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박탈과 소수자 지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연결됩니다. 첫째는 앞서 언급했듯이 건강 상태가 사회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가난하고 비주류인 소수자일 경우 기저 질환을 앓는 인구가 더 많아 위중해지거나 사망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둘째는 이들의 경우 주거 환경이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케이트 피킷-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 평등한가, 원문 155쪽
사회의 불평등과 불안이 우리의 사회생활과 행복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원인이라면 이것도 숨 쉬는 공기만큼 정치인과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합니다.
케이트 피킷-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 평등한가, 원문 160쪽
작년, 그러니까 2020년 이 맘 때 쯤 돌이켜보면 우린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무척 예민해져있었다. 앞다투어 KF94 마스크를 구입했고, 마스크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지하철 안 인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공포심의 시작은 중국의 언론보도 영상이었다. 중국의 대도시는 텅텅 비었고, 길가에 나다니던 사람이 픽픽 쓰러졌다. 사람들은 집에 갇혔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건강을 잃을 것은 분명해보이고, 어쩌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내가 유지해온 이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공포는 스트레스가 되어 마음을 짓눌렀고, 스트레스와 두려움은 서서히 증오로 변모했다.
사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사람을 보거나 종교시설에서 집단감염이 생겼다는 뉴스를 접하면 화가 치밀었다. 주로 ‘시국이 이런데 왜 저렇게 남을 배려하지 못할까’라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특정 대상을 향한 증오심이 섞여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요양원, 고시원, 사우나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는 마음이 늘 무거웠다. 그저 그곳에 있고 싶어서 있다가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아니다. 보호자가 돌봐주기 힘든 환경, 온전히 독립된 나만의 공간을 갖기 힘든 형편, 고된 노동을 마친 뒤 꼭 사우나에 들러야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이 있기에, 요즘 같은 시기에 고시원에서 살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할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이밖에도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격차를 몸소 체감한 경험은 더 있다. 차마 다 글로 옮기지는 못하겠다.
저는 평론가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과 자주 토론을 했는데요. 그가 9.11 때 이런 비평을 했습니다. “나는 내 옆에 테러리스트가 있을까 봐 무서워요. 정부가 확인하도록 권한을 줄래요.” 지금은 이렇죠. “나는 내 옆에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이 있을까 봐 무서워요. 정부가 확인하도록 권한을 줄래요.”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새로운 불가촉천민이 탄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서로를 증오합니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가 1퍼센트의 치사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중략) 바이러스는 적이 아니에요. 바이러스를 죽일 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결과만을 만들 겁니다. 타인이 없으면 나도 살아남을 수 없어요. 이 두려움의 문화야말로 지금 가장 거대한 바이러스입니다.
반다나 시바-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원문 20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