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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여자 - 문학사를 바꾼 불꽃의 작가들
리디 살베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3월
평점 :
(리뷰 제목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따옴)
글쓰기가 삶의 전부이고, 작품이 곧 실존이었던 여인들의 이야기.
얼마 전에 <그녀들의 방> 을 읽어서 그런가. 버지니아 챕터에서 바네사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버지니아의 삶에 대해 말하는 장에서 그때 바네사는 어디에 있었을까.그래, 토비는 죽었지. 아버지는 바네사에게 살림 장부를 가져오게 해서 야단을 쳤겠지,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마치 버지니아가 소설 속에서 구현한 의식의 흐름처럼.
<어느 작가의 일기>에서 읽었던 버지니아도 생생하게 살아났다. 아마도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 삶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의 자매이자 나 자신인 채로 존재하는 작가일 지도 모른다. 버지니아는 또 <세월> 이라는 마이클 커냉햄의 소설에서도 되살아났지.
처음엔 얇은 책이라 부담없이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일곱 명의 여자에게 빠져들어서 지하철에서 부엌에서 열심히 책을 읽어내렸다. 나의 소녀 시절을 장악했던 브론테 자매들의 이야기는 익숙했다. 주나 반스는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당시 파리의 카페에서 이름을 날렸던 유명한 작가들 중에 우리나라엔 소개되지 않은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다. 그녀의 기이한 삶, 장수를 했던 그녀. 칩거 생활은 무려 30년에 가까운 것이었다.
실비아 플라스는 어느 순간부터 내 속에 깊이 박힌 작가가 되었다.그녀는 천재였지만, 결혼 후 부엌으로 밀려난 후에 인정받지 못했다. 그녀가 살았던 시절 여성들은 지금보다 훨씬 지위가 낮았다.천재건 뭐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으면 뭘 하기가 어려웠다.테드는 시로서 인정받고 승승장구했지만,그녀의 시는 조롱받았고 뭔가 좀 부족한 것으로 치부되었다.실비아 플라스가 죽은 후에야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은 무척 슬픈 이야기로 들린다. 최근에야 모든 어머니가 외롭다는 것이 심리학 책에도 나오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살던 시절에는 어머니가 되어 외로워진 것, 그리고 자식에 대해 양가감정을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실비아는 내면에서 항상 의문을 품고 홀로 투쟁했던 삶을 살았다.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이 잠든 사이에 시를 쓰면서, 그녀는 자신이 무엇과 투쟁하는 지 알기 위해 애썼다.실비아가 적이 없는 전쟁 속에서 피투성이가 되어갈때,테드는 자신의 삶을 찾아서 나아갔고 결국 실비아를 떠나갔다. 테드를 원망할 생각은 없다.그가 나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그는 남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았고,여성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실비아가 왜 힘들어하는지 좌절하는지에 대해 살필 만한 이해력이 없었다.실비아는 테드가 떠난 후에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런던에 갔고, 문단에 가까이 가길 원했지만 문단의 무관심에 부닥쳤다. 문단이란 무명작가에게 좌절감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걸까.
나는 실비아의 삶이 다른 여자들의 삶에서 지금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여자이기 때문에 자유를 잃는다.그게 어떤 것인지 남자들은 잘 모른다.그들은 항상 남자도 마찬가지야, 라는 말로 입을 막는다.하지만 어린아이를 돌보기 위해서 모든 감각이 깨어나 있을 수밖에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다.그들은 자기에게 중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다.그들은 여성들에게 중요한 일은 언제나 포기해야 마땅한 일로 여긴다. 아이를 낳은 후에 혼자 만의 밤 외출이나 혼자만의 여행을 한번도 떠나지 못한 여자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까.진심으로 알까? 가슴 깊이 그 삶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본 일이 있을까? 세상에서 지워져버린다는 것의 의미를 그들이 알까? 나름대로의 재능과 활력이 있었지만,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십년이 흐르고,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져버린 여자들이 느끼는 좌절을 알까? 자유는 커녕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여자들도 있다는 것을?
물론 실비아에게는 깊은 병이 있었고,충격적인 치료까지 받은 경력이 있었다.그러나 병이 그녀의 본질이었을까? 나는 부엌에서 가끔 실비아를 생각한다."내가 여기 있어요.내가 시를 쓰고 있어요."라고 세상을 향해 끝없이 신호를 보냈던 실비아를. 아무도 받지 않을 그 신호를. 시인의 예민한 감성으로 그녀는 부엌에서 무엇을 느꼈을까. 양념이 묻은 손을 물로 닦고, 아이들이 안전한지 살핀 후에야 깨어진 생각의 조각을 잇기 위해 애쓰는 실비아가 보인다.
마리나 츠베타예바에 대한 글을 정말 새로웠다. 마리나의 시를 읽고 싶은데, 번역본이 없고...수전 손택이 마리나에 대해 언급한 글이 있다고 한다.http://blog.aladin.co.kr/mramor/1779102(로쟈님의 서재에서) 마리나에 대한 글을 읽고 나니, 가슴이 턱 막혔다.철저하게 비극적인 삶을 산 시인을 두고 사람들은 이제 "20세기 러시아의 위대한 시인중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왜 마리나가 살아 있을 때, 그녀가 도움을 구했을때 모두가 외면했을까.그녀가 편지를 보냈을 때 답장하지 않은 프랑스 작가 중에 앙드레 지드의 이름이 눈에 띈다.모두가 그녀를 외면할 때 파스테르나크만이 그녀와 편지로 깊은 대화를 나눴다.
혹독한 정치로 인간의 삶이 비참해지고 모두의 눈이 멀어 있을 때,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그래도 글을 쓰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혁명 당시에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가 "시인은 숨을 쉴 수 없어 죽는다."라고 말하고 죽었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자유를 억압받고 언어를 통제당할 때, 시인은 숨을 쉴 수 없어 죽는다. 마리나도 어떤 타협도 하지 않고, 자신의 시를 고집했다.그래서 비참한 삶을 살았다.그녀가 적당히 타협했더라면 비극은 없었을 지도 모른다. 마리나는 문인들이 '나병같은 존재'로 전락한 순간에도 시를 썼다. 자신을 위태롭게 만들 시를. 남편은 모진 고문 후 정신병원에 갇히고, 처형당했다. 남편이 죽기 한달 전에 마리나는 자살한다.그녀의 자살은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벌써 일년 가까이 내가 목을 매달 고리를 찾고 있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도, 알지도 못한다."라고 그녀는 썼다. 한 위대한 시인의 비참한 고독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다.
잉에보르크 바흐만.
<30세>라는 책에 매료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바흐만의 챕터에서 눈에 띄는 것은 파울 첼란이다.파울 첼란의 시를 외우고 다니던 시절도 있었다.새벽마다 검은 우유를 들이켜야만 했던 혹독한 시절에 대한 시. 바흐만과 첼란처럼 언어가 오염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시인들이 있었기에 문학은 숭고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순간에도 시를 잃지 않았던 시인들의 삶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암흑 속에서도 빛을 탄생시키는 언어, 문학.
바흐만도 비난을 감수해야했던 여성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모든 것에 사람들은 당황했다. 가부장제의 폭력성과 죽음의 이데올로기를 신랄하기 비판했다는 이유로 심기가 뒤틀린 남자들은 그녀를 '추락한 여류시인'이라고 규정했다고 한다. (여류라는 말에 그토록 저항했건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여성 작가들은 여류작가로 불린다. 뭐 좀 한다는 그렇고 그런 여자들, 그런 부류, 라는 경멸의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남류작가라는 말이 이상하듯이 여류작가도 그렇다.)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국가 파시즘은 은밀하게 내적인 파시즘으로 연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도 내적인 파시즘과 싸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체 없는 적과의 싸움은 일상에서 매일 일어난다. 멀쩡해보이던 사람이 내적인 파시스트일 수도 있다. 약자와 여성을 혐오하는 방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사상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낸다. 상대방에게 모멸감을 주었다는 것조차 모른다. 이 책에 나온 일곱 명의 여자들은 평생 그런 내적인 파시즘과 싸웠는지도 모른다.그런 삶이 어떤 것일지 상상력을 가지고 들여다보기를. 부디 공감능력을 갖기를. 왜 너희들은 그렇게 괴로워해? 이런 태평천하에, 라고 채만식 소설에 나온 윤직원 영감 같은 사람이 되지 말기를.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1973년 10월 17일에 로마의 한 병원에서 화상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글쓰기를 마음에 품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던 일곱 명의 여자들. 하고 많은 것들 중에서 하필이면 시를,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 오로지 글쓰기만이 삶의 방식이며, 작품만이 실존이었던 여자들의 이야기...이 책을 쓴 소설가 리디 살베르의 문체는 참 가슴에 와닿는 무엇인가가 있다. 글쓰기가 고통의 시작임을 알면서도 그녀들은 적당히 타협하고 포기하지 않았다.글쓰기는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가 지저귀는 것을 멈출 수가 있을까? 살아 있는 한. 죽는 순간에야 새는 이제는 지저귀지 못하겠구나,하고 생각할 것이다. 글쓰기를 한번 마음에 품은 사람은 죽는 순간에야 글쓰기를 기꺼이 포기할 수 있으리라.글쓰기란 그런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도하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지속하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습니다.” 글쓰기란 그런것이 아닐까. 글을 쓰기 위해 희망할 필요도 없고, 계속 쓰기 위해 성공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실패했다고 해서 글쓰기를 박탈당해야 마땅한가?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이해받지 못하거나 무시당하거나 비난을 받는다고 할 지라도 글을 쓰는 한 그녀는 존재한다. 아무도 그녀에게서 그것을 빼앗아갈 수 없다. 마리나 츠베타예바의 말처럼 "글쓰는 일을 뺀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고립, 외면, 좌절, 가난, 외로움, 두려움과 같은 단어는 이미 오래도록 삭아서 향기로운 술이 되었을 뿐, 그 말들이 그녀를 절망에 빠뜨리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오늘도 세상에 신호를 보낸다. 아무도 받지 않는 신호를.
학살은 과거의 일이지만 살인자들은 우리 가운데 있다. 하지만 그들의 범죄는 달라졌다. 오늘날 범죄는 참으로 치밀해져서 우리 주변과 이웃에서 일상적으로 범해지는데도 우리가 그걸 의식하고 이해하기가 어렵다. 주장하건대, 실제로 오늘날엔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게 아니라 살해된다. -잉게보르크 바흐만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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