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하기위해 다른 책을 조금씩 읽는다. 그러다 가끔 정말 맛있는 책을 만나면 본요리는 대신 그 애피타이저만 끝까지 먹어치울 때가 있다. 주완수 화백의 책이 그랬다. 파울로의 이 책은 그렇지는 않았다. 서문에 쓰인 작가의 조건을 읽으며 쿡쿡거리다 야금야금 읽게 되었다.
일본의 어떤 학자가 현대 소비자를 소비주의자라고 개명했듯, 소비와 욕망의 배출만을 탐하는 세속에서 누구도 욕망의 부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책은 정신적 방부제 같다고나 할까. 그치만 방부제는 먹는 건 아니다. 먹어서도 안된다. 아무리 유기농 방부제라고 해도. 방부제는 다만 부패 방지 기간을 연기시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썩었다. 잃어버린 삶의 지침을 찾았다 해도 잠깐 부패를 멈춰세우거나 부패의 지연은 가능하지만 지나간 시간과 도상의 나는 되돌릴 수 없다. 이 썩음과 타락의 길에서 잠시 쉬었다갈 수는 있어도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더욱 더 잘 알기에. 그렇기에 잠깐동안 썩지 말라는 방부제의 유효기간이 그리 반갑지만은 않다.
“ 진짜 운명을 발견하는 일은 드물다. 신은 부당하다고 빈정이 상할 뿐이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가 알려질 때 그 순간이 찾아오면 이미 우리 삶을 변화시키기에는 늦은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치 사막같이 계속해서 끊임없이 고통받는다. 우리가 낭비해온 시간에 대해 우리 자신을 비난한다. ”(p152)
삶은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나는 더 어리석고 무의미하다. 코엘료의 착한 거짓말은 내겐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의 이야기를 읽고 삶의 변화를 보이는 순진함이 내게 아직 남아 있다면 .... 그렇지 않기에 그의 글들은 내 입맛에 본요리를 잊을 만한 애피타이져는 아닌 것이다.
마음을 다독이는 좋은 글들이 많다. 마치 흐르는 가람인 듯 그의 글이 조용히 흐른다.
♣책 속 한 구절
“낙관론자도 비관론자도 결국엔 둘다 죽는다. 하지만 서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살아간다.”(p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