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인 소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6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분위기에 젖다 - 내가 죽인 소녀 _ 스토리매니악


추리소설, 스릴러 소설 등의 장르소설을 즐겨 읽는 편인데, 같은 장르에서도 스타일에 따라 각각의 소설을 좋아하는 정도가 다르다. 내 경우는 꽉 짜인 추리를 즐기는 편이라기 보다는, 분위기를 상당히 즐기는 편이다내가 워낙 추리에 소질이 없어서인지도 모르지만, 일단 분위기로 장악하고 그 분위기 안에서 옴쭉달싹 못하여 이야기에 끌려가거나 떠밀려 가는 스타일을 좋아한다.

 

몇몇 작가를 들자면, '미쓰다 신조' '교고쿠 나쓰히코',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하라 료' 등의 소설을 좋아한다. 보면 알겠지만 정통 미스터리 스타일이라기 보다는 약간의 다른 장르가 섞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이다. 특히 하라 료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이야기를 쓰는데, 나는 이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좋아한다. 다만,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소설은 그 편차가 좀 심한 편이라 자주 읽는 편은 못 된다.

 

, 제대로 된 분위기를 내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소설도 그다지 없는 편이다.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내걸며 나오는 책들도 읽어 보면 그 분위기가 못 미치는 경우가 태반인데, 하라 료는 그래도 그 분위기를 잘 살려내는 작가로 평하고 싶다. 특히 이 책 <내가 죽인 소녀>는 그 스타일과 분위기가 상당히 하드보일드 하여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는 '사와자키'라는 탐정을 중심으로 진행 된다. 천재 소녀라고 주목 받는 어린 바이올리니스트가 유괴 되고, 이 유괴 사건에 휘말려 들게 된 탐정이 유괴 사건의 범인을 밝혀 가는 과정이 주요 줄거리다.

 

하드보일드라는 장르가 워낙 정의하기가 만만치 않은 장르다. 여러 정의가 있긴 하지만, 나는 우선 묵직한 분위기와 작중 인물들의 대사에 얼마나 하드보일드한 힘이 들어가 있는가를 보는데, 이 책은 그 두 가지를 아주 만족시켜준다. 특히 분위기는 여태 읽은 하드보일드 소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묵직함을 지니고 있다나는 이 책을 꼭 집에서 그것도 밤 늦은 시간에만 읽었는데, 소설의 묵직한 분위기를 더 제대로 느끼고 싶어서였다. 탐정의 고뇌나 일 처리 방식, 그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 그리고 그만의 독백 등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일관성 있게 끌고 나간다. 그 분위기에 젖어 이야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분위기가 묵직해서 그런가, 이야기가 경쾌하게 읽히는 감은 없다. 보통 미스터리 소설을 속도감 있게 읽는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런 것들과 비교한다면 정반대다. 상당히 느린 걸음으로 문장 문장 사이를 걸어야 한다. 뭐랄까, 뭔가가 자꾸 발목을 잡아 끄는 것처럼, 무거운 걸음을 터벅터벅 옮기는 듯한 느낌이다.

 

이 소설은, 분위기, 스타일 뿐만 아니라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재미도 한 껏 지니고 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빠른 속도감을 갖지 않다 보니, 오히려 추리와 추리 사이, 즉 탐정이 실마리를 풀어가는 과정을 논리적으로 따라가게 된다. 이 조사와 저 조사 사이, 이 장소와 저 장소 사이에 어떤 힌트가 숨어 있는 것인지, 사와자키는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지 무의식 중에 그 자체의 미스터리 방식을 즐기게 된다다른 정통 미스터리의 퍼즐과 비교한다면 잘 짜인 추리인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과정의 진행과 해결에 이르는 줄기가 꽤 만족스럽다

 

일반적인 재미있다 하는 미스터리 소설과는 다른 방식의 재미를 주는 소설이라고 평하고 싶다. 경쾌한 느낌이나 추리 자체의 짜인 느낌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좀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 하지만, 묵직한 느낌의 분위기로 이야기에 몰입하게 하는 소설을 좋아한다면 분명 만족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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