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양장) - 유년의 기억 소설로 그린 자화상 1
박완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참 안읽히는 봄이다.

의식을 깨우는 인문서도,
잠 못 들게 하는 소설도,
눈이 즐거운 그래픽 노블도,
마음 설레게 하는 그림 관련 책도
모두 잡으면 한달을 간다.

독서모임의 이번 책인 `그 많던 싱아는....` 역시
금새 읽겠지 라는 생각과는 달리
2주를 건성건성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반도 못 읽은 상태에서 당장 독서 모임을 하루 앞두고 반나절만에 읽어버린.......

책 느리게 읽기로는 금매달감인 내가
반나절만에 장편소설을 다 읽었다는 것은
정말 기적에 가까운 일 중 하나이다.
그만큼 이 책은 재미있다.
(깔깔 웃음이 나오는 의미의 재미가 아닌
글을 읽는 내내 그 작가만의 글맛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재미 말이다.)

나는 박완서의 글이 처음이다.
유명하면 일단 제쳐두고 보는 이상한 성격 탓일까?
아니면, 한국 소설은 비슷해 라는 고정관념 때문일까?
초판 발행년도가 20년도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 대단한 책을
그간 나는 얏잡아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박완서.......
참 대단한 작가구나....
아니, 작가이기 이전에 참 대단한 여자구나 싶다.
일제시대부터 6.25 전쟁까지
그녀와 그녀의 가족이 살아온 시간들이 소설의 옷을 입고 내 앞에 마주한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켜켜히 쌓여 역사가 되고,
그저 살고자, 살아내고자 발버둥치며 선택했던 삶은
이념이라는 양날의 검 앞에 어느 쪽에 서든 상처를 남겼다.
그 시대를 살았던 내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그들이 감수하고, 버티며 살아온 시절이, 세월이
새삼 가슴아프면서도 존경스럽다.

내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내 새끼 배 안 곯게 하고,
내 집안을 무탈하게 건사할 수 있다면
나 역시 식민 상황에 적응하고,
대세인 이념에 동조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
문득, 식민도, 전쟁도 경험 못한 지금에 사는 게
참 감사하다.

박완서의 소설을 읽으며,
우리 말이 주는 느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모국어의 그 미묘한 느낌.......
이 감동을 어떻게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단말인가...
어느 한국말을 잘 하는 외국인이
이 감동을 온전히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말이, 우리 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런 일이란 말인가.....

벼르고 벼르던
우리의 대하소설을 접할 때인가보다.

"그러나 텃밭에는 먹을 게 한창일 때였다. 당장 따서 쪄낸 옥수수의 감미를 무엇에 비길까. 더위가 퍼지기 전 이른 아침 이슬이 고인 풍성한 이파리 밑에 수줍게 누워 있는 애호박의 날씬하고도 요염한 자태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또 어떻고. 못생긴 걸 호박에 비기는 건 아무것도 모르는 도시 사람들이 지어 낸 말이다. 늙은 호박에 비한 거라고 해도 그건 불공평하다. 사람도 의당 늙은 이하고 비교해야 할진대 사람의 노후가 늙은 호박만큼만 넉넉하고 쓸모 있다면 누가 늙음을 두려워하랴." -p.97-

"내 꿈의 세계 창 밖엔 미루나무들이 어린이 열람실의 단층 건물보다 훨씬 크게 자라 여름이면 그 잎이 무수한 은화가 매달린 것처럼 강렬하게 빛났고, 겨울이면 차가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힘찬 가지가 감화력을 지닌 위대한 의지처럼 보였다. 책을 읽는 재미는 어쩌면 책 속에 있지 않고 책 밖에 있었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의 하늘이나 녹음을 보면 줄창 봐 온 범상한 그것들하곤 전혀 다르게 보였다. 나는 사물의 그러한 낯섦에 황홀한 희열을 느꼈다." -p.135-

"시민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고 꾀어 놓고 떠난 사람들 같지 않게 안하무인이었다. 어쩌면 자기 잘못에 대한 자격지심 때문에 선수를 치느라고 그렇게 위세를 부리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파의 정상은 그렇게도 잘 참작해 주던, 그야말로 성은이 하해와 같던 정부가 부역에는 그다지도 지엄할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p.253-

"나는 밤마다 벌레가 됐던 시간들을 내 기억 속에서 지우려고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며 몸부림쳤다. 그러다가도 문득 그들이 나를 벌레로 기억하는데 나만 기억상실증에 걸린다면 그야말로 정말 벌레가 되는 일이 아닐까 하는 공포감 때문에 어떡하든지 망각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신이 들곤 했다." -p.255-

"엄마는 상상력 속에서도 아들을 죽일 수가 없었으므로 계속 인민군으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다." -p.261-

"우리가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거야말로 고약한 우연에 대한 정당한 복수다. 증언할 게 어찌 이 거대한 공허뿐이랴. 벌레의 시간도 증언해야지. 그래야 난 벌레를 벗어날 수가 있다."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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