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동안 너무나 만나보고 싶었다. 오지 탐험가로 이름을 날릴 때부터 말이다. 한비야. 왠지 그냥 이름만 부르면 안 되고, 선생님이라도 붙여야 될 것만 같다. 한비야 선생님. 이 책이 내가 책을 통해 처음 만나는 한비야 선생님이었다. 그동안 매스컴을 통해 어떤 분인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면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시나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그리도 한비야 선생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새롭게 알게 된 사실들도 있었다. 월드비전은 기독교NGO단체라, 한비야 선생님도 은연중에 기독교, 개신교일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근데 이 책을 보면서 한비야 선생님은 가톨릭이라는 걸 알게 돼서 참 반가웠다. 또 한 가지는 월드비전에서 한참 활동하시다 긴급구호 요원으로 활동하신 줄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쉽지 않은 일인 긴급구호 요원으로 활동하셨을 줄이야.

 

아무튼 월드비전의 긴급구호 요원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너무나 척박했고 위급했으며 그로 인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불과 50여 년 전엔 우리나라도 이러했다는 것이 너무나 믿기지가 않았다. 50년 전이면 딱 우리 부모님이 지금의 우리 아이들 또래이셨을 때다. 이렇게 생각하면 다른 나라의 힘겨움이 더더욱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지금 우리나라의 모습이 너무나 대견하게 느껴졌다. 물론 아직 경기불황이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국가적으로 볼 때 예전처럼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만해도 지금 내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한 번의 외식만 참아도 생기는 단돈 3만원이면, 세계 어딘 가에선 한 가정이 한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결코 그 돈이 아깝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결혼과 함께 우리의 행복이 참 크다고 여기고 신랑과 함께 마음먹었던 것이 있다. 앞으로 결혼기념일은 거창하게 보내지 말고, 결혼기념일마다 월드비전에 아동을 후원하자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지금 월드비전을 통해 인도의 한 소녀와 인도네시아에 한 소년을 만나 후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두 아이들까지. 이렇게 매년 우리에게는 결혼기념일마다 아이들이 생겨났다. 얼마 전 5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5번째 아이를 월드비전을 통해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은 집에서 조촐하게 지내기로 하고 말이다. 앞으로도 우리 결혼기념일에는 집에서 케이크 하나로 보내자 마음먹으며.

 

처음 시작은 매달 단돈 3만원이었지만, 이제는 매달 9만원이고 매년 108만원이라고 생각하니 그 돈이 참 크게 느껴져서 사실 주저하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주저하는 마음이 싹 사라졌다. 요즘은 좀 괜찮다하는 옷도 한 벌에 3만원이 넘고, 좀 좋다하는 화장품도 3만원이 넘는다. 그리고 친구 두 명만 만나도 흔히 먹게 되는 커피 두 잔과 조각 케이크 두 조각 정도에도 3만원이 훌쩍 넘곤 한다. 내가 한 달에 한 번씩만 이런 것들을 참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 쉽게 느껴졌다.

 

난 절대 한비야 선생님처럼 직접 현장에서 활동할 수는 없다. 한비야 선생님처럼 또는 다른 현장 활동가분들처럼 내 생활을, 내 삶을, 내 인생을 모두 다른 이들을 위해 내던질 수는 없다. 하지만 내가 부리는 사치를 조금 줄일 수는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난 전보다 더 많은 것들이 아깝게 느껴졌다. 너무 예뻐서 살 빼면 입는다고 사놓고 아직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너무 싸서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잔뜩 사놓곤 신고 나가보지 못한 구두들이, 필요할 때마다 사기 귀찮다고 장볼 때 한가득 사서 가득 채워놓은 찬장 속 음식들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다.

 

멋지긴 하지만 처음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이 책의 제목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왜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인지 말이다. 이 말은 한비야 선생님이 이 책의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읽고 더 많은 이들이 지도 밖으로 행군하길 바래본다.

 

그는 구호 일은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기술을 습득하느냐보다 어떤 삶을 살기로 결정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고 했다. 거칠게 이분화한다면 이런 게 아닐까. 자기가 가진 능력과 가능성을 힘있는 자에게 보태며 달콤하게 살다가 자연사 할 것인지, 그것을 힘없는 자와 나누며 세상의 불공평, 기회의 불평등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할 것인지. 혹은 평생 새장 속에 살면서 안전과 먹이를 담보로 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포기할 것인지. 새장 밖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가지고 있는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창공으로 비상할 것인지.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13 중에서 -

관계의 습관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일 혹은 어떤 사람과 어떻게 처음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설정되는 관계의 틀 말이다. 평소 늦잠을 자던 버릇이 새 집으로 이사한 뒤 말끔히 고쳐진 것처럼.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좋은 틀을 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디 일뿐일까.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 새로운 시간, 그 어떤 것이라도 처음 시작은 우리에게 좋은 관계의 습관을 짤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준다. 지금 나에게 그 기회가 왔다는 걸 잊지 말자.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29 중에서 -

현장으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 해봐야 10만 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면 맥이 빠진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되새긴다.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주었다.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했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61 중에서 -

작년에 한정된 구호 자금 때문에 한 마을은 씨를 분재하고 그 옆 마을은 주지 못했단다. 안타깝게 비가 오지 않아서 파종한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씨를 나누어준 마을 사람들은 씨를 심어놓았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수확기까지 한 명도 굻어 죽지 않았는데, 옆 마을은 아사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똑같이 비가 오지 않는 조건이었음에도 단지 씨앗을 뿌렸다는 그 사실 하나가 사람들을 살려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씨앗이란 존재만으로도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이다.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65 중에서 -

돌이켜보면 철들고 나서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이 방법을 쓰지 않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가령,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일이라면 해야 하는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나란히 써본다. 그러면 적어가는 과정에서 상황이 객관화되어 명쾌하게 정리되면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또 해야 하지만 거창하고 복잡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라면. 지금처럼 큰 종이에 사안과 일정 등을 표로 정리해본다. 이렇게 해놓으면 아무리 어려워 보이는 일도 한 장의 종이 안에 들어올 만큼 간단 명료해지며 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방 안을 말끔하게 정리정돈 해놓은 기분이다.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104 중에서 -

그래, 그래. 지금 99도까지 온 거야. 이제 이 고비만 넘기면 드디어 100도가 되는 거야. 물이 끓는 100도와 그렇지 않는 99도. 단 1도 차이지만 바로 그 1도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 그러니 한 발짝만 더 가면 100도가 되는데 99도에서 멈출 수는 없어. 암, 그럴 수는 없지. 99도까지 오느라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야.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132 중에서 -

‘막내누나. 난 지금 권투 시합중이야. 센 상대방 선수에게 잽을 많이 맞아 비틀거리다가 방금 정통으로 한 방 맞아서 링 위에 뻗어 있어. 심판이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어. 하나, 둘, 셋. 그러나 나, 정신은 놓지 않았어. 숫자 세는 소리 똑똑히 듣고 있어. 그러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지. 열 세기 전까지만 일어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때 일어나서 다시 싸우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막내누나, 지금 링 위에 누워 있다고 걱정하지 마. 열까지 세기 전에 꼭 일어날게.’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141 중에서 -

다시 한 번 라주 대령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썩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눈매가 서늘하고, 웃는 모습도 천진하다. 무엇보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품위가 배어나왔다. 신기하다. 도대체 그 품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군인이라는 직업이나 지휘관이라는 직책은 아닐 거다. 군 지휘관이라고 모두 라주 대령 같지는 않을 테니까. 사람의 품위를 결정하는 게 외적 조건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그럼 답은 분명해진다. 결국 품위는 자기 존재에 대한 당당함.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통제력, 타인에 대한 정직함과 배려 같은 소프트웨어에서 나오는 거다. 이것이 없다면 왕이라도 전혀 품위가 안 날 것이고, 이것이 있다면 일개 농부라도 품위가 넘칠 것이다. 나는? 난 아직도 멀었다. 저 소프트웨어가 대단히 탐나지만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197 중에서 -

눈을 들어 산을 보아라. 너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천지 지으신, 너를 만드신 야훼께로다.

네 발이 헛디딜까. 야훼 너를 지키시며 졸지 아니하시리라.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잠들지도 아니하신다.

야훼는 너의 그늘, 너를 지키시는 자는 항상 네 오른편에 서 계시어

낮의 해와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하리라.

야훼께서 너를 모든 재앙에서 지켜주시고 네 목숨을 지키시리라.

떠날 때부터 돌아올 때까지 너를 지켜주시리라.

이제로부터 영원히 너를 지켜주시리라.

시편 121편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p214 중에서 -

   

 

- 연필과 지우개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