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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잭, 랠프, 돼지가 주요 인물로 나오는 이 소설은 수천년간에 걸친 인류사의 압축 필름이라 할 수 있다. 문명과 문화란 것을 주체적으로 창조해내기 힘든 소년들을 문명과 문화로부터 상당히 동떨어진 외딴 섬에 데려다 놓음으로써 저자는 야만의 세상이 열릴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인류사를 보자면 어떤 무리가 반목하게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한 목표를 향해 오월동주하다가 그 일차적 뜻이 이루어지게 되면 그 후부터는 분열하게 되는 것이고, 반면 공동의 뜻이 계속적으로 성취되지 않을 때에는 주도 세력에 불만을 품은 자가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렇다 함은 결국 인간사史에서 대립과 반목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후자의 이유때문에 소년의 무리에 갈등과 반목이 싹트게 된다.
소라라는 상징적 물건을 가진 랠프가 우선권을 쥐게 되지만 물리적 능력과 위압적인 분위기 말고는 딱히 뛰어난 점이 없으며 줄거리상에 돼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끼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떤 잘못이나 과오라도 잘못을 인정할 때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만 애석하게도 랠프는 열등감은 느끼되 돼지에게 자문을 구한다든지, 다른사람에게 뜻을 굽히지는 않는다.
그 결과 잭이 어떤 무리를 이루어 떨어져 나간다. 분리된 두 집단의 구성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랠프의 집단은 일단 수적으로도 적을 뿐더러 단기적으로는 어떤 세력 구축에 힘이 되지 않는 어린아이들까지 대거 포함한다. 반면 잭의 집단은 물리력을 갖춘 대다수의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포함된다. 랠프가 약자까지 끌어안으려는 희생정신이 컸다거나 어린 것들을 챙기려는 인간적인 태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지만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본래의 집단이 위협당하는 판국이 된다. 역사를 공부할 때 나타나는 사회상의 분열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처음부터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다. 처음 잭의 집단이 잡은 고기도 나눠주는 부분만을 보더라도 처음부터 완전히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구도는 아니었다. 비록 자기집단의 세력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이 후의 경과과정에서는 모두가 이성을 잃어가며 아예 의도적으로 인간성을 숨기기 위해 금수禽獸의 탈을 쓰고 종국적으로는 서로를 파멸시키려고 한다. 물론 후반부로 갈수록 집단간의 역학 구도는 단방향으로 굳어지지만 말이다.
잭의 집단은 그들만의 어떤 의식을 거행하던 도중 고의 반 부주의 반으로 이성을 잃고 섬에 존재하는 '어떤 위협적인 것'의 존재에 대해 알리려고 하는 전령까지 죽이게 된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성을 잃는 상황에서는 바른 말을 하는 사람, 혹은 객관적으로 문제를 직시하고자 하는 사람들조차 '우리가 아닌 너'라는 이유만으로 적敵으로 규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물리력의 우위에 있는 집단은 경쟁력을 잃어버린 상대 집단에 대해 적대 그 이상의 감정으로 궤멸시키려고 까지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로부터의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남으로서 야만성의 가면에 짓눌려 있던 본연의 인간상을 회복하게 된다.
이 소설은 인간사회의 생성, 발전과 경쟁, 그리고 몰락까지의 과정을 일정 비율로 압축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불시착하는데 살아남은 이들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이성을 갖추지 못한 소년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문명의 발생을 압축시키기 위해 인간사회를 축소했기 때문에 거기엔 축소되지 않은 성인이 들어갈 틈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 게다가 처음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모두가 노력하여 합치점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인간인 이상 저지를 수 밖에 없는 사건과 실수들, 그리고 어떤 우연들에 의해 그들은 반목과 대립을 하고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치닫게 된다. 이런 줄거리는 발전과 통합,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몰락을 의미한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인간이란 이러한 과정을 필연적으로 되풀이 할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 섬에서 일어난 비극은 그들이 일정 이상의 이성과 지식을 가지지 못한 '소년'들이기 때문인가? 마지막에 나타난 일종의 구세주 어떤 성인들이 '구원할 능력'을 가진 함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로 처음부터 같이 있었다면 이런 참사는 막을 수 있었는가? 혹은 모두가 일정 이상의 이성과 지식을 갖춘 성인들이었다면 모두가 무사하게 구출될 수 있었겠는가?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들을 의미심장하게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