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탄생 - 한국사를 넘어선 한국인의 역사
홍대선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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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아빠 선생님 말씀 잘 들으며 자란 난 스스로를 제법 규범적이고 인내할 줄 아는 인간이라 여겼다. 이런 나를 남이란 거울에 비춰볼 기회가 있었으니, 때는 도쿄 유학 시절. 섬나라라 원체 습도가 높은 데다 하필 분지여서 맹렬히 뜨겁고 푹푹 쪘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이런 날씨에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오를 수 있을 리 만무하니, 수업이 끝난 뒤 역 앞 번화가(駅前)로 나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탔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슨. 버스를 탔는데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넓은 아량으로 생각해도 최소 32도는 될 것 같은 버스 실내. 머리 위 구멍에서 바람은 나오는 둥 마는 둥. 의미 없는 손부채질을 하며 머릿속은 초비상이었다. ‘너무 더운데, 창문을 열까?’ ‘에어컨 세게 틀어달라고 기사님께 말할까?’ 창문을 열면 그나마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에어컨 바람이 훅훅 찌는 바깥 공기에 압도당할 것 같았고, 무엇보다 창문을 열어젖힌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에어컨 세게 틀어달라고 하기엔 버스 안의 다른 모든 이가 너무나 얌전히, 마치 무기물처럼 앉아있었다. 손부채질은 물론 땀 닦는 시늉을 하는 이조차 없었다. 나와, 함께 탄 한국인 언니 둘이서만 난리였다.


“아니, 다들 안 더워? 왜 참는 거야? 부채질도 안 해? 세상에, 이게 대체 뭐야!”

한국이었다면 말도 안 되는 서비스에 열이 뻗쳐 5분도 참지 못하고 기사님께 말씀드렸을 텐데. 아니, 내가 말하기 전에 누군가가 진작에 외쳤을 거다. “거, 에어컨 좀 틀어요!” 하고.

결국 언니와 나는 열이 머리 끝까지 뻗친 채로 애먼 손바닥만 힘없이 팔랑거리다가 예정된 정류장에 내렸다. 환장하도록 더웠지만, 일본 땅에서 어글리코리안이 될 수 없었던 우리는 차라리 파김치가 되었다.


더위를 식히고 나니 물음표가 남았다. 조금 전 상황에서 난 남들보다 훨씬 참을성 없는 인간이었다. 가만히 앉아 가는 사람들을 보며 화마저 났으니, 나의 인간성 대체 무엇….

이날 이후였던 것 같다. 내색 안 하고 참는 일본인의 성향과, 이런저런 요구를 하며 목소리 높이는 한국인의 성향이 자꾸만 비교되듯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한국인의 탄생》에서 저자는 말한다. ‘한국인은 성격이 나쁘며, 놀랍도록 이기적인 동시에 이타적’이라고. 말장난 같지만 너무 맞는 말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나도 살아보니 영 좋은 성격은 못 되고, 남 때문에 가만히 있던 내가 피해 보는 건 눈 뜨고 못 보거든.


저자는 오늘날 한국인의 타고난 기질과 사고방식의 뿌리를 국토, 민족의식, 민족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찾는다. 키워드를 꼽자면 마늘, 귀주대첩, 정도전 정도 되시겠다.


1부에서는 척박한 한반도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한반도 정착인의 사연을, 2부에서는 절체절명의 전쟁을 통해 비로소 민족의식을 공유하게 된 사건을, 3부에서는 유교라는 철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현대 한국인의 민족성이 어떻게 발현했는지 들려준다.


특히 2부, 고려 현종 시대에 거란의 침략을 두 번 막아낸 사건은 빨려들어가듯 읽었다.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언제 생겨났을까? 어릴 적 영화 〈황산벌〉을 보고 난 뒤 줄곧 마음에 있었지만 풀리지 않았던 의문이,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다룬 대목을 읽고 비로소 시원하게 풀렸다. 조선시대 조정에서조차 ‘한반도의 역사는 고려시대 현종 전과 후로 나뉜다’고 인식했고 조선시대의 왕들도 고려 현종에게 제사를 올렸다고 하니, 그야말로 고려 현종의 재발견, 강감찬의 재발견. (고등학교 때 이 책이 있었더ㅣ다면 고려사 이해가 조금은 더 수월했을거다.)


한국인은 왜 마늘을 먹어야 했으며 성격은 왜 이리 괴팍한지 통쾌하게 풀이하던 저자는 3부에 이르러 한국인이 사랑하고 증오해 마지 않는 조선을 파고든다. 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를 공부하며 뒷목을 여러 번 잡았던 입장에서 꽤 신선했다. 나 역시 ‘결국 망한 나라’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있진 않았나. 그리고 저자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다.


📖 p.347

나는 한국인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앞으로도 한국인은 화가 많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성격이 그 모양인데 행복할 수가 없다. 반면 한국이 앞으로 어떤 위기에 처할지 알 수 없지만, 결국엔 극복하고 회복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기엔, 한국인은 성격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화를 내며 살아야 한다니 절망스럽지만,

정말… 언젠간 극복하고 회복하길 바랄 수밖에.

나는 한국인이 행복하길 바란다. 그러나 앞으로도 한국인은 화가 많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성격이 그 모양인데 행복할 수가 없다. 반면 한국이 앞으로 어떤 위기에 처할지 알 수 없지만, 결국엔 극복하고 회복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는 희망적이다. 현재 상태에 만족하기엔, 한국인은 성격이 너무 나쁘기 때문이다. - P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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