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터 슬립
누리 빌게 제일란 감독, 할룩 빌기너 외 출연 / (주)영화사 백두대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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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영화. 별 다섯 개. 

국내 개봉에서는 3시간 18분이지만, 원래 영화는 3시간 59분짜리로, 훨씬 길다. 나중에 DVD나 블루레이로 삭제하지 않은 내용을 모두 보고 싶은 영화. 또 반드시 그래야 할 영화.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인물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와 도스또예프스키였다. 이 영화의 감독은 터키 사람이지만,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의 서사를 보면 러시아 정서와 매우, 매우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 지성과 감정, 욕망, 이기, 분노, 절망에 관한 것이다. 어느 나라, 어떤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해당할 수 있는 감정의 변주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성찰하고 있다.

특별한 사건도 일어나지 않고,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시간이 대화로만 이루어지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고, 대화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지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은 개인마다 크게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나에게 이 영화는, 주인공 아이딘을 통해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아이딘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면들, 허영심, 우월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글쓰기, 지극히 보수적인 태도, 자신보다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위선, 늘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분위기...

주인공 아이딘과 그의 여동생 네즐라와 서재에서 나누는 이야기와 아이딘이 아내 니할과 나누는 이야기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자,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아이딘이나 네즐라는 모두 지식인이다. 그들은 교육을 많이 받았고, 지성인이며 사회에서는 상류층에 해당한다. 아이딘은 연극배우도 했었고, 책도 쓰고, 신문에 기고도 하는 지성인이지만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아 호텔도 운영하고, 시내에 집과 상가가 여러 채 있는 부자이기도 하다.

네즐라는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오빠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는데, 호텔 운영에 도움을 주고 있지만 딱히 눈에 보이는 일을 하지는 않고 있다.

아이딘의 아내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젊은 여성으로, 독립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무기력하다. 세 사람의 입장은 모두 자신이 놓여 있는 상태 때문에 미묘하게 다르고, 그것이 각자의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에 아이딘의 건물에서 월세를 살고 있는 가족이 등장한다. 사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아이딘의 시각으로 보여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조금 해체해서 각 등장인물의 방향으로 조금씩 돌려보면, 이 영화가 말하는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가난한 노동자가 자본가의 집에 세를 얻어 살고 있다. 하지만 가장은 아내를 성추행한 못된 놈들을 응징하다가 감옥에 갇혀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오고, 그 때문에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월세가 밀리자 집주인인 아이딘을 대신한 변호사와 대리인이 월세를 독촉하고, 집기를 가져간다. 그 행동을 모두 지켜본 노동자의 아들이 어느 날, 아이딘이 타고 있는 자동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이 깨진다. 상황은 그때부터 달라진다.

월세를 내지 못하는 가난한 노동자의 입장에서, 한겨울에 쫓겨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시간을 더 달라고 부탁하는 건 당연하다. 물론 법대로 한다면 집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세를 사는 사람-정확히는 아이의 삼촌-이 아이딘의 호텔까지 찾아와 호소를 하지만 아이딘은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니 변호사와 이야기를 하라고 책임을 떠넘긴다.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아이딘의 태도는 분명 이기적이며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아이딘을 바라보는 여동생 네즐라는 그의 태도를 매우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네즐라가 바라보는 아이딘은 위선적인 인간이다. 종교도 없으면서 종교적 태도에 대해 말하고, 보편적인 내용만을 글로 쓰며, 교훈적이고 보수적인 내용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말도 많고, 여기저기 참견도 많이 하며, 아는 척, 잘난 척을 하는 인간이다.

아이딘으로서는 매우 억울한 말이지만, 동생이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라는 것을 아이딘이 모를 리 없다. 아이딘 역시 이혼하고 집에 와서 생활하는 여동생의 태도를 비난한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이딘과 그의 젊은 아내 니할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거의 비슷하게 드러난다. 아이딘은 자신이 누리는 기득권을 공기처럼 누리지만,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무기로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딘의 여동생이나 아내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아이딘이 가지고 있는 부유한 환경에서 안락하게 기생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할 길이 없다.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중요하지 않고 또 그것을 가릴 기준도 없다.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과 시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부닥치면, 극한으로 치닫다가 파멸로 끝나거나 서로의 이해를 조절하고 양보해 각자의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공감한다는 것은 쉬울 것 같지만 매우 어렵다. 특히 남성들이 여성들의 입장과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물론 여성과 잘 공감하는 남성들도 있다. 하지만 남성 사회에서는 극소수여서 통계치에도 들어가지 못할 정도일 것이다.


이 영화를 다시 분석해보면, 기득권 남성, 기득권 남성에 기생하는 여성, 기득권 남성과 여성에게 착취 당하는 가족이 있다. 기득권 남성 아이딘은 자신이 놓여 있는 사회적 위치가 정확히 어디인지 모른다. 그는 예의바르고, 겸손하며, 정의롭고, 친절하며, 가난한 사람을 동정할 줄 아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세입자와의 관계에서는 거북하고, 짜증나는 상황을 회피하고 자기의 하수인에게 떠 넘긴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온갖 지성과 양심을 떠들어댄다.

아이딘의 아내 니할은 오랜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아이딘에게 정신적 고문을 당하고 있다. 아이딘은 결코 겉으로 드러내 놓고 학대를 하지 않지만, 그가 하는 말이 곧 니할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다. 니할이 볼 때 아이딘은 허위의식으로 자신을 감추고, 이기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한다. 오로지 자기만 옳다는 신념으르 갖고 있으며,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다 나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아이딘의 모순된 태도를 비난하는 니할은, 월세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의 집을 찾아가 많은 돈을 주려고 하지만, 그 돈을 받은 남자-감옥에 갔다 온 남자-는 그 돈을 벽난로에 던져버린다.

여기서도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드러난다. 니할이 돈을 가지고 간 것은 안쓰러운 마음에서 그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돈을 받아든 남자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월세를 독촉하고, 가구를 빼앗아 간 아이딘의 대리인들이 저지른 폭력의 대가, 아이딘의 대리인들이 자신의 가족에게 한 모욕의 대가, 그리고 아이가 받은 정신적 충격에 대한 대가, 그리고 니할의 약간의 자비심이 그 돈의 액수라고 해석하고는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돈을 태워버리는 그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면서도, 몹시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는 지금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가족의 안위를 포기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동자의 처지를 당당하게 보여주었다고 옹호하겠지만, 니할이 준 돈은 집을 사고도 남을 큰 돈이었다.

그 돈은 아이딘이 익명의 기금으로 내 놓은 것이고, 니할은 당장 생활이 위태로운 세입자를 생각하고, 그를 돕기 위해 가져 온 것이었다. 남자가 돈을 불태운 것은 니할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그것도 하나의 폭력이었다.

가난한 노동자의 처지지만, 남자는 남성 일반이 가지고 있는 왜곡된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계급을 뛰어 넘어, 남성성이 보여주는 천박하고 한심하고 유치한 이기심의 표현이다. 자본가이자 지성인인 아이딘이나 노동자인 남자나 모두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과 공감이라는 주제를 비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이 문제로 인해 다투고, 화내고, 삐치고, 울고 웃는다. 인간이 얼마나 더 진화를 해야 공감의 문제가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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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 조선인 혁명가 김산의 불꽃 같은 삶
박건웅 지음, 님 웨일즈 외 원작 / 동녘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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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리랑
작가 : 박건웅
출판 : 동녘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재능이 따로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상은 시대에 조응하는 인간이며, 역사에 온몸을 내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김산은 열다섯 살에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떠난다. 지금의 중학생 정도의 어린 소년이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짊어지고 혁명가가 된다.
소년이 일본경찰과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 것은 그의 운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다. 조선공산당이 1921년에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김산의 행동은 자생적 공산주의자 1세대에 해당한다. 김산은 당시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판단하고 있던 것처럼, 중국공산당의 혁명과 함께 해야만 조선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크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갈라졌으며 그 안에서도 여러 분파들이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장투쟁 계열에서도 개별적 테러를 활용했던 민족주의 계열과 군대를 양성해 일본과 전쟁을 하겠다는 전투부대 조직은 목적은 같았으나 행동이 달랐고, 그들도 중국공산당과 쏘련공산당으로 각각 협력 세력이 나뉘었다. 아무리 간단하게 요약해도 당시 독립운동의 갈래는 매우 복잡했으며, 각 파벌의 갈등은 동지가 아닌, 적과 같은 미움과 증오를 띄기도 했다.
여기에 중국으로 숨어든 일본의 조선인 밀정이 독립운동가를 납치, 살해하는 경우도 많았고, 멀쩡하게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일제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확신과 자신의 사상의 굳건함을 잃지 않고, 혁명가로서의 역사적 사명을 잊지 않고 일관된 투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서양에서는 체 게바라를 대표적 혁명가로 손꼽지만, 김산의 삶은 체 게바라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혁명과 독립을 위해 싸웠다. 쿠바 혁명을 비롯한 남미의 혁명이 미제국주의와 자본을 뒤엎는 혁명이었다면, 김산이 살았던 시대의 혁명은 훨씬 복잡한 양상을 띈다. 한국의 일제식민지 상황에서 독립하는 절대 과제와 반제국주의, 반자본주의 혁명까지 이뤄야 하는 공산주의 혁명의 의무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산은 중국 곳곳에서 장제스를 비롯한 중국 군벌들과 싸우며, 크고 작은 도시에서 일시적으로 혁명에 성공해 해방구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시기의 중국공산당은 언제나 열세에 있었으며, 군벌에 쫓기고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은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에서 패퇴하면서 대장정을 시작한다. 대장정을 시작할 때 10만 명이던 사람은 연안에 도착했을 때 90% 가까이 사망하게 된다. 30년대 중반의 중국공산당은 최악의 위기를 맞이하지만, 연안에서 다시 터전을 다진 중국공산당은 마침내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다.
김산은 중국혁명의 성공도, 한국의 독립도 못 본 채 누명을 쓰고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삼십대의 짧은 살았던 한 혁명가의 삶은 님 웨일스의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남았다.
님 웨일스의 기록이 없었다면, 우리는 진짜 혁명가가 누구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남북한의 분단과 체제로 인해 인정받지 못하거나, 왜곡되는 현실이다. 남한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혁명가의 삶을 인정하지 않았고, 북한에서는 민족주의 계열, 남조선노동당, 중국공산당과 협력했던 혁명가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결국 만주와 중국, 쏘련에서 활동했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 대부분이 역사에서 잊혀졌거나 지워진 상태다.
약소국의 혁명가는 시작부터 비극적 운명을 내재하고 있다. 조국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처지에서 큰 나라의 혁명을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은 곤혹스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역사를 만들어가는 이들 혁명가는 현실의 고난을 피하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운명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
신화와 창작에서 영웅은 고향을 떠나 고난의 길을 따라 모험을 하고, 더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현실의 혁명가는 고향을 떠나 낯선 땅을 전전하며 끝모를 고통과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친다. 그리고도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혁명가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억울하게 죽은 혁명가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지 못하다.
님 웨일스의 남편 에드가 스노우는 모택동을 만나 '중국의 붉은 별'을 써서 서양에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알린 인물이고, 님 웨일스 역시 한국공산주의자이자 중국공산당원 장지락(김산)을 인터뷰해 당시 한국공산주의자들과 혁명에 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은 매우 중요한 기록이지만 한국에서는 한때 금서였다. 독재정권은 독립운동가이자 혁명가인 장지락(김산)의 일생이 널리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제는 자유롭게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나 사람들은 과거의 혁명가를 잊어버렸다.
박건웅 작가는 활자에 갇혀 있던 혁명가 김산을 깨웠다. 박건웅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흑백 판화 기법의 그림은 강렬한 내용처럼 강한 이미지로 당대의 이야기를 표현한다. 김산의 삶은 스스로 혁명가로서의 자각과 오랜 훈련으로, 보통 사람이 견딜 수 있는 한계 이상의 고통을 극복하며 살아가지만, 늘 위험 속에서 살아가는 혁명가라도 인간적인 시간을 보낼 때가 있었고, 평범한 행복을 누릴 기회도 있었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이미 결심한 김산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행복조차도 부담스러워한다. 그 누구도 김산의 삶을 강제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스스로 선택한 혁명가의 삶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높은 도덕성과 신념, 의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혁명가 김산의 일대기를 다루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하지만 이름 없이 스러진 수많은 혁명가들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남북한의 분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의 자취까지 분단되는 부작용을 만들었으며, 역사에 기록될 기회조차 갖지 못한 훌륭한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이 많다.
'아리랑'은 정부나 단체의 공식적인 기록이 아닌, 님 웨일스와 장지락이 만나 대화를 하며 기록한 내용이라 공인받지 못한 기록이지만, 개인의 삶을 더욱 생생하게 기록하고, 당대의 세밀한 묘사가 풍부하게 살아 있다는 점에서 높은 사료적 가치가 있다.
님 웨일스의 글을 읽기 부담스럽다면, 박건웅 작가가 그래픽노블로 그린 이 작품을 권한다. 글만 읽을 때보다 훨씬 이해도 잘 되고 재미있다. 이와 함께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의 삶과 중국의 혁명 과정까지 알 수 있어 독립운동사 자료로 꼭 읽어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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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 있는 역사,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증언 평화 발자국 19
김금숙 지음 / 보리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제목 : 풀
작가 : 김금숙
출판 : 보리

김금숙 작가 작품. 그래픽노블이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는 분야가 바로 이렇게 과거의 기록을 남길 때다. 구술사의 경우, 과거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구술자의 말을 글로 기록하게 되는데, 기록의 생생함을 글로만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글은 독자의 상상력을 통해 복원되지만, 독자의 상상은 독자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로 인해 제한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래픽노블처럼 글과 그림이 동시에 독자에게 전달되는 방식은 독자의 상상력을 확대하고, 고증의 완벽성이 관건이긴 하지만 독자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글만 읽을 때의 어려움을 그림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가독성을 높이고, 내용의 이해를 도우며, 책읽기의 즐거움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그래픽노블을 단순히 만화라고만 생각하면 큰 오판이다. 그림은 글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담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으며, 글의 내용이 전달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보다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이 작품은 일본군 성노예로 붙잡혔던 이옥선 할머니를 작가가 직접 인터뷰해서 그리고 쓴 작품이다. 이럴 때, 작가가 여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작가는 같은 여성의 입장에서 동질감을 갖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므로, 똑같은 소재라 해도 남성 작가가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작가는 그림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붓과 먹을 이용한 흑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흑백은 과거의 시간을 그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미지이며, 붓과 먹은 우리의 전통 방식을 사용하고 있어, 우리의 역사를 전통의 방식으로 다루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작가의 그림은 한국화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과거의 시간에 채색을 하는 것은 분명 어울리지 않는다. 잔인한 과거의 흔적을 묘사하는데 흑백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작가는 일본군의 만행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마음을 묘사하는데 더 많은 공을 들인다. 그것은 이 역사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주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가해자 중심으로 놓고 보면 해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간단한 예로, 박정희 정권에서 희생당한 인혁당 사건의 주인공들을 그릴 때도, 박정희 정권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방식과 인혁당 피해자와 가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분명하고 엄연하게 다르다. 역사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는 역사를 누구의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와 직접 관련이 있으므로, 우리는 역사의 시각과 관점을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의 삶을 온전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한, 일본군 성노예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틀릴 수밖에 없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를 일본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시도는 한국의 지식인 사이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다. 이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고, 단지 포주와 창녀의 돈벌이로 왜곡, 격하시키는 발상은 일본이 늘 주장하고 바라는 관점이다.
이옥선 할머니의 경우, 당시 조선의 가난한 민중의 삶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일본의 수탈, 조선의 지배계급의 무능과 부패, 강대국에 침탈당하는 약소국의 비애, 식민지를 확대, 강화하는 제국주의의 발현 등 당시 역사의 총체적 사건과 맞물려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지와 편견, 왜곡된 지식으로 친일파가 되어버린 인간들의 역겨운 인식이 날뛰는 꼴을 볼 수 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으로 오멸 감독의 영화를 그래픽노블로 창작한 '지슬'이 있다. '지슬' 역시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가슴 아픈 제주4.3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작가는 붓과 먹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흑과 백이라는 단순함은 이미지의 강렬함과 함께 주제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심각하고 진지한 내용일수록 컬러보다는 흑백이 어울리는 이유는, 다채로운 색으로 분산되는 독자의 시선을 작가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과 '지슬'도 그렇고, 박건웅 작가의 일련의 작품 - 짐승의 시간, 노근리 이야기 등 -도 흑백으로 창작되었다.
김금숙 작가의 작품 주제인 '일본군 성노예 문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고, 제국주의 일본이 침략했던 나라에서는 공통으로 발생한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이 전쟁범죄는 인권과 가장 깊은 관계가 있고, 특히 여성의 성을 착취한다는 점에서 세계여성운동과도 밀접하다. '풀'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보편성을 인정받는다는 사실은 이 작품이 영국 '가디언'의 2019 최고 그래픽노블, 프랑스 휴머니티 만화상 심사위원특별상,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19 올해 최고의 만화 등으로 선정된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일본은 자신이 저지른 전쟁범죄, 성노예 범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존한 '일본군 위안부'의 증언과 김금숙 작가의 작품을 비롯해 일본군의 성범죄에 대한 증언을 외면하고 왜곡한다. 일본이 아무리 오리발을 내밀어도, 역사는 분명하게 진실을 증언하고 있으며, 세계의 상식은 일본의 범죄를 규탄하고 있다. 김금숙 작가의 이 작품이 일본 제국주의의 폭력으로 깊은 상처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알리고, 전쟁 범죄의 잔혹함을 증명하며, 역사의 진실을 기록하는 의미 있는 작업이라서 더욱 뜻깊다. 한국의 만화가들 가운데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작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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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드몽 보두앵 지음, 임선영 옮김 / 새만화책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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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여행
작가 : 에드몽 보두앵
출판 : 새만화책

'새만화책'에서 펴낸 작품. '새만화책'은 나에게는 '로망'이다. 꿈을 꾸지만 이룰 수 없는, 영원한 신기루와 같다. 나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고, 무엇보다 만화를 그리고 싶지만, 그것은 그저 소망이고, 욕망일 뿐, 현실은 다르다. 만화를 그릴 능력이 없어서 만화를 좀 더 깊이 읽었고, 만화비평을 하게 되었다.
'새만화책'에서 나오는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글과 그림은 결코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문학'의 범주에는 활자만 속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길가메시' 이후 문학은 '문자'로만 형상화되었다. 고대는 물론, 근대까지도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것은 지식인이었고, 지배계급에 속했음을 생각한다면, '문자'를 다루는 행위는 극소수 지식인과 지배계급의 행위였고, 이것은 다수 민중의 삶과 괴리되어 있었다.
문자 이전에 이미지가 소통 수단으로 등장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언어와 문자가 없던 시기에도, 인류는 자연의 모습을 흉내낸 이미지를 그렸고, 자연을 숭배하는 행위, 동물을 사냥하는 행위, 사냥을 잘 하길 기원하는 주술적 행위도 모두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미지는 인류에게 친숙한 대상이자 도구였으며, 문자 이전에는 중요한 소통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초기의 문자는 '표의 문자'가 대부분으로, 문자 하나가 하나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문자들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
그런 이미지가 점차 '표음 문자'의 등장으로 분리되면서, 이미지는 문자와 언어에서 멀어지기 시작했고, 별개의 영역-예술-으로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미지가 문자로 바뀌는 과정은 인류의 지성이 발달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고, 문자의 확대는 지식의 보편을 이뤘다.
문학이 수천 년을 이어오면서 문자로 기록을 남기고, 대중의 삶에 깊숙히 스며들었다면, 만화는 19세기에 들어와서야 겨우 창작되기 시작했다. 인류에게 이미지는 문자보다 더 익숙한 매체였고, 실제 다양한 이미지가 창작되었으나 만화의 형식이 탄생하기까지 물적 토대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석기시대의 동굴벽화부터 인류가 그려 온 무수한 그림은 대개 단일한 이미지였으며, 만화처럼 칸과 프레임을 쓰면서 그림이 연결되고, 이야기가 있는 방식의 이미지는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이라는 측면에서 각각의 이미지와 문자로 창작된 방식과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였다.
만화는 기존의 이미지가 표현하지 않거나, 못했던 방식으로 대상과 상황을 표현했다. 고전적 의미의 이미지는 어떤 한 순간을 고정시키지만, 만화는 이미지의 한 순간을 고정시키는 방식은 같아도, 그것을 과장, 축소, 왜곡, 변형시키면서 연속으로 보여준다는 특징이 있다.
만화는 다시 카툰, 코믹스, 그래픽노블 같은 여러 장르로 나뉘는데, 그래픽노블은 카툰, 코믹스보다 가장 늦게 나타난 장르다. 그래픽노블과 코믹스는 형식에서 차이가 없지만, 그래픽노블이 작가의 의도와 의지를 더 강하게 내포하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작가주의 만화'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에서 '예술영화'나 '작가주의 영화'로 불리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이 책 '여행'은 프랑스의 작가 에드몽 보두앵의 작품인데, 무엇보다 붓으로 그린 그림이 훌륭하다. 매너리즘에 빠진 주인공 시몬이 가족과 도시를 떠나 시골마을에 가서 겪는 새로운 경험과 시간의 흐름, 시몬의 의식의 변화를 몽환적인 기법과 함께 그린 만화인데, 붓으로만 그린 선이 마치 동양의 그림을 보는 듯 하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여행'이 실제 시간과 공간을 이동하는 여행이기도 하지만, '메타포로써의 여행'이라고도 했다. 즉, 작가의 상상이라는 말인데, 작품에서도 사실묘사보다는 환상, 환각의 장면이 처음부터 나온다. 작품의 시작부터 45쪽, 올리비에를 만날 때까지 주인공은 말도 거의 하지 않고, 이미지는 지극히 환상적이며, 비현실적인 풍경과 주인공이 환상에 시달리는 장면으로만 그려진다.
이때 이미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래픽노블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기도 한데, 지문 없거나 극히 최소한만 사용하면서, 이미지로 인물의 심리와 이야기를 전개해 가는 것은 문학(노블)과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 작품에서 '노블'은 '그래픽'만큼 중요하지 않아보인다.
주인공 시몬은 가족과 이야기를 하면서 머리 형상이 바뀐다. 처음에는 고양이가 머리 위에 올라간 것으로 보이지만, 이내 머리에 철창이 생기는 것을 알 수 있다. 독자는 시몬의 머리에 쓰인 철창을 볼 수 있지만, 만화 속 인물들은 그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것은 2차원 이미지로 드러낼 수 있는 한계이자, 독자와 만화의 인물을 구분하는 상징적 장치다.
시몬은 집을 나와 회사로 출근한다. 그가 거리를 걸을 때, 도로의 이미지는 시몬의 머리와 연결된다. 건물, 비둘기, 하늘, 나무, 지하도의 천정, 지하철의 천정 등 그의 머리는 마치 열려서 기이하게 변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다 전철 안에서 그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며 그들이 모두 죽은 사람으로 보이는 환각을 겪는다. 그의 머리에서 해골이 쏟아져나오고, 사람들의 머리가 해골로 바뀐다. 시몬은 지하철을 뛰쳐나와 회사로 들어가지만, 이내 뛰쳐나온다. 그는 거리를 걷다 센느강으로 나와 우연히 어떤 여성을 만나 고양이가 죽었냐고 묻는다. 그러자 여자는 고양이가 없다고 말하고, 오늘 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다고 말한다. 남편, 딸, 개, 일, 모두. 그러면서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시몬은 이 여자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냐고 묻는데, 여자는 '사랑이 뭐'냐고 되묻는다. 
시몬은 아내와 아들이 있는데, 왜 뜬금없이 처음 만난 여자에게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냐고 묻는 걸까. 여자와 헤어지고, 시몬은 다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직원인 프랑수아즈에게 '나랑 사랑을 나누고 싶지 않'느냐고 다시 묻는다. 이것은 작품의 뒷부분에서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는 걸로 보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시몬의 충동은 작가의 상상에 불과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요소이거나, 시몬의 피폐한 정서가 자신을 방기해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비도덕적, 비윤리적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해석인데, 이건 오로지 독자의 판단에 맡기고 있다.
시몬은 홈리스 노인을 만나 그에게 돈을 준다. 노인은 여행 떠나기 좋은 날이라며 자신은 술을 마시는 것이 곧 여행이라고 말한다. 시몬은 거리를 방황하다 열차를 타고 낯선 곳에 내린다. 히치하이킹을 하다 만난 올리비에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가게 되고, 이때부터 시몬과 올리비에는 '정상적'인 대화를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뛰쳐나왔다. 올리비에도 우여곡절을 겪고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인형극을 하고 다닌다. 시몬도 올리비에를 도와 인형극 조수로 일하며 며칠을 보내다 올리비에의 친구인 마르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마르크의 여동생 레아를 만나고 첫눈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이제 이야기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내용으로 이어진다. 처음 시몬이 환상과 환각을 보면서 시작했던 이야기는 도시를 떠나 낯선 시골로 장소와 환경이 바뀌면서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것은 시몬이 놓인 환경-가족, 직장, 도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마르크는 시몬에게 자신의 요트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고 제안하고, 시몬은 동의한다. 두 사람은 바다를 항해하고, 마르크가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하려는 걸 시몬이 저지한다. 마르크는 애인 이자벨이 폭풍우에 휩쓸려 죽은 장소에서 죽고 싶었노라고 말한다. 마르크는 살았지만 곧 날씨가 거칠어지면서 배가 침몰하고, 시몬이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상황에서 마르크가 다시 시몬을 살린다. 이런 극적 장치는 작위적으로 느껴져 진정성이 떨어지는데, 작가는 시몬이 죽을 고비를 넘겨 새로운 삶을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작위적인 설정을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시몬은 마르크와 헤어져 선술집에 갔다가 시비가 붙고, 거리에서 습격 당해 얻어맞는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을 떠올리고, 곧 집으로 돌아갈 거라고 혼잣말을 한다. 이제 시몬의 공황은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시몬은 우연히 홈리스 노인을 만나는데, 그 노인은 파리에서 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자신이 평생 한번도 이 마을(라로셀)을 벗어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라로셀은 파리에서 남서쪽으로 400km 떨어진 항구 마을로 인구는 약 8만 명 정도의 작은 도시다.
빈털털이 시몬에게 노인은 적선을 베풀고, 한 노인을 소개한다. 시몬은 소개받은 노인의 집을 찾아가 임시 거처를 마련한다. 노인은 방을 빌려주는 조건으로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말한다. 노인은 요정의 친구로 평생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사랑을 멈추자 갑자기 늙었다고 했다. 시몬은 다시 레아를 만나고, 두 사람은 노인이 빌려준 방에서 섹스를 한다.
레아는 시몬에게 산에 오르자고 제안하고, 두 사람은 산을 올라 다시 섹스를 하고, 레아가 먼저 산을 내려간다. 레아는 시몬에게 산에 조금 더 오래 남아 있기를 권하는데, 혼자 산에 남은 시몬은 아주 멀고 먼 과거, 지구가 생기고, 공룡이 뛰어다니고, 원시인류가 사냥을 하고, 시간이 거슬로 오면서 중세, 근대, 현대의 역사 속을 경험한다. 시몬의 환상은 그가 자신의 삶을 객관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를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역사 속에 투영, 투사하는 것은 자기를 성찰하는 자세이며,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은 결코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시몬은 산을 내려오다 미끄러져 죽을 고비를 넘기는데, 이것도 작위적인 느낌이다. 이미 바다에서 빠져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다시 산에서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위험을 그려 넣은 것은 작가의 치기가 보이는 장면이다. 산을 내려온 시몬은 올리비에를 만나고, 그와 고성에서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낯선' 집으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구조는 좋지만, 주인공 시몬이 겪는 상황은 해석의 여지가 많다. 그가 회사와 집을 단조롭게 오가는 것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지만, 가족과의 단절과 회사에서의 매너리즘이 모두 '외부'에서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이기적이다.
결국 회사에서 무작정 뛰쳐나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목적지도 없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데, 이동 인형극장 일을 하는 올리비에를 만나 그의 집까지 가고, 그곳에서 처음 만나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고, 이러저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누군들 이런 여행을 꿈꾸지 않을까. 시몬만이 특별한 사람도 아닐테고, 그의 가족들도 온통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을텐데, 마치 자신만이 유독 특별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과도한 설정이 조금 불편하다. 
여기서는 주인공 시몬 한 사람의 시각과 입장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그의 가족 아내와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시몬의 아내와 아들은 갑자기 사라진 남편과 아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또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입장도 뒷부분에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독자는 시몬의 상황은 이제 충분히 보고 이해했으니, 눈에 보이지 않는 시몬의 아내와 아들 피에르에 관한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 아버지의 존재는 자신에게 무엇일까를 깊이 고민하게 되고,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고, 아버지의 부재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모자의 삶은, 정작 사라지길 원했던 시몬보다 더 절실하고 안타까운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시몬이 가족을 떠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다시 돌아오려고 할 때, 그는 집과 가족을 '낯선 집'이라고 말한다. 시몬에게 가족은 이미 피붙이의 애틋함이 사라진, '관계'로서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것은 관습적이고 당연한 클리셰이다. 너무 익숙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 '가족'을 낯설게 느낀다는 건, 자기 존재와 가족을 분리하고, 객관화하며,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을 뜻한다.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고, 또한 몽환적이었던 것처럼, 주인공 시몬이 실제로 여행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시몬의 상상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몬이 겪었던 모든 시간과 공간이 오로지 '상상'이었더라도 시몬은 가족과 일정한 거리가 벌어진 것을 느끼고 있었고, 그것은 시몬 뿐 아니라 아내와 아이도 그렇게 느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작품은 훌륭한 그림과 함께 작가의 상상력과 표현 기법의 독특함으로 좋은 작품임에 틀림없다. 펜이 아닌, 붓으로 그린 그림은 부드럽고, 선은 거친 듯 하면서 미려하다. 한 페이지에 여섯 칸을 기본으로 하고, 다양한 변형을 주었는데, 선의 굵기로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고, 여백과 생략을 과감하게 하면서, 드러내야 할 부분만 충실하게 묘사한 것이 이 작품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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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
마영신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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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욕망하는 여자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분명 누군가의 ‘엄마들’이지만, ‘엄마’는 이들의 정체성이 아니다. 이들의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자신의 삶을 살고 있거나, 남편과 이혼(또는 사별)해서 따로 살고 있는 여성들이다. ‘엄마’와 ‘어머니’는 같은 기혼 여성 가운데 자식을 둔 여성을 지칭하지만, 의미는 다르다. 마영신 작가는 왜 ‘어머니’여야 할 자신의 어머니와 어머니의 친구들을 ‘엄마들’이라고 했을까. 작가는 남성이고, 자신이 바라보는 ‘엄마’는 ‘어머니’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엄마들’은 작가가 ‘아들’이자 ‘남성’의 시각을 투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엄마’는 남성(아들)의 시각에서, 늘 자기를 보살피고, 다정하고, 욕구-먹고, 입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뒷바라지 하는 모든 것-를 해소해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 있다. ‘어머니’는 보다 형식적이면서 존재가 분명한 이성(理性)적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식이 나이 들어도 여전히 ‘엄마’로 부르려는 것은 단순한 친밀감의 표현이 아니라(그렇다 해도), 그들이 어렸을 때 받았던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다.
하지만 ‘엄마’도 인간이고, 여성이다. 엄마도 나이 들면서 변하고, 달라진다. ‘엄마’는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면서 이타적으로 행동한 존재이며, 사회는 ‘엄마’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퍼뜨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한다. 이것은 분명한 사회적 억압이다. ‘엄마’의 역할을 고정하려는 사회적 의도와 압력은 곧 여성 일반의 사회적 역할을 고정하고 억압하려는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의 연장선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영신 작가는 ‘엄마들’이라는 감성적 제목과는 완전히 다른 ‘엄마’이자 욕망하는 여자의 모습을 그린다. 이 작품은 표지부터 남다르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의도를 드러내는 가장 분명하고 좋은 방법은 표지그림인데,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한국적'인 표지그림은 이 작품이 아마도 최초가 아닐까. 표지그림은 그 자체로 역설이다. '엄마들'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에게 보편으로 인식된 '엄마'라는 따뜻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이미지의 추상이지만, 그 아래 두 중년 여성이 서로 머리칼을 움켜쥐고 악을 쓰는 모습은 '엄마'라는 기존의 아름다운 추상적 이미지를 산산이 깨뜨리는 역할을 한다. 바탕의 빨강색은 중년들이 좋아하는 색깔로 알려졌는데, 빨강의 강렬한 색감과 흑백의 인물이 강조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풀어놓을 거라는 기대를 일으킨다.
주인공은 이소연이다. 중년의 여성이고, 아직 독립하지 않은 성인 아들과 함께 사는데, 자기 이름으로 남은 유일한 재산은 연립주택 가운데 한 채다. 소연은 스무 살에 중매로 남편을 만났고, 아이를 셋이나 낳아 길렀지만, 남편이 도박에 빠져 집안을 망치고 빚만 늘어나자 소연은 빚을 갚기 위해 평생 가난과 노동에 허덕였다. 그러다 결국 이혼을 하고 지금은 건물 청소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집안을 망치고, 가족을 괴롭힌 것은 남성(남편)인데, 그 문제를 해결하려 고생하는 것은 여성(아내)이 되는 구조는 ‘사회적 스톡홀름 신드롬’에 해당한다. 가부장사회, 남성 우월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태다. 여성은 늘 자신이 억압당하는 상태에 있음을 느끼고, 성폭행, 성추행, 폭행, 차별, 억압 같은 공포를 겪지 않기 위해 자발적으로 남성(사회)의 요구에 동의, 동조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연 역시 사랑하지도 않는 남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평생을 힘겨운 노동으로 보냈다. 이런 여성의 행동을 가부장 사회에서는 ‘현모양처’라는 이데올로기로 포장한다. 이런 장치를 통해 여성의 욕망은 소거되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다.
소연에게는 애인 종석이 있는데 술집 웨이터로 일하는 남자다. 종석의 아내는 다단계에 빠져 빚이 많은 데다 종석의 동창하고 불륜 관계여서 사실상 이혼한 상태로 생각하고 있다. 소연은 애인인 종석이 3년 전부터 꽃집 여자를 만난다는 말을 듣고는 종석에게 욕을 하며 헤어지지만, 이들의 삼각관계는 이어진다. 꽃집 여자 명희는 소연에게 종석과 헤어지라고 말하고, 소연은 '내 남자와 연락하지 말라'고 카톡을 하다 새벽에 길거리에서 만나 육탄전을 벌인다.
작품 속 엄마들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여성이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녀들의 모습은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은 사회적 약자, 가부장제, 남성 우월주의 체제 속에서 억눌린 채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아야 했던 피억압자의 모습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엄마들은 대개 부자도 아니지만, 많이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어서 자기들의 삶이 왜, 어떻게 망가져 왔는지 깊이 성찰할 능력은 없다. 남자(남편을 포함한 애인까지)들이 저지른 일을 뒤치다꺼리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망가지면서도 자신보다 남자, 자식을 먼저 생각하며 살았던 여성이 바로 '엄마'다.
하지만 '엄마'도 나이 들면서 자기 욕망을 감추거나 숨기지 않고 살아가려 한다. 오랜 시간 너무나 많이 참았고, 남자(남편과 애인)와 아이들에게 시달렸고, 자신의 행복을 유예했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춤을 배우고, 나이트클럽과 콜라텍에서 낯선 남자들과 춤을 추고, 애인을 사귀고, 삼각관계에서 질투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엄마들'의 다른 모습은 '여성 노동자'다. 그것도 비정규직의 불안한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한다. 소연은 빌딩 청소를 하는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그곳에는 소연과 비슷한 나이와 처지에 있는 여성들이 함께 일하고 있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용역업체의 비정규 노동자들이다.
여성 노동자로 빌딩 청소를 하는 ‘엄마’는 그들이 집에서 살림하며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던 바로 그 모습을 빌딩 청소라는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다. 즉, 여성 노동자로서, 엄마로서 가정과 사회에서 그들의 처지는 늘 낮은 곳, 가장 열악한 곳, 가장 힘들고, 대우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조적으로 억압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 노동자이자 ‘엄마들’은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욕망을 발산하고, 사회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해 달라고 소장을 찾아가 이야기를 한 옥자 언니는 성추행을 당하고 해고된다. 옥자 언니는 여성가족부도 찾아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여성도 찾아가지만, 실질적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이 노조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용역업체 소장-남성-은 반장을 시켜 어용노조를 만들도록 하고, 16명 가운데 12명이 어용노조에 가입하고, 4명이 된 소연과 동료들은 따돌림을 당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여성)들이 어용노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자기들만 고용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을 보면서 소연과 동료들은 배신감을 갖지만, 12명의 여성이 왜 권력의 그늘로 순순히 들어갔는가에 대한 문제의식은 드러나지 않는다. 동료와의 연대까지 외면하면서 더 중요한 건 ‘일자리’고 ‘임금’이기 때문이다. 빈곤은 동료 노동자와의 연대와 협력을 방해한다. 일자리를 잃게 되면 곧바로 들이닥치는 생존 문제는 이들이 노동착취와 차별에 저항하지 못하는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한다.
소연은 라디오 방송에 나가 일하는 회사에서 부당 노동행위가 벌어지고 있다고 고발한다. 라디오 방송의 파급 효과가 있어 소장은 소연을 비롯해 모두 해고될 거라고 협박하지만 결과는 용역업체와 소장이 바뀌고 일하던 사람들은 모두 그대로 남았는데, 소연과 연정 언니는 해고된다. 소연은 옥자 언니와 다른 업체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 예전 업체에서 반장을 했던 사람이 들어온다. 떡값을 빼돌리다 들통나서 해고되자 우연히 소연이 일하는 곳으로 취업한 것이다.
소연은 삼각관계였던 명희와 친구가 되고, 연순은 만남 어플로 연하의 남자를 만나고, 명옥이는 기자 애인과 계속 만나고, 연정은 마트에서 일을 시작하고, 경아의 남편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모두 여전히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사회를 개혁할 여력도, 능력도 없지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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