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
이윤 리 지음, 정혜윤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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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기를 때는 오직 그들이 잘 자라기만을 바란다.

나와 상호작용을 해줄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농담도 위트도 따뜻한 말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한강 작가는 『빛과 실』에서 식물을 기르는 마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저 잘 있어주기만을 바라는 마음.
어쩌면 사랑의 가장 순수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이윤 리 작가는 정원의 잡초를 뽑고, 뽑고, 또 뽑다가 마침내 손을 놓는다.
잡초도 자연의 일부이고, 자연에 속한 것들은 그저 자랄 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두 아들이 없는 세상에서.

키우던 두 아들을 모두 십 대에 자살로 떠나보낸 이야기 앞에서 나는 언어의 무력함을 느낀다.
그리스 비극이라고 부르기에도 조심스러운 슬픔이다.


첫아이를 낳았을 때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둘째를 낳으며 조금씩 알아가는 엄마처럼,
첫아이를 잃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슬픔의 견디는 법을, 두 번째 아이마저 떠나보낸 뒤에야 알아가야 하는 엄마가 있다.


잠을 자는 일.
물을 마시는 일.
조금씩, 자주, 무엇이든 먹는 일.
매일 몸을 움직이고, 책을 읽고, 하루를 끝까지 살아내는 일.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그녀에게는 슬픔 속에서 제자리를 지키기 위한 안간힘이 된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 아니라, 슬픔에 잠긴 채로도 가라앉지 않는 방법.
그렇게 바둥거리며 슬픔을 받아내는 법을 배워간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진흙을 묻히고, 딱지를 붙인다. 양념을 더할수록 이야기는 그럴듯해지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충고하고, 조언하고, 평가한다.
때로는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 자신의 마음을 개운하게 만들기 위해서.
복잡하고 모순적인 한 인간을 몇 개의 특징으로 정리하고, 설명하기 쉬운 인물로 만들어버린다.
죽은 사람들에게도, 죽은 사람의 엄마에게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식은 죽고 부모는 살아간다.
죽음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면서도, 남겨진 사람은 그 죽음 이후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 남겨진 삶에 가깝다.
두 아이에게 삶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을까.
그리고 두 아이가 떠난 뒤, 엄마에게는 그들이 없는 세상을 살아내야 하는 시간이 남았다.


카뮈는 말했다.
“삶이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일이야말로 철학의 근본적인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영특했던 두 아이도 일찍이 그 질문 앞에 서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우리가 철학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조차 그들에게는 너무나 구체적이고 절박한 고통이었을까. 그것마저 알 수 없다.


두 아이의 이름은 빈센트와 제임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이름들이다.
빈센트가 말이 많고 활동적인 아이였다면, 제임스는 조용히 생각에 몰두하는 아이였다.

“세상에 고통이 있다는 걸 알면서 왜 아이를 낳았어?”

빈센트의 질문에 엄마는 만족스러운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쩌면 누구도 그 질문에 충분히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섬세하고 예민했던 빈센트에게 세상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거칠고 아픈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말없이 생각에 잠기곤 했던 제임스는 어떤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까.
삶의 단짝과도 같았던 형이 떠난 뒤, 그에게 남겨진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자꾸만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 아이들의 성격에서, 질문에서, 형제의 관계에서.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을 몇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나는 또다시 그 아이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크기로 줄여버리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자살을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행위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음 자체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더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끝내고 싶은 것일 수 있다고 한다.
그 고통의 무게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온전히 헤아릴 수 있을까.
작가 자신도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이것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결정적인 단서처럼 보일 것이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엄마도 그랬으니 아이들도 그랬겠구나.
사람들은 쉽게 인과관계를 만들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완성한다.
기자와 호사가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소재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사람의 삶에 붙인 이름표가 다른 사람의 죽음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는 이제 아이들의 나이를 새롭게 헤아린다.
태어난 날로부터 몇 해를 살았는지가 아니라, 세상을 떠난 날로부터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를 세면서. 아이들은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지만, 아이들이 없는 시간은 계속 나이를 먹는다. 슬픔에도 끝이 있다고, 애도에도 마침표가 있다고 우리는 쉽게 말한다.
충분히 울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거라고.
하지만 어떤 슬픔은 끝나지 않는다.
그저 삶의 일부가 되어 함께 살아갈 뿐이다.
종착역이 없는 순환선을 타고, 같은 풍경을 거듭 지나면서도 매번 다른 아픔을 마주하는 일.
이윤 리의 글을 읽으며 나는 그 끝없는 애도의 시간에 잠시 동승한 듯했다.
그녀는 슬픔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슬픔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오늘도 물을 마시고, 밥을 먹고, 정원을 바라보고, 책을 읽는다.
그리고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이자,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강의 문장을 다시 떠올린다.
“그냥 잘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식물에게는 그토록 소박한 바람이, 사람에게는 때때로 가장 간절하고도 이루기 

어려운 소망이 된다.
정원의 잡초는 오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자랄 것이다.
뽑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자라는 이유를 묻지 않아도.
그리고 엄마는 그 정원 곁에서 또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 슬픔을 안다고 말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빈센트와 제임스라는 이름을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 이야기를 읽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조심스러운 애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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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이 힘들거나 위급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담전화는 109번이며, 이 번호는 24시간 운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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