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 빠지는 것은 오직 당신의 선택에 달려있다.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요즘은 주저없이 말한다. 폴 오스터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라고... 그가 현재 나와 같은 세상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기에, 나는 언제나 그의 신작을 기다린다. <환상의 책>은 그를 좋아하게 되고 나서, 내가 '기다렸던' 첫 작품이었기에, 더욱더 나에게는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의 글이 가진 흡입력은 언제나 감탄하는 바와 같이, 상당히 강렬하고 파괴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리 속에서는 헥터와 데이비드, 앨머가 종횡무진 떠다녔다. 그의 작품 속에서 그 인물들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 인물들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엔 상당히 괴상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소설 속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오스터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현실 속의 인물로 바꿔주는 것에 있으리라.

한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세 개의 소설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 한편은 바로 글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데이비드의 이야기이고, 또 다른 한편은 데이비드를 살아가게 만든 헥터의 이야기이고, 마지막 한편은 그 두 남자의 삶에 존재하는 영화,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과 삶'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모두 나의 환상 속에 존재하고, 이 책의 뒷장과 함께 동시에 오롯이 소멸한다. 완전히.

미친 듯이 책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하여,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난 결국 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려는 게 무엇인가라는 결론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음을 깨달았다.

데이비드.
결국 이 작품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존해 있는 인물은 이 단 한사람이다. 그는 가족을 모두 잃었고, 삶을 포기할 즈음에 와서, 헥터라는 무성영화 배우를 만났고, 그를 조사하여 책을 한 권 집필해 낸다. 그리고 실제의 그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앨머와 사랑에 빠지고,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작품 단 한편을 감상하게 된다. 그러나, 또 이와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죽는다. 헥터도, 엘머도, 그리고 프리다도. 결국 남은 이는 데이비드 단 한 사람이고, 남은 문서 역시 데이비드가 써놓은 헥터만의 삶에 대한 책 한 권과 이제 써야할, 그만이 알고 있는 비밀을 풀어놓은, 이 환상의 책 한 권이다. 결국 이 이야기는 데이비드의 머리 속에 들어있는, 그만이 알고 있는, 더 직접적으로는 그의 환상 속에 들어있는, 바로 그 이야기라는 것이다.

결국 그의 이야기를 증명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거나, 믿지 말거나, 방치해 두거나, 부정할 권리는... 오직 독자인 당신에게 있는 것이다. 단지 작가는 마치 환상과도 같이 부셔져 버리는 어떤 영상을 당신에게 제시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