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라이브러리
매트 헤이그 지음, 노진선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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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아가는 이상 후회는 피할 수 없다. 조금 전 입 밖으로 낸 말에 ‘아차’ 싶기도 하고, 몇 년 전 일을 곱씹으며 두고두고 후회하기도 한다.


여기, 노라 시드의 인생은 후회로 점철되어 있다.


학창 시절, 그녀는 올림픽을 내다보는 전도유망한 수영 선수였다.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대신 이루어줄 거라는 아빠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지만 수영보다는 음악에 더 흥미를 느꼈고, 수영을 그만두고 친오빠와 함께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노라는 아빠를 실망시켰다.


노라의 밴드는 곡을 만들고 공연을 하며 제법 유명세를 얻었지만 남자친구 ‘댄’은 노라의 밴드 활동을 탐탁지 않아 했다. 댄의 꿈은 노라와 함께 펍을 운영하는 것. 그녀는 이제 막 궤도에 오른 밴드 활동 대신 댄과의 사랑을 택했다. 친오빠는 애지중지하던 밴드 활동을 접은 뒤 생활고에 시달렸고, 안부조차 물을 수 없을 만큼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밴드 활동을 함께했던 동료의 원망은 덤이었다.


사랑하는 ‘댄’과의 미래를 그리며 밴드를 그만두었건만, 노라는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일방적으로 결혼을 깼다. 그렇게 댄의 인생도 망쳤다. 함께 호주에 가서 살아보자는 단짝 ‘이지’와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엄마는 투병 생활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수영 선수가 되길 염원했던 아빠도 더는 세상에 없다.


이제부턴 그녀가 죽음을 선택하기 전 아홉 시간 동안 겪은 좌절들이다.


기르던 고양이 ‘볼테르’가 차에 치여 죽었다.

12년을 일한 동네 악기점에서 해고되었다.

한때 단짝이었던 이지에게 용기 내어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이 없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피아노 과외를 망쳤다. 그리곤 잘렸다.

옆집 할아버지 ‘배너지 씨’가 ‘이젠 자네가 내 약을 타오지 않아도 돼’라고 말했다.


이제 그녀를 필요로 하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살아가며 행한 모든 선택은 모두에게 불행한 쪽으로 흐른 것 같다. 아무래도 그녀는 이번 삶에 적합하지 않은 모양이다. 노라가 내린 모든 결정은 재앙이었을까.


이 소설에서 이야기를 움직이는 소재인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말 그대로 0시 0분 0초에 존재하는 자정의 도서관이다. 후회와 좌절로 가득한 삶 대신 죽음을 선택한 노라 앞에 미드나잇 라이브러리가 펼쳐진다. 여기에서 의문이 든다. 왜 하필 ‘자정’일까.

이따금 생각한다.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밤 12시는 인간이 만들어낸 기묘한 개념인 것 같다고. 세 개의 바늘이 하나가 되는 순간, 또각또각 흐르던 시간은 잠시 멈춰서는 듯 보인다. 자정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그 어딘가에 있다. 이때 초침이 정적을 깨고 오른쪽으로 아주 조금만 기울면 날이 바뀐다. 리셋.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애들 장난 같기도 하지만 우리의 관념은 그렇게 돌아간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도 자정을 가리키는 시계처럼 묘한 관념의 경계에 잠시 존재한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가능성의 공간. 노라는 모든 것의 경계에서 ‘이렇게 했더라면’이라는 많은 선택의 가능성을 더듬어본다.

“너에겐 선택의 경우만큼이나 많은 삶이 있어. 네가 다른 선택을 한 삶들이 있지. 그리고 그 선택은 다른 결과로 이어져. 하나만 달라져도 인생사가 달라진단다. 자정의 도서관에는 그런 인생들이 모두 존재해. 너의 이번 삶만큼이나 실재하지.”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52
0시를 가리키는 시계와 노라 내면의 미드나잇 라이브러리는 물성을 같이한다. 날이 바뀐다고 해서 시계의 본질이 달라지지 않듯, 다양한 삶의 형태에 내던져지는 노라 역시 자신의 호흡대로 살아갈 따름이다.

‘이것이 그녀가 살지 못해서 슬퍼했던 삶이었다. 살지 못해서 자책했던 삶이었다. 존재하지 못해서 후회했던 순간이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87
노라가 선택하지 못해 후회한 수많은 삶에 행복만 있는 건 아니다. 지독한 절망감도 따른다. 노라는 깨닫는다. 선택을 할 수는 있을지언정 결과까지 선택할 순 없다는 사실을. 후회와 절망으로 얼룩져 죽음을 택했던 노라는 아이러니하게도 꿈에 그리던 삶을 경험함에 따라 후회로 점철된 원래 삶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이야기 막바지에 이런 문장이 있다.

‘감옥은 장소가 아니라 관점이었다.’ 
《미드나잇 라이브러리》 p.401
마지막 장을 덮으며 떠오른 문장이 있다. ‘살다 보면 참 별일이 다 있어요.’ 몇 년 전 책을 읽다가 마음에 콩 박힌 문장이다. 살아가는 이상 후회는 어떤 형태로든 삶에 깃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노라나 마찬가지다.

그래, 대단할 거 있나. 우리는 순간을 산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우리는 매 순간 점을 찍고, 점들은 우리가 돌아볼 때 비로소 선이 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이룬다. 언제 어떻게 돌아보느냐에 따라 선은 올곧게도, 삐뚤빼뚤하게도, 가늘게도, 두껍게도 보인다. 노라가 살아가며 찍은 점들은 그녀가 돌아볼 때마다 형태와 색을 달리하며 그녀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다. 노라가 서른 살쯤 더 먹은 뒤엔 멋지게 주름 잡힌 얼굴로 환하게 웃을 수 있기를.



너에겐 선택의 경우만큼이나 많은 삶이 있어. 네가 다른 선택을 한 삶들이 있지. 그리고 그 선택은 다른 결과로 이어져. 하나만 달라져도 인생사가 달라진단다. 자정의 도서관에는 그런 인생들이 모두 존재해. 너의 이번 삶만큼이나 실재하지. - P52

이것이 그녀가 살지 못해서 슬퍼했던 삶이었다. 살지 못해서 자책했던 삶이었다. 존재하지 못해서 후회했던 순간이었다. - P87

옥은 장소가 아니라 관점이었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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