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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트라이앵글의 연주같은 그 무엇...
책을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감동'이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찡하게 가슴을 울리는 책을 만난 것 같다. 박사, 나, 루트. 이 세명의 어울림은 초등학교 시절 음악 시간에 공중에 치켜들고 치던 트라이앵글같다. 그 트라이앵글을 공중에 떠 있게 하는 얇지만, 견고한 실은 바로 작가이고, 그 트라이앵글을 치는 작은 금속 막대기는 바로 나같다. 소설을 읽는다. 은은하고 징하게 울려오는 감동으로 소박하지만, 기특한 연주회를 여는 느낌이다.
그 연주의 느낌이 '감동'이라는 단어로 남아있는 것이다. 나에게 감동이란 울타리 뛰어넘기, 혹은 확장하기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나 느낌을 단 1mm라도 확장시켜 주거나 변화시켰다면, 감동을 느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 같은데 이 책이 주는 감동 중 하나는 '수학'에 대한 생각의 재정립에서 온다. 수학은 고리타분하고, 학생 시절 나를 좌절하게 했던 학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원리와 법칙 속에서 삶에 대한 은유로 빛나는, 살아있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도중 문득문득 수학책을 펴 놓고, 단순한 계산 문제라도 풀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났다.
박사는 수학 속에서 살았다. 그는 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고, 매일매일 감동하는 삶을 살았다. 누군가에겐 고리타분한 것으로, 무관심의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이 누군가에겐 꿈이되고, 삶의 이유가 된다면...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무시받거나, 무가치한 것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소설은 말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학문,예술, 사람 하나하나를 존중하고 싶은 마음, 나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도 불필요한 것은 아니며 개개인의 가치를 최대한 존중해줘야 한다는 것을 박사와 루트의 엄마, 루트를 통해 배웠다. 박사는 수학을 사랑하고, 루트의 엄마는 파출부라는 직업을 사랑한다. 그리고, 루트는 자신이 사랑할 가치와 꿈들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들에게 삶은 소소한 일상으로 채워져 있는데, 먼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소중히, 묵묵히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좋은 것이다.
타인을 부르는 쿨한 방식
이 책의 화자이자, 파출부인 '나'는 '박사'를 '박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처음엔 나이가 든 노인이자 박사인 그를 박사님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자 이것은 호칭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나'와 '박사'와의 심리상태를 보이지 않는 실로 천천히 꿰매어 가듯이 천천히 둘의 관계가 돈독하게 이어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말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화자인 '나'의 심리 묘사로 자연스럽게... 이것이 진정한 의미로써의 소설의 미덕이 아닐까 생각했다.
박사는 단 80분 밖에 지속되지 않는 기억 속에서 살고 있는데다 늙어버린 슬픈 존재지만, 그는 나약하지 않다. 순수와 진실에 대한 그의 집념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과 수학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로 승화된다. 노인인 만큼 삶의 지혜가 온 몸에 깃들어 있는 그의 매력으로 나 역시 순수해진 느낌이다. 이미지가 난무하고, 혼갖 외부적인 충격이 가해지는 폭력적인 시대에 박사와 같이 고즈넉한 존재가 살고 있다는 것은 기적이다. 텔레비전도 없고, 라디오도 고장 났으며 외출은 거의 하지 않는 그를 불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도 때론, 밖의 세상에 휘둘리기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헌신할 수 있는 순수한 이념을 찾아 매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에게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에 앞서, 박사처럼 순수한 열정을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박사는 친절하게도 해답을 준다.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순수하고 좋은 것이다. 박사는 '수식'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 '눈'은 점점 루트 엄마와 루트에게로 전이된다. 그들은 '수학'과 '야구'라는 접점으로 모아지고, 그들의 마음 또한 하나로 뭉쳐진다. 그 과정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것이기에... 입이 벌어지도록 이 소설이 마음에 든다.
당신이 때때로 외롭고 우울할 때
때때로 사는 것이 힘들고, 우울하게 느껴질 때마다. 또 나란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운 마음이 생길 때마다. 이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큰 소리로 읽어보자. 난 이미 몇 번 그렇게 해 보았는데 신기하게도 입가에 고양이같은 미소가 번지며 아랫배에 힘이 생긴다. 자그마한 문자들이 내 안에 조용히 흘러들어와 '아름다움'의 관계들을 펼쳐보이기 때문이리라. 이젠, 나도 완전수 28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220과 284처럼 나도 우애수 같은 연인이나 친구를 만나고 싶다. 무엇보다 박사처럼 사람 냄새 뚝뚝 나는 스승을 만나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도서관의 벤치 한 구석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이 소설을 읽는 여름을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지금 내 가슴은 터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