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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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책벌레들을 만나본다.
한자 가득한 고서에 빼곡히 찍힌 장서인이
책주인의 책을 대하는 마음을 보여준다.
한, 중, 일의 장서인 찍는 법을 비교한 부분이 특히 재밌다. ^^
어느 이는 기꺼이 책을 밖으로 돌리고,
어느 이는 소중한 책 절대 반출 금지다.

책의 여백 사이사이마다 빼곡히 적힌
책벌레들의 메모도 엿본다.
책벌레가 탈피하면 메모광이 되는가보다. ^^

작가는 세계 유수의 도서관에서 고서를 살피고,
자료를 모으고, 흩어진 글들을 퍼즐처럼 모아 맞추기도 한다.
중국인들도 놀랐다는 그의 한자 독해력이
문득 부러워지는 건 뭔지....

책을 덮고 나니 책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은 달라진다.
네모 반듯한 돌에 예쁜 말 하나 새겨
나만의 장서인으로 삼고픈 맘이 굴뚝같다.  
 
 



 

듣자니 최석정(1646~1715)은 장서가 대단히 풍부했다. 하지만 어느 책에도 장서인을 찍지 않았다. 한번 남에게 책을 빌려주면 다시 찾는 법도 없었다. 매번 자제들에게 이렇게 훈계하곤 했다. "서적이란 공공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마침 책을 모을 힘이 있었기에 책이 내게 모인 것이고 다른 사람도 다 마찬가지이다." -p.26

책은 장서인을 찍은 사람의 소유가 아니다. 읽는 사람이 주인인 물건이라 정해진 임자가 있을 수 없다. -p.28

하버드에 머무는 동안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책을 보관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어떻게든 연구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그들의 진취적인 자세였다. 옌칭도서관의 제임스 청 관장은 방문학자들을 모아 도서관 설명회를 하는 자리에서 필요하다면 한 사람당 1000권, 2000권도 마음껏 빌려 볼 수 있도록 해줄 테니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도서관의 자료를 많이 이용해줄 것을 당부하기까지 했다. 우리나라의 박물관이나 도서관에 소장된 고서를 보려고 하면 제약은 어찌 그리 많고 규정은 왜 이리 까다로운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책 가진 행세를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연구자의 공부를 도와주기는 커녕 계속 발목만 붙든다. 유만주가 말한, 책을 사사롭고 저속하게 지니는 고약한 태도가 이제껏 계속되어 그런 것일까? 책은 천하가 공유하는 물건이다. 책을 소장했다 해서 그 내용까지 전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p.29

옛 사람들은 소리를 크게 내서 읽어야 글 속의 기운이 내 속으로 걸어들어온다고 믿었다. 소리와 함께 옛 성현의 생각과 기상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인다고 여겼다. (...) 소리를 내서 읽으면 좋은 점이 참 많다. 좋은 글에는 무엇보다 리듬이 살아 있다. 훌륭한 책은 내용도 좋지만 무엇보다 글의 가락이 자연스럽다. 글의 결은 소리를 내서 읽어야 비로소 느껴진다. 좋은 글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면 말의 가락이 살아나서 울림이 더 깊어진다. 오늘날은 낭독의 중요성이 강조되지 않지만 좋은 글을 쓰려면 소리 내서 읽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p.113

옛 선비의 앉은뱅이책상 곁에는 으레 항아리나 궤짝, 또는 협사라 불리는 대나무로 짠 상자가 놓여있었다. 공부를 하다가 생각이 퍼뜩 떠오르면 곁에 쌓아둔 종이에 적어 상자에 넣어둔다. 기억해둘 만한 내용도 중요한 부분을 베껴 써둔다. 베낀 뒤에 자기 생각도 메모해둔다. 그리고 귀양을 가거나 벼슬에서 물러나 한가해지면 이 메모 뭉치가 든 상자를 꺼내서 체계를 갖춘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p.149

밭이 넓었고, 밭두둑 가에 감나무가 심겨 있었던 듯 하다. 가난한 중국 선비는 농사로 생계를 이었다. 김을 매면서도 생각이 자꾸 이어졌다. 잡초를 뽑다가 악을 제거하는 마음공부의 한 자락을 깨닫고, 거름을 주다가 선을 북돋우는 방법을 떠올렸다. 호미로 돌멩이를 뽑아 내던지다가 며칠째 맴돌던 구절이 문득 이해되었다. 메모를 해야겠는데 그곳은 밭이었고, 가난해 종이도 없다. 생각 끝에 그는 아예 밭 가운데 작은 항아리를 묻었다. 감잎을 따서 넣어두고 붓과 벼루도 함께 놓아두었다. 김을 매다 짧게 깨달음이 지나가면 항아리 근처에 다다를 때 까지 생각을 다듬어 감잎에 적어 항아리 속에 넣어두었다. -p.150

천재는 없다. 다만 부지런한 기록자가 있을 뿐이다. 요즘도 같다. 처음에는 덮어놓고 적다가 차츰 분명한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적어나가면 된다. 적기만 하면 안되고 중간중간 갈무리해서 하나의 체계속에 정리해두는 것이 더 중요한다. -p.155

서재 이름이 우오루(雨梧樓)다. 오동잎에 빗방울 후드득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서루(書樓)란 뜻이다. 오동나무는 키가 크고, 그의 서루는 높직하게 자리잡았던 것이 틀림없다. 깊은 밤 등불을 밝혀놓고 책을 읽을 때 빗방울이 창밖 오동잎을 치는 소리, 생각만 해도 정신이 시원하다. 첫 글자인 우(雨) 자에서 위쪽 두 점의 획을 옆으로 슬쩍 휘어놓자 마치 빗물이 처마 밑으로 파고들다 그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 같다. 그의 모든 책에 이 도장이 어김없이 찍혀 있었을 것이다. 우오루, 참 예쁜 이름의 서재다. -p.206~207

"한 권의 책을 다 읽을 만큼 길게 한가한 때를 기다린 뒤에야 책을 편다면 평생 가도 책을 읽을 만한 날은 없다. 비록 아주 바쁜 중에도 한 글자를 읽을 만한 틈이 생기면 한 글자라도 읽는 것이 옳다." -p.214 홍석주

잊어버리고 하는 독서, 조금씩 습관처럼 반복하는 책 읽기는 뜻밖에 효과가 마디다. 삼시 세끼를 먹는 데 특별한 목표가 있을 수 없다. 세끼를 끼니때마다 이유를 달고 먹지는 않는다. 먹어야 하니까 먹고, 먹는가보다 하고 먹는다. 독서도 이 경지에 이르러야 일상이 된다. 특별히 배가 고프지 않아도 때가 되면 먹는다. 규칙적으로 먹는다. 소화가 안되면 한 끼를 건너뛰는 수가 있기는 하다. 배고프다고 한꺼번에 폭식해 버릇하면 나중에 건강을 상한다. 독서가 우리의 일상에서 멀어진 것은 세끼 밥 먹듯 독서하는 습관이 사라진 것과 무관치 않다. 무심코 책을 들던 손이 스마트폰만 찾게 되면서 우리는 생각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기계의 노예가 되어버렸다. -p.214~215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 조급증을 버리고 즐기며 해라.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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