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의 세계 - 세계 석학 7인에게 코로나 이후 인류의 미래를 묻다
안희경 지음, 제러미 리프킨 외 / 메디치미디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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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안희경이 제러미 리프킨, 장하준, 케이트 피킷을 비롯한 세계의 손꼽히는 석학들과 코로나 시대와 인류가 나아갈 길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가 여러 학자와 인터뷰를 하다 보니 각 인터뷰가 그리 길지는 않다. 그렇지만 석학들의 말엔 힘이 실려 있다. 간결하지만 묵직하다.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다.

책 제목인 <오늘부터의 세계>. ‘오늘부터의 세계=코로나19 이후의 세계’이겠거니 생각하며 책을 샀다. 읽으면서 인상 깊었던 점은, 석학들은 작금의 사태를 코로나19에 국한해서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코로나19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할 뿐 원인은 아니다. 원인은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이 제공했다.’ 인터뷰에 응한 석학들의 공통된 견해다.


과학자들은 유엔에서 재구가 여섯 번째 멸종에 들어섰다고 발표했습니다. 인간이 출현하기 전 4억 5000만 년 동안 다섯 번의 멸종이 있었습니다. 때마다 빠르게 대규모로 진행됐어요. 새 생명들이 생기기까지 1000만 년이 걸렸고요. 인간은 머지않아 멸종할 것이고, 10년 안에 지구의 생물종 절반이 사라진다는 암울한 전망이 나왔습니다.

제러미 리프킨-화석연료 없는 문명이 가능한가, 원문 23쪽

학자들은 메르스, 에볼라, 지카 바이러스와 마찬가지로 코로나19 창궐도 무분별한 개발과 생태계 파괴로 인해 숲속 생물들이 인간의 주거지역으로 등 떠밀려 내려오며 일어난 현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서라도 자연과 공생하는 삶의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성장 위주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표준을 고민해야 한다는 학자들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성장을 안 해도 제도를 잘 바꾸고 복지를 잘하면 국민 생활의 질은 올라갈 수 있어요. 옛날에는 밥 먹고 사는 게 중요하니까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성장을 더 하자’라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런 단계가 아니잖아요. 국민 소득 3만 달러 나라에서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게 뭔가’를 생각해 봐야죠. 과연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느냐’에 대해서 제대로 얘기해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어요.

장하준-왜 우리는 마이너스 성장을 두려워하는가, 원문 112쪽

경제적 박탈과 소수자 지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연결됩니다. 첫째는 앞서 언급했듯이 건강 상태가 사회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가난하고 비주류인 소수자일 경우 기저 질환을 앓는 인구가 더 많아 위중해지거나 사망으로 진행할 가능성이 훨씬 높아요. 둘째는 이들의 경우 주거 환경이 취약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케이트 피킷-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 평등한가, 원문 155쪽


사회의 불평등과 불안이 우리의 사회생활과 행복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원인이라면 이것도 숨 쉬는 공기만큼 정치인과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합니다.

케이트 피킷-우리는 질병과 죽음 앞에 평등한가, 원문 160쪽


작년, 그러니까 2020년 이 맘 때 쯤 돌이켜보면 우린 바이러스에 대한 공포로 무척 예민해져있었다. 앞다투어 KF94 마스크를 구입했고, 마스크 값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지하철 안 인파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공포심의 시작은 중국의 언론보도 영상이었다. 중국의 대도시는 텅텅 비었고, 길가에 나다니던 사람이 픽픽 쓰러졌다. 사람들은 집에 갇혔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건강을 잃을 것은 분명해보이고, 어쩌면 직장을 잃을 수도 있고, 내가 유지해온 이 삶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공포는 스트레스가 되어 마음을 짓눌렀고, 스트레스와 두려움은 서서히 증오로 변모했다.


사태는 나아지기는커녕 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마스크를 제대로 쓰지 않은 사람을 보거나 종교시설에서 집단감염이 생겼다는 뉴스를 접하면 화가 치밀었다. 주로 ‘시국이 이런데 왜 저렇게 남을 배려하지 못할까’라는 답답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특정 대상을 향한 증오심이 섞여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요양원, 고시원, 사우나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는 마음이 늘 무거웠다. 그저 그곳에 있고 싶어서 있다가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 아니다. 보호자가 돌봐주기 힘든 환경, 온전히 독립된 나만의 공간을 갖기 힘든 형편, 고된 노동을 마친 뒤 꼭 사우나에 들러야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다.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이 있기에, 요즘 같은 시기에 고시원에서 살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할지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진다. 이밖에도 코로나19로 인해 사회적 격차를 몸소 체감한 경험은 더 있다. 차마 다 글로 옮기지는 못하겠다.


저는 평론가인 토머스 프리드먼Thomas Friedman과 자주 토론을 했는데요. 그가 9.11 때 이런 비평을 했습니다. “나는 내 옆에 테러리스트가 있을까 봐 무서워요. 정부가 확인하도록 권한을 줄래요.” 지금은 이렇죠. “나는 내 옆에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이 있을까 봐 무서워요. 정부가 확인하도록 권한을 줄래요.”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나요? 새로운 불가촉천민이 탄생했습니다! 사람들은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서로를 증오합니다. 우리는 이 바이러스가 1퍼센트의 치사율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중략) 바이러스는 적이 아니에요. 바이러스를 죽일 수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결과만을 만들 겁니다. 타인이 없으면 나도 살아남을 수 없어요. 이 두려움의 문화야말로 지금 가장 거대한 바이러스입니다.

반다나 시바-바이러스와의 전쟁은 왜 실패할 수밖에 없는가, 원문 209쪽

그럼에도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 마음이 마냥 무겁지만은 않았던 이유는 무수히 많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에 매몰된다는 것. 그 시기를 지나고 되돌아보면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기 마련이다. 내 경우엔 ‘나’를 잃고 취업에 쫓길 때가 그랬고 코로나에 쫓긴 2020년이 그랬다. ‘2020년은 코로나가 삼킨 한 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서 비로소 생각이 미쳤다. ‘나의 증오심과 두려움이 삼켜버린 한 해’는 아니었을까. 나를, 우리 사회를 되돌아보고 여러 가능성을 그려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앞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선택지들이 놓여 있다. 다만 정치적 선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정치 대리인들은 외양간에 메인 소와 같다. 여물을 만들어 입에 넣어줘야 마지못해 씹어 삼킨다. 내일의 안전을 위한 선택은 결국 우리 손에 있다. 촛불을 들었던 피곤한 손을 끊임없이 혹사할 수밖에 없는 정치 구조다. 그런데 어쩌랴. 다행인 건 주인들의 고생한 만큼 조금이나마 변할 수 있는 질서라는 것 아닐까? 오늘 당신의 선택에 희망을 걸고 싶다.

안희경, 원문 223쪽




우리 앞에는 이미 충분히 많은 선택지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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