도 이 정도로 책에 대해 시를 썼던가. 마지막 시, 정확히는 책에 대한 마지막 시의 제목은 '사라지는 책'이다. 읽기도 전에 여러 생각이 든다. 타오르는 책이 어떻게 사라지는 책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서부터 책이 사라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하는 생각까지.

결국 사라지는 책이란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리는 책의 글자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책을 읽는 만큼 머릿속에 무엇인가 쌓인다고 여기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더 나는 텅 비어 가고 머릿속은 공허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읽게 되는 것이다. 독서란 그렇게 역설적이고 허무한 일이기도 하다. '사라지는 책'은 바로 그 점을 정확히 포착한다.

그래서 어찌할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지만, 그것은 최소한 이 시집의 일은 아니다. 아니, 이미 처음에 시인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 독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을 꿈꾸기에 여전히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이 숙명. <타오르는 책>은 독서가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구원 없는 독서에 대한 슬픈 묘사다. 그러나 지상과 별 사이에 시가 있듯,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이에 책이 있다. 우리는 짧은 뿔을 흔들며 은빛 달팽이처럼 걸어갈 것이다.

보라, 그의 뿔이 말해주는 것을
그는 이제 지상에 있지 않다
저 은하계 저편 별과 별 사이
짧은 뿔을 흔들며 나아가고 있다
- '은빛 달팽이의 추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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