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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존 브래드쇼 지음, 오제은 옮김 / 학지사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2편은 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책 말미를 읽다가 인상적인 부분이 눈에 띄어 한 편 더 쓰기로 한다. 그리고 어제 쓴 1편이 좀 내용적으로 부족하기도 했다.
저자의 이야기로 오늘 글도 시작된다. 어려서 아버지가 집을 나가고 알코올 중독이었던 게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어려서는 알코올 중독 가정이란 걸 숨기기 위해 그는 온순하고, 성취지향적인 아이로 성장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춘기 들어 그도 술에 많이 의지하고,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거친 행동을 시작했다는 거다.
개인적으로 위 부분을 읽다가 꽂히고 말았다. 나의 삶과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거친 행동’ 부분이 크게 눈에 띄었다. 그건 그렇고 저자 이야기로 더 들어가 보자.
그는 청소년기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그 해결책을 찾다가 신학생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신학생이 되고도 그의 영혼은 만족할 줄 몰랐다. 그칠 줄 모르고 지식을 탐하게 되고, 후에는 니체에 빠지게 된다. 니체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그는 결국 짐을 지고 괴롭게 사는 낙타의 삶을 벗어나, 울부짖는 사자로 변용되었다. ‘나는 기존 세력의 반생명력에 반항했다. 처음에는 지적인 반항이었지만, 나의 알코올 중독이 행동으로 표출시키도록 도와주었다.’
역시 위의 인용 부분을 읽다가 강한 전율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의 경험과도 너무나 비슷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나도 청춘의 시기를 고된 짐을 지고 사는 낙타의 삶을 살았다. 그 후 ‘기존 세력’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나는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안의 놀라운 아이’가 소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나는 소외되고, 이해할 수 없는 녀석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렇게 기존 세력이 거의 승리했다. ‘신화 속의 추방당한 아이처럼’ 그렇게 나는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내 안에 분노를 삭이며 떠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마음속에서 세상을 혁명하고자 하는 것밖에 없었다. 결국 그 끝에 길에서 나는 주변에 있는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역기능적인 가정,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와 상호의존 중독자인 어머니, 그리고 가난, 이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 모두가 내가 현재의 일을 하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경험들이었다.’ 저자는 과거의 고통 속에서 지혜를 얻어낼 수 있을 만큼 현명했다. 어려서의 경험을 통해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이 책을 썼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도 저자와 다르지 않다. 청춘의 시기에 뭐가 뭔지 몰라 꽤 오랜 시간동안 혼란한 삶을 살았다. 그 끝에 발견하게 된 건, 나의 지난 삶에 대한 이해였다. 아이답게 성장하지 못하고, 외롭고 상처 많은 환경에서 성장한 나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를 돕기로 마음먹었다. 부족한 나를 성장시킬 수 있으면, 다른 사람들의 성장도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길은 이제 다 막힌 기분이다. 이 길에 뼈를 묻어야겠다는 결심을 요즘 하고 있다.
이야기가 잠깐 딴 데로 샜는데 다시 돌아오면, 나는 ‘기존 세력’과 대척점에 서는 부분에 흥분했다. 나의 경우를 봐도 그렇고, 자신의 익숙한 패턴을 깨고 나오는 사람들은 기존 세력과 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길 우리 안에는 ‘놀라운 아이’가 존재한다는 거다. 이 책을 숙고하며 저자의 지시 사항을 잘 따라온 독자들, 그러니까 내면아이가 치유된 사람들은 이제 어린이답게 행동할 수 있다는 거다. 어린아이 같다는 건 ‘자발적이고, 이 순간을 살아가며, 집중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며, 창조적이고, 놀고, 즐거워하며, 경이로움을 경험하고, 신뢰하고, 슬퍼하며, 사랑하고, 놀라고, 희망한다.’라는 뜻이다.
준비가 된 사람들은 이제 자신 안의 생명력이 분출하듯이 쏟아진다. 그때부터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직관을 믿게 된다. 제임스 조이스가 이렇게 말했다. “환영하노라. 인생이여! 나는 경험의 실재와 백만 번째 해후하러 가노라. 나의 여정에서 창조되지 못한 의식들을 내 영혼의 대장간에 버리러 가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