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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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친코

재미교포 이민진 작가의 장편소설. '애플TV'에서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겠다고 2018년에 발표했고, 지금 촬영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이 소설이 미국에서 발표된 이후, 지금까지 30개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었고,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소설이 미국의 주류 문학계에서 주목받는 현상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은 미국에서 소수민족이며, 그리 주목받지 못한 대상으로 100년을 살았다. 한국인의 미국 이민과 일본 거주는 20세기 초반의 비극적 역사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의 기원이 있다. 1910년, 일본의 강제병합 이후 조선인의 삶은 고통과 울분, 비통의 연속이었다. 
비참한 삶에서 벗어나려던 조선인들은 가까운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하와이, 쿠바, 멕시코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 이렇게 떠난 조선인은 인종차별과 하층 노동자로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한국인에게 근현대사의 시작은 비극이었다. 동학혁명이 일본군의 폭력에 무너지면서 민중의 삶은 짓밟히기 시작했고, 그것은 조선왕조에서의 삶과는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이었다. 이 소설에서는 당시 조선의 근현대사 배경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부산의 영도 바닷가에 살던 이름 없는 가난한 어부 부부에게 온전치 못한 몸을 지닌 아들 '훈'이 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는 더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 양진이 부부로 맺어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훈'이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지만 몸은 튼튼했고, 듬직하고 다정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너무 가난해서 입 하나를 덜기 위해 시집 온 양진은 시부모와 함께 힘든 시간을 지내지만, 그럼에도 행복한 삶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선자가 태어나고, 선자는 튼튼하고 야무진 여성으로 성장한다.

이 작품은 4세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각 세대는 드라마틱하게 다른 삶을 살지만 등장인물들이 일본에 정착하면서 살게 된 삶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재일조선인', 일본사회에서의 소수자로 당하는 차별, 멸시의 구조다. 주인공들이 일본에서 자기의 꿈을 펼치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과 조선인을 차별하는 사회적 공모가 강하게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의 구성은 하나의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가난한 조국 조선을 자발적이든, 강제로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디아스포라적 삶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들은 '실존적'이든 '이념적'이든 '경계인의 삶'으로 존재하고 있다. 역사 속의 집단이자 개인으로 디아스포라이면서 경계적 존재로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과 재일조선인이 공통점을 갖는다. 유럽에는 '집시'도 있으나 그들은 단일한 민족 정체성을 갖지 못한 집단 유랑민이라는 점에서 유대인과는 또 다르다.

작품 제목인 '파친코'는 '재일조선인'을 상징하는 단어다. 이는 마치 유대인을 상징하는 단어로 '고리대금업자'를 떠올리는 것과 같다. 두 경우 모두 그 집단이 자발적으로 선택한 직업이 아니며, 사회에서 천대와 멸시를 받는 존재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작품의 제목인 '파친코'와 작품의 등장인물에서 여성의 삶은 서로 만나는 지점이 없다. 즉, 이 작품은 여성의 서사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제목은 '재일조선인' 가운데서도 남성이 운영하는 '파친코'로 되어 있어 제목과 내용 사이에 괴리가 생긴다. 이것을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상징성에 무게를 두었다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여성 서사를 다루고 있다. 작가가 여성이어서 여성의 삶에 보다 공감과 깊이를 더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 약자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의 삶을 구원하는 구원자적 존재로 등장한다. 여성은 늘 남성의 그늘, 발 아래, 뒤치닥꺼리, 조력자, 보조자 등으로 존재하지만, 길게 보면 남성을 품고, 기르고, 키우고, 성장시키는 구원자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에서도 양진은 가난한 집 막내딸로 굶주리는 삶을 살다, 나이가 많고, 몸도 성치 않은 어부의 아들 '김훈'의 아내가 된다. 다행히 김훈은 장애가 있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양진은 가난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딸인 선자는 아버지가 병으로 죽자 엄마와 두 사람의 일하는 여성과 함께 하숙을 치면서 성장한다.
선자가 고한수를 만나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평양에서 온 백이삭 목사의 도움으로 결혼식을 하고 정식으로 백이삭의 아내가 되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면서, '재일조선인' 1세대의 삶이 시작된다. 백이삭의 형 백요셉은 이미 그의 아내 이경희와 함께 일본에서 정착했고, 이경희는 선자를 동생처럼 여기며 끈끈한 연대와 우정을 쌓아간다. 
고한수는 조선인이지만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 세 딸을 두었고, 그의 장인은 야쿠자 두목이었던 것이 나중에 드러난다. 고한수 역시 장인의 야쿠자 조직에서 일하고 있었으며, 그는 평생 야쿠자로 살면서 돈과 권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선자의 남편 백이삭은 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신사참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2년의 옥살이 끝에 결국 숨을 거둔다. 백요셉 역시 미군의 폭격에 화상을 입고 고생하다 죽는데, 남성들이 이렇게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도 '재일조선인'의 비극이라는 것을 작가는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남성(남편)의 부재로 곤란한 생계를 꾸리는 건 여성들이다. 경희와 선자는 김치 파는 행상을 시작으로 집안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한다. 김치는 맛있다는 소문이 나고, 김창호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이들의 김치를 전부 구입하겠다며 두 사람을 식당 주방에서 직접 김치를 담그게 한다. 시간이 지나서 김창호의 뒤에 고한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만, 설령 일찍 알았다 해도 경희와 선자는 그 주문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희와 선자에게는 아들 노아와 모자수가 있었다. 두 아이를 건강하고 떳떳하게 키우는 것이 삶의 전부이자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두 사람은, 아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고통도, 굴욕도 참을 수 있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의 부재로 성장하는 두 아들 노아와 모자수는 평생 힘겹게 일하는 엄마와 큰엄마를 보면서 엇나갈 수 없었다. 아버지의 부재는 곧 조국의 부재이기도 하다. 나라를 잃은 민족,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디아스포라의 존재인 이들 '재일조선인'은 끊임 없이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아버지' 고한수는 노아에게 고통의 근원이다. 이미 아내와 딸이 있는 그는 어린 선자를 좋아하고, 임신시켜 선자의 인생을 망친다. 그렇게 태어난 노아는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불행이며,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 백이삭이 죽은 이후, 존재할 수 없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리고 그 아버지가 사회에서 가장 비난받는 야쿠자라는 이유로, 자기의 삶을 방기한다.
이삭의 비극은 '재일조선인'이기 때문에 발생한 필연적 결과일까, 아니면 야쿠자를 부모로 둔 자식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절망과 자포자기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걸까. 이삭의 자살은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뿌리내리는 것이 얼마나 절망적인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노아는 자신의 실존적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데, 그의 삶도 모순적이긴 마찬가지다. 그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파친코 가게에 취업해 많은 돈을 벌면서 '아버지' 고한수가 보내준 학비를 다 갚고, 어머니에게도 많은 돈을 보낸 이후에도 그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여럿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중산층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위치가 노출되었다고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는 애초에 결혼할 마음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이삭은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건 분명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는 딜레마, 극단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해도, 이삭의 결정을 존중할 수는 있지 않을까.

모자수는 우연하게 파친코 업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이 역시 그의 존재가 '재일조선인'이라는 점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일본 사회에서 주류에 속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아무리 노력해도 일본의 주류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사회에서 강하게 밀려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그럴 때 선택할 수 있는 일은 위험하거나 더럽거나 불법한 일일 수밖에 없다.
모자수를 파친코로 끌어들인 사람 역시 재일조선인 고로 씨였다. 성실하고 머리가 뛰어난 모자수는 빠르게 일을 배우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빠르게 성장한다. 그는 고로 씨의 도움으로 파친코를 직접 경영할 뿐 아니라 가게도 늘리면서 막대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모자수의 아내 유미는 모자수의 단골 양복점에서 일하던 미싱공이었으나 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이민가는 걸 꿈꾸던 여성이었다. 모자수와 결혼해 아들 솔로몬을 낳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데, 이런 크고작은 비극이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끊임없이 일어난다.
솔로몬은 부자 아버지인 모자수 덕으로 어려서부터 국제유치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고,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하지만 미국에서 공부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해 일본으로 돌아왔지만, 일본인 상사에게 이용당하고 해고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으면서, 솔로몬은 아버지가 하는 파친코 업계에서 일을 하겠다고 자청한다.

'재일조선인' 4세대인 솔로몬이라면 자기가 원하는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버지가 파친코로 돈을 벌어 아무런 불편 없이 살아갈 수 있고, 원한다면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솔로몬의 위치였다.
하지만 솔로몬은 일본에 눌러 앉는다. 솔로몬은 할머니와 엄마, 아버지의 삶을 가까이서 지켜봤고, 자신 역시 '재일조선인'으로 3년 마다 지문을 등록해야 하는 차별을 당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경제적으로 성공한 '재일조선인'이라 해도, 일본 사회에서 늘 변두리, 울타리 너머에 존재하는 이방인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외국에서 공부하고, 부모 세대와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아온 솔로몬 같은 청년 세대가 '재일조선인'으로 일본 사회에 뿌리를 내리겠다는 결심은, 차별과 멸시의 땅, 고통과 비난이 발목을 잡는 일본 사회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불행한 역사를 만든 일본이 상상하지 못한 존재였지만, 일본 내부의 모순을 뚫고 성장하는 기형적 존재이면서, 한편으로 일본인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거울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재일조선인'은 일본의 과거 침략과 범죄 역사의 살아 있는 증거이자 증인이며, 조선인의 의지와 투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존재 그 자체다.
'재일조선인'의 존재는 일본의 내부적 모순을 드러내는 한편, 모순을 첨단, 극대화하는 존재로 작동한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부정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져 있으며, 이들의 존재만으로도 일본의 과거 전쟁범죄는 사라지지 않고 유효하며, '재일조선인'을 차별하는 구조를 유지하는 것으로 일본인의 저열함, 야비함, 악랄함을 증명하기 때문에, '재일조선인'은 일본 양심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작동하고 있다.

작품에서 '재일조선인' 인물들 가운데 기독교와 관련한 내용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다. 작품에서 백이삭과 선자가 만나는 대목은 어색하지 않다. 백이삭은 평양의 부잣집 둘째 아들로, 목사가 되어 일본에 있는 교회로 목회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 일본에는 이미 그의 형 백요셉이 아내와 함께 정착했고, 이삭을 불러들인 것이다. 
백요셉이 일본으로 가는 과정에서 선자의 부모가 하는 하숙집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었고, 요셉은 그 하숙집을 소개한 것이다. 그렇게 이삭과 선자가 만나는데, 선자는 이미 임신을 했고, 아버지인 고한수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선자는 고한수와 결별한다. 선자는 이삭의 헌신에 감동하고, 진심으로 이삭을 사랑하지만, 이삭은 일본 경찰에 잡혀 고문당하고 일찍 사망한다.
이삭의 아들은 노아, 모자수이고, 모자수의 아들은 솔로몬이다. 일본은 기독교가 극히 미미한 존재인데, '재일조선인'으로 조선사람의 흔한 이름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이름을 차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백이삭과 백요셉이 평양에서 온 기독교인이라는 점은, 미국과 깊은 관련이 있다. 
평양은 미국 개신교 선교회가 가장 먼저 자리 잡은 곳으로, 당시 조선에서 기독교가 처음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하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조선사람을 교육시켰다. 교육과 목회는 서로 떨어지지 않았고, 공부를 잘 하는 조선인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도록 돕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의 근대화에 미국 개신교는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으며, 재미교포 작가인 이민진 작가는 작품 취재를 통해 '재일조선인'으로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이 시기 평양의 개신교도를 취재했거나 자료를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읽으면서 독특한 문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작가가 재미교포로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가서 성장한 사람이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기 때문에, 한글 문장과는 사뭇 다른 영어 문장으로 작품을 썼고, 그것을 다시 한글로 번역하면서 한국소설을 읽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내용은 분명 '재일조선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한국인의 삶을 다루고 있지만, 문장은 한국소설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구조로 짜여 있다. 그런 점에서 작가의 의식구조는 이미 '미국인'으로 확고히 정립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그가 모국인 한국과 한국의 역사, 한국인의 고난에 관해 깊은 관심을 갖고 바라보고 있다는 건 퍽 높게 평가하면서, 이민진 작가의 영어 소설이 한국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세계 문학의 보편성을 획득하기에 필요한 문장구조가 서양(미국)식으로 짜여지고 있는 것은 흥미를 갖고 지켜봐야 할 대목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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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 나는 반대한다
벳시 웨스트 외 감독,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출연 / 인조인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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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작년에 돌아가신 미국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과 흐믓한 기분이 들었다. 루스의 삶을 보면서, 역사에는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인물이 나타나 역사의 진보를 이뤄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즉, '루스'는 특정한 개인이면서 역사발전의 단계에서 나타나는 필연적 인물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 '루스'이면서 동시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여성'이자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멋진 드라마다.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는 초기 공동체 - 모계사회 - 를 제외하고 줄곧 남성이 주류였던 사회였다. 즉, 같은 인간이면서도 단지 '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남성은 여성은 착취하고 억압하고 학대했다. 남성이 권력을 갖게 된 시기를 마르크스는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면서부터라고 했다. 이건 인류가 채집경제를 벗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부터를 말하며, 농경, 정착, 집단화의 과정을 거치며 인류는 문명을 이루기 시작했다.
잉여생산물의 발생은 노동생산성이 증가한 결과이며, 이는 공동체 시기에 모든 구성원이 채집 활동을 했던 것과 달리, 집단의 우두머리는 더 이상 노동하지 않고, 다른 구성원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의 일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잉여생산물을 취득한 집단의 우두머리는 지혜롭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었고, 그는 신과 대화하는 무당이기도 했다. 그 우두머리가 꼭 남성은 아니었다.
잉여생산물의 집적, 농업에서 남성노동력의 우월성, 여성의 생리, 임신, 출산으로 인한 노동력 상실 기간, 여성의 생리와 임신, 출산이 갖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신비로움과 두려움, 공동체에서 존재했던 다부모, 다자식 형태에서 일부일처 또는 일부다처제로 나아가는 원인 역시 남성이 잉여생산물을 독차지하고, 여성을 사회적 존재에서 대상화, 소외시키면서 경제적,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핏줄에 대한 집착으로 발생한 사회적 계약이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건 모든 인종, 모든 지역, 모든 사회에서 공통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잉여생산물을 독점하려는 남성 집단의 담합과 여성을 소유하려는 남성 집단의 연대가 암묵적 또는 공공연하게 진행되었고, 그 결과 '가부장제'가 굳건하게 뿌리내린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남성이 권력을 차지하는 방식은, 초기부터 현재까지 일정한 패턴을 갖는다. 잉여생산물이 발생하던 초기에 남성(집단)은 물리적 폭력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동시에 금기(터부)를 만든다. 여성의 생리를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고, 집단에서 배재하는 방식으로 시작한 금기는 점차 다양하고 세분화하면서 여성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 존재'로 규정해 나간다.
집단(사회)의 규정은 남성 중심, 남성 위주로 재편되고, 여성에게 불이익을 강요하며, 모든 기득권, 권력의 독점, 경제적 이익을 남성이 차지하도록 구조를 만들어 가고, 공고히 한다. 이런 지배 규칙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사회제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즉, 모든 사회경제 제도,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에서 주류는 남성이었고, 그들의 사회는 가부장제를 핵심으로 한다.

'여성과 계급'의 문제는 어느 시대든 가장 급진적이며 본질의 문제였다. 둘 사이에 어느 한쪽이 더 중요하고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인지 여부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성 문제는 늘 계급 문제에 가리거나 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계급 해방은 극소수 착취 계급을 무너뜨리며 착취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지만, 여성 해방은 인류 보편의 평등이라는 점에서 본질적이며 여성 해방은 자연스럽게 계급 구조도 해체할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경제적 착취 구조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형태를 달리하며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 등으로 옮겨갔지만, 여성의 차별, 착취는 계급 발생과 함께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제되는 사회는 멸망했으며, 자본주의 체제 역시 성차별, 성불평등이 강화된 사회구조여서 계급 갈등과 함께 체제의 모순을 드러내는 두 개의 핵심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도 오래 유지되지 못할 것은 분명하다.

'페미니즘'이 공산주의 이론에서 나타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공산주의 이론은 계급해방과 인간해방을 동시에 주장하며, 이때 인간해방은 양성평등을 기본 전제한다. 또한 성소수자,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사회적 약자의 해방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즉, 공산주의는 계급의 철폐와 함께 인간 평등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체제다. 지금까지 몇 나라에서 실험한 공산주의는 실패했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지만, 인류의 미래가 지금과 같은 소수 착취자가 부와 권력을 독점하는 사회를 폐기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다. 그것이 꼭 '공산주의'가 아닐 수도 있지만, 소수에 의한 다수의 착취, 남성에 의한 여성의 착취 같은 착취 구조는 점차 평등을 향해 나가고 있음을 역사의 발전 과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의 위치를 확장하려는 노력을 할 때마다 가부장 사회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런 시도를 방해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남성과 여성을 적대적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어리석은 남성 대중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이 여성에 의해 침범당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살아온 남성들에게는 남성우월주의가 마치 물속에서 물고기가 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느껴지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있는 것처럼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자신의 숨 쉴 권리를 찾으려 하는 당연한 행동을 남성 일반은 자신(남성)을 공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체제에 안주한 기득권자인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지금의 사회구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은 단지 '성'이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사회의 기득권에 소속되며, 특혜를 누린다. 반면 여성은 똑같은 능력을 가졌거나 더 나은 능력이 있어도 남성보다 적은 보상,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여성은 본질적으로 진보적이며, 사회 변화의 주체다. 그럼에도 여성은 여성만으로 세계를 변혁하지 못한다. 계급 투쟁이 여성운동보다 근본적이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 나는 물론 둘 다 근본적이라고 본다 - 보편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여성운동은 계급투쟁과 동행하거나 포용해야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계급투쟁에서 여성운동은 별개의 과제가 아니라, 동시적이며 본질적인 과제인 것이다.
페미니즘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백인 부르주아 여성'이 주도하는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그보다 앞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루기 위한 노동계급 투쟁에서 페미니즘은 여성해방과 노동계급해방을 동시적 과제로 선정했다. 노동계급은 8시간 노동, 주5일 노동, 생리휴가, 동일노동 동일임금, 기업에서 성차별 철폐, 가사노동의 사회적 보상 등 양성평등을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그 결과 지금은 적어도 공식적으로 성차별 금지, 여성노동의 착취 금지, 여성의 사회적 노동의 인정 등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이것도 현대 자본주의 초기부터 노동계급이 피흘리며 싸워온 결과였다.

루스 긴즈버그의 삶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에 크게 기여했다. 한 사람의 뛰어난 능력과 의지가 사회를 어떻게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꿔가는가를 잘 보여주는 모델이기도 하다. 루스 긴즈버그가 체제-미국 자본주의-내에서 가능한 여성의 권리를 확장하는 노력을 했다면, 로자 룩셈부르크는 체제의 변혁을 통해 인간해방을 이루려는 시도를 하다 참혹하게 살해 당한 경우다. 사회주의 변혁운동에서도 여성은 비주류였으며, 중요한 결정에서 소외되거나, 더 탁월한 재능을 가졌음에도 지도부에서 배제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오늘날 여성운동은 체제에 매수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남성기득권에 투항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여성(과 여성운동)은 본질에서 진보적이지만,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남성 기득권에 기생 또는 공생 관계로 만족한다. 이들 부르주아 여성(운동)은 자신을 '명예남성'으로 인식하며, 남성 권력이 던져준 부스러기 권력에 만족한다.
여기에 극히 일부 여성(운동)은 남성을 '적'으로 상정하고 무차별 공격한다.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제, 남성기득권 구조가 비난받아야 하는 건 당연하지만, 남성 일반을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는건 19세기 아나키스트의 테러를 떠올린다. 그들은 권력을 가진 적을 살해하면 혁명을 이룰 수 있다고 여겼지만, 체제와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는다.
남성 일반은 여성(운동)의 동지이자 지지자이자 동지이며,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지위 향상과 양성평등은 여성이 남성을 공격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어리석은 남성 일반을 견인해야 하며, 각성한 남성과 함께 힘을 모아 사회를 변화시켜야 궁극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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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미트리 키셀레브 감독, 엘레나 파노바 외 출연 / 미디어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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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우주과학 영화. 1963년, 쏘련은 미국과 냉전 체제를 유지하면서 우주 개발 경쟁에 돌입했다. 우주과학에서는 러시아가 앞서고 있는 상황. 미국은 1965년 5월까지 유인우주선을 발사할 계획을 이미 발표했다. 러시아는 이미 유리 가가린이 1961년 4월 12일, 지구인으로는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으며 지구 궤도를 도는데도 성공했다. 유리 가가린은 1968년 일곱 번째 우주비행에 나섰다가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미국이 우주 경쟁에 뛰어든 직접적 사건은 쏘련의 스푸트니크호 때문이다. 쏘련은 1957년 10월 4일,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우주로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곧바로 11월 3일에 스푸트니크 2호를 쏘아올리면서 그 안에 개를 태웠다. 미국은 1958년 1월 30일, 겨우 5kg짜리 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쏘아 올리는 데 성공하지만 며칠 뒤인 2월 3일, 쏘련은 과학 탐사위성 스푸트니크 3호를 쏘아올리는데, 이 위성의 무게는 1.3톤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미국은 초조하고 심하게 열 받은 상태였고, 쏘련은 충분히 앞서가고 있었지만, 미국의 기를 완전히 꺾어놓으려는 시도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계획이 바로 '유인우주선'이었다.

이 시기의 쏘련과 미국은 냉전 상태로 군비 경쟁과 우주 경쟁에 동시에 뛰어들어 서로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 이미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 미국의 정치, 문화, 예술 분야에서 활동하는 진보적 지식인을 공산주의자로 좌표를 찍어 내쫓거나 감옥에 보내거나 불명예 퇴진을 강요했다. 한국에서 지난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 존재했던 '블랙리스트'가 미국에서는 이미 이 시기에 존재했다.
1962년에는 쏘련의 미사일이 쿠바에 설치되고 있는 걸 미국 정보기관에서 탐지했다. 이 사건으로 미국은 발칵 뒤집혔고, '공산주의의 위협'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공포를 미국인들이 실감하는 사건이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이런 사태를 쏘련과의 군비, 체제 경쟁으로 끌어들여 미국 - 자본주의 -의 우월성을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게 된다. 하지만 우주 경쟁에서 러시아는 초반에 확실한 승기를 잡고 있었다.

유인 우주선 프로젝트는 미국이 먼저 발표했는데, 이미 쏘련의 유리 가가린이 우주 비행에 성공한 만큼, 이번에는 우주인이 지구 궤도를 돌면서 우주 유영을 하는 단계로 나가야 하는 과제가 부여되었다. 쏘련은 앞서 가고 있었지만, 미국이 바짝 뒤쫓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번 우주 유영 프로젝트에서도 앞서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개발 팀에서는 정상적으로 우주선을 만든다면 1967년이 되어서야 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쏘련 당국은 1965년 3월까지 앞당기라고 주문한다. 개발 팀장은 쏘련 정부의 입장과 실제 개발을 담당한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정을 조절해야 하는 압박을 느낀다.

최초의 우주 유영 비행사는 두 명이 선정되었고, 베랄예프 중령과 레오노프 소령이 그들이다. 쏘련 최고의 공군조종사이자 우주인인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영화의 중심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우주 유영 우주선 보스호드 1호는 시험 발사에 성공했고, 이제 2호를 쏘아 올리기 직전이다. 사람을 태우지 않은 시험 발사는 성공했지만, 우주인을 태워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개발 팀장은 1965년 3월의 일정에 맞출 수 없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두 우주인은 불완전한 우주선이라도 타겠다고 팀장에게 말하고, 두 사람의 의지를 확인한 팀장은 보스호드 2호에 두 사람을 태우고 발사한다. 1965년 3월 18일 오전 10시, 미국보다 한 발 앞선 시도였다.
이 우주선 발사는 세계 최초의 시도였기에, 생방송으로 쏘련 연방에 방송되었다. 보스호드 2호는 지구 궤도에 도달해 마침네 레오노프 소령이 기체에서 나와 최초의 우주 유영을 한다. 이 장면 역시 생방송으로 중계되었으며, 레오노프는 당시 공산당 서기장이던 브레즈네프와 직접 통화한다.
우주 유영은 성공했으나 다시 우주선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레오노프는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우주복은 뻣뻣하고, 팽창해서 팔이 잘 구부러지지 않았고, 에어록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우주복의 팔다리의 관절이 접히지 않아 몹시 고생한다. 여기에 에어록 문이 닫히지 않아 수동으로 어렵게 닫아야 했고, 레오노프는 에어록에서 산소가 소진되어 기절하걸 벨라예프가 살린다.

우주선은 지상 관제소와 통신을 유지하지만 일시적 사각지대가 있고, 이곳을 지날 때는 통신이 끊겨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게 된다. 보스호드 2호는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궤도를 그려야 하는데, 연료 문제로 22시간 동안 지구를 12바퀴 돌아야 하는 상황이 된다. 이렇게 서서히 돌면서 대기권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두 우주인은 산소중독의 위험에 놓인다. 에어록을 분리하는 과정에서 산소가 새나와 우주인들이 산소중독을 일으킨 것이다. 지상관제소에서는 원인을 발견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주인이 직접 수리를 해야만 했다. 이미 두 사람은 산소 중독이 시작되고 있었다. 게다가 우주선이 사각지대로 접어들고 있어서 지상관제소에서도 통제할 수도, 상황을 알 수도 없는 위험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레오노프는 새고 있는 산소 문제를 해결하지만, 이번에는 자동착륙 유도장치가 작동하지 않아 우주선을 수동으로 조정해 지구 궤도에 진입해야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우주선을 수동으로 조정한 것도 이번이 최초였으며, 아무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벨라예프는 우주선의 각도를 지구에 맞추고 엔진을 가동한다. 하지만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 하강 각도가 7도 정도 차이가 발생하게 되고, 처음 계획했던 착륙지점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내리게 된다.
이때 지상관제소에서는 자동착륙 유도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우주인이 수동으로 우주선을 조작하다 쏘련 땅이 아닌, 미국이나, 중국 땅에 떨어지면 쏘련의 우주 정보가 새나가게 되니 우주선을 추락시키고 두 우주인을 사망하는 것으로 하자는 의견도 나오지만, 개발팀장은 단호하게 반대한다.

우주선이 수동으로 지구를 향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대기권을 지나며 우주선 몸체가 차츰 분리되고, 공기마찰로 연소되는데, 우주선은 이런 극한의 상황을 극복하고 무사히 땅에 착륙한다. 이미 내려올 때 각도 차이로 착륙지점과는 매우 먼 곳에서 내리게 되는데, 이들이 떨어진 곳은 허허벌판, 깊고 깊은 숲속이었다. 영하 35도에 폭풍이 몰아치는 극한 상황에 놓인 두 우주인은 우주에서 겨우 살아 돌아왔지만 지구에서 다시 죽음의 위기에 놓인다.
두 우주인은 구조를 위한 활동을 하지만, 너무 넓고, 주변에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 두 우주인을 살린 사람은 아마추어 무선사였고, 이 사람의 전화를 받은 지상관제소에서 위치를 확인하니 사할린 숲속으로 밝혀진다. 그 사이에 쏘련 당국은 두 우주인이 지구로 귀환하다 사망했다는 뉴스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우주선이 착륙해서 무려 9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은 가까스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생존과 귀환은 쏘련 연방 최고의 뉴스가 되었으며, 두 사람은 영웅이 되었다. 이 영화를 만들 때, 실제 주인공인 레오노프가 자문을 했으니 사실성이 높은 거라 생각한다. 

러시아 우주과학 영화는 미국 헐리우드에 비해 적은 예산으로 만들어지지만, 내용은 훌륭하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을 놓기 어려운 긴박한 순간들로 이어진다. 때로 쏘련의 체제를 홍보하는 듯한 내용도 잠깐 등장하지만,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우주탐사를 하는 쏘련 과학자들과 우주인의 노력이 돋보이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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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Red Turtle (붉은 거북)(지역코드1)(한글무자막)(DVD)
Sony Pictures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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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거북

미카엘 두독 두빗 감독 장편 애니메이션. 두빗 감독은 이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전에 몇 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청소부 톰', '수도승과 물고기', '아버지와 딸', '차의 향기'가 그것인데, 이 작품들은 모두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두빗 감독의 공통점은 모든 작품에 대사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대사'는 오히려 작품을 이해하는데 방해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대사가 필요한 작품이 있고, 대사 없이 인물의 행동과 반응만으로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과거 무성 영화에서 소리 없이 서사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도, 대사보다는 인물의 행동과 반응이 더 직관적이거나 상징적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대사 없는 영화는 상징과 은유가 강하다. 대사로 전달할 수 없는 서사와 감정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압축하고 인물과 자연의 변화를 동기화한다. 단편 '아버지와 딸'은 이 영화 '붉은 거북'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두 작품은 단편과 장편의 길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주제를 담고 있으며, 매우 깊은 상징과 은유를 내재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에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난다. 그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은 무수한 신화의 변주다. 기독교에서는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라는 노래도 있는데, 이때 요단강은 죽음의 강을 뜻하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
아버지는 어린 딸을 두고 떠나는 것이 몹시 안타깝지만,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딸은 너무 어렸고, 자신을 두고 떠난 아버지가 언젠가 돌아오리라 믿으며 날마다 강가로 나온다.
딸은 자라고, 친구들을 사귀고, 연인을 만나며,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함께 아버지가 떠난 강가를 찾는다. 더 시간이 흘러 남편도 죽고, 아이들은 모두 자기의 삶을 찾아 떠나고, 딸은 다시 혼자 아버지가 떠난 자리를 찾아온다.
노인이 되어 허리가 굽은 딸은 아버지가 떠난 강이 이제는 물이 말라 모래톱이 드러난 곳을 걸어들어간다. 한참을 걸어간 딸이 발견한 건 아버지가 타고 떠났던 작은 배였다. 딸은 모래에 반쯤 잠긴 작은 배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고, 걸을 때마다 조금씩 젊어지면서 평생을 그리던 아버지를 만난다.

작품에서 보이는대로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지만, 작품 전체가 하나의 메타포이며, 신화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는 어린 딸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 아마도 어머니는 더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 혼자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면서 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아버지는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은 서양 종교에서 남성으로 현현한다. 또한 많은 경우 '아버지'로 불리며, '아버지'와 '신'은 동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린 딸은 어리석은 인간이다. 아버지 즉 신의 보살핌 없는 인간은 세상에서 늘 힘들고 괴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게 되고, 그렇기에 더욱 아버지(신)를 그리워한다.
하지만 어리석은 인간이 아버지(신)를 만날 수 있는 건 그가 살아 있을 때는 가능하지 않다. 그가 요단강을 건널 때, 즉 아버지가 계신 저 강(바다) 너머로 향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딸이 노인이 되어 죽음을 맞이할 때, 그는 멀리 떠난 줄 알았던 아버지(신)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붉은 거북'의 해석도 상징과 은유를 바탕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땅하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서사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해석의 여지가 거의 없다. 따라서 서사를 이해하고 풀어나가기 위해서라도 상징과 은유의 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남자는 바다에서 표류하다 작은 무인도에 닿는다. 남자는 곧 '인간' 또는 '인류'다. 바다는 현실의 세계가 아닌, 신화와 은유의 세계다. 또는 원초의 세계, 원시의 상징이다. 바다에서 무인도에 도착한 남자는, 현실의 세계에 발을 딛는다. 남자는 '신'의 자식이지만 '신'은 아니며, '신'이 창조한 피조물이다. 남자는 원초의 바다에서 빠져나와 현실의 세상에 발을 딛지만, 현실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괴롭다. 남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사방은 망망한 바다만 놓여 있을 뿐이다.
남자는 무인도에 자라고 있는 대나무를 모아 뗏목을 만든다. 그는 저 무한의 바다를 건너 자신이 처음 있던 곳이라고 생각하는 '이상향'을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바다에 뗏목을 띄우고 나아가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뗏목은 부서진다.
다시, 조금 더 큰 뗏목을 만들어 바다로 나가는 남자. 두번째도 뗏목이 부서진다. 저절로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물밑에서 무언가 의도적으로 뗏목을 부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남자는, 아주 큰 뗏목을 만든다. 크고 튼튼한 뗏목은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으로 여기고 다시 바다로 나간다.
여기서 '뗏목'은 이동수단이지만, 남자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가는 사상의 도구이기도 하다. 그 뗏목이 부서지는 건, 남자의 신념, 사상, 정신이 아직은 부족하다는 의미다. 뗏목은 폭풍을 만나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알 수 없는 물체가 뗏목을 일부러 부수기 때문인 걸 알 수 있는데, 부서진 뗏목 주변에서 만난 동물이 '붉은 거북'이다.
붉은 거북은 무얼까. 남자가 다시 무인도로 돌아와 외롭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때, 그는 도달할 수 없는 세계 - 바다 - 로 나가려 몇 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뒤로 분노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바다에서 섬으로 올라오는 붉은 거북. 

많은 거북 종류는 해변의 모래밭에 알을 낳아 묻는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 거북은 모래를 헤집고 올라와 바다를 향해 기어간다. 이 붉은 거북도 해변에 알을 낳기 위해 올라온 것은 아닐까. 이 현실적 해석은 이어지는 상징과 은유와 섞이면서 환상으로 환유한다.
남자는 해변으로 올라온 붉은 거북을 보고 분노가 폭발한다. 그 붉은 거북이 자기가 만든 뗏목을 부순 바로 '그' 붉은 거북이라고 확신한 것이다. 하지만 그 붉은 거북이 남자의 뗏목을 부순 거북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남자는 거북의 머리를 대나무로 내려치고, 거북을 뒤집어 놓는다. 복수한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남자는 자신이 한 짓을 후회한다. 붉은 거북을 살리려 바닷물을 떠 끼얹기도 하지만, 붉은 거북이 회생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붉은 거북이 죽었다고 여긴 남자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데, 갈라진 거북의 껍질 안에 젊은 여성이 누워 있었다. 남자는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지만, 붉은 머리의 여성은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실제의 존재였다. 남자는 여자를 살리려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숲에 있는 작은 연못에서 물을 떠와 여자에게 물을 먹여주고 지극하게 보살핀다. 비가 내리는 날, 여자는 긴 잠에서 깨어난다.
여자는 자기를 감싸고 있던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낸다. 그 모습을 본 남자는 만들고 있던 뗏목을 바다로 떠나 보낸다. 여자는 더 이상 바다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거북 껍질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고, 남자는 그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자신도 더 이상 바다로 나가, 자신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붉은 거북이자 붉은 머리의 여성은 남자의 또 다른 자아이면서 욕망의 현현이다. 남자(인류)는 진화를 통해 점차 문명을 갖게 되고,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며 적응해 살고 있는 존재다. 그는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원초의 고향 - 자연 - 으로 돌아가고픈 본능을 지니며 살아간다. 회귀 본능은 사라질 수 없으며 다만 현실의 욕망이 더 클 때, 본능을 누르며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게 된다.

남자와 여자는 함께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고, 아이가 태어난다. 아이가 자라고, 세 사람의 삶은 변함 없이 평온하고 따뜻하다. 소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 아이가 바다에 빠졌지만, 본능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그리고 알 수 없는 문명의 물건이 해변에 떠내려 온 것을 발견하는 소년.
아이는 자라서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된다. 남자와 여자는 나이 들어가고, 아무 변화가 없을 것 같았던 그들의 삶이 파괴되는 재해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해일이 몰려오고, 그들이 살던 숲이 거의 다 파괴되고 세 사람은 죽음의 고비를 넘긴다.
성장한 아들은 좁고 답답한 섬에 머물러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멈춰 선 파도에 올라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새로운 문명 사회를 발견한다. 아들은 부모를 설득해 바다 건너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부모는 성장한 아들을 막지 못한다. 아들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섬을 떠나고, 섬에는 다시 두 사람만 남는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두 사람은 이제 백발 노인이 된다. 삶은 변함 없지만, 시간(역사)은 남자를 죽음으로 이끈다. 남자가 숨을 거두자 여자는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붉은 거북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느리게 몸을 돌려 바다로 나간다.
붉은 거북은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는 바다로 나갔다. 남자(인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또는 붙들린 삶을 살았고, 육체가 소멸하자 욕망은 다시 원초의 바다, 이상향으로 돌아간다. 현실에서 자신의 존재를 살아움직이도록 추동하는 힘은 '욕망'이었다. 그것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며,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욕망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이면서도 그로 인해 행복하고, 가치 있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실에서의 삶이 끝나면, 인간의 욕망도 자연스럽게 원초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불교적이다. 죽은 남자의 손등을 어루만지던 여자가 다시 붉은 거북으로 변해 바다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주제를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긴 시간이 조금도 아깝거나 지루하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부드러운 선과 파스텔톤의 가라앉은 채색, 간결한 선과 최소한의 움직임, 작은 섬과 망망대해, 바람, 대나무 숲, 모래톱, 일렁이는 파도와 포말, 하늘을 나는 새, 붉게 물드는 노을,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않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자연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 사람의 삶은 인류의 초기, 원시적 삶을 살았던 힘들지만 순수했던 시기를 떠올린다.
좁게는 개인의 인생을 그린 것으로 해석할 수 있고, 넓게는 인류, 신화를 상징하는 작품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이 작품은 단 한 마디의 대사도 없지만, 말보다 더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고, 더 근본적인 질문과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은 많은 사람이 보고 함께 이야기 하길 바라는 몇 안 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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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고인
지아 장 커 감독, 장애가 외 출연 / 에스와이코마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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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고인

지아장커 감독 작품. 빠르게 변하는 중국의 현재를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눠 보여주고 있다. 
1999년 펜양. 두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는 같은 동네에서 자란 소꿉친구다. 20대 중반의 이들은 가깝게 지내지만, 서로 서 있는 위치는 다르다. 영화에서는 설명하지 않지만, 리앙즈는 부모도, 자신도 노동계급 출신의 노동자인 걸 알 수 있다. 진셩은 부모가 당 간부로 추측할 수 있다. 진셩이 20대에 탄광을 운영하는 자본가가 될 수 있었던 건 그의 능력보다는 그의 부모 능력으로 가능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오는 아버지가 작은 가게를 운영한다. 서로 다른 출신 성분이지만 세 사람은 가족처럼 가깝게 지낸다.
지아장커 감독이 직접 밝혔든, 중국에서 1999년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중국에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본격 퍼지기 시작한 것이 1999년이라고 한다. 중국은 시장 개방 정책을 통해 '세계의 공장'을 나서서 맡게 되고, 수억 명의 중국인민은 공장노동자로 일하기 위해 전국에서 대도시와 대도시 근교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리앙즈와 진셩은 타오를 두고 삼각관계를 이룬다. 리앙즈와 진셩 모두 타오에게 자기와 결혼하자고 말하지만, 타오는 선뜻 한 사람을 선택하지 못한다. 리앙즈는 진실한 사람이지만 너무 가난하고, 진셩은 엄청난 부자라서 오히려 부담스럽다. 
타오와 친밀하게 지내는 리앙즈를 본 진셩은 자기가 운영하는 탄광에서 일하지 말라며 리앙즈를 해고한다. 리앙즈 역시 구차하게 굽신거리며 일하기 싫다며 탄광을 그만둔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지만, 사랑하는 여자를 사이에 둔 정적이자,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 구분되어 있는 적대적 관계라는 것을 '사랑'의 관계를 통해 드러낸다.
타오는 아버지와 고향을 찾아가는 기차에서 진셩과 결혼할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 사실, 무표정 자체가 사윗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걸 관객은 알아챈다 - 너의 미래는 너 스스로 결정하라고 말한다. 타오의 아버지는 리앙즈가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리앙즈는 통신대학으로 법학과를 나왔는데, 스스로 지식인인척 하지 않고, 탄광노동자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타오는 리앙즈를 찾아간다. 바람에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포장되지 않은 도로를 걸어가던 타오 앞으로 갑자기 전투기가 추락한다. 놀란 타오는 그 장면을 한참 보다 다시 길을 걷는다. 비현실적인 상황이 벌어졌지만, 그것이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곧바로 잊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타오는 어렵게 리앙즈의 집을 찾아가 리앙즈를 만난다. 그리고 청첩장을 건네면서 결혼식 때 와달라고 말하지만, 리앙즈는 고향을 떠나겠다고 말하고, 그날로 가방 하나만 들고 고향을 떠난다. 리앙즈의 마음은 어땠을까. 사랑했던 여자가 돈 많은 친구와 결혼을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돈 없는 자신을 탓했을까.
타오는 아이를 낳는다. 아이의 이름은 '골드'다.

2014년. 리앙즈는 여전히 탄광노동자로 일한다. 그는 고향을 떠나 타관에서 일하고 있고, 결혼해서 얼마 전 아이가 태어났다. 15년 전,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낯선 땅에서 탄광노동자로 일하며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으니 그의 삶도 평범한 중국노동자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리앙즈는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병원에서는 더 큰 병원으로 가봐야 한다고 말한다. 리앙즈는 탄광 일을 그만두고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온다. 집은 그가 떠날 때와 똑같은 모습이다. 좁고, 먼지가 많이 쌓인 낡은 집.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물도 나오지 않는 움막 같은 집이다.
리앙즈는 고향에서 일할 때 가깝게 지내던 친구를 찾아간다. 다만 얼마라도 돈을 빌릴 생각이었지만, 그 친구는 리앙즈를 반기면서도, 탄값이 떨어져 탄광이 문을 닫을 처지라고 말하고, 자신도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로 돈을 벌러 갈 계획이라고, 보증금을 여기저기서 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진셩의 소식을 들려준다. 진셩은 예전보다 더 큰 사업을 하고, 상하이에서도 잘 나가는 자본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타오와는 이혼했다는 말도 한다.
직원 결혼식에 참석해 축하하는 타오. 고급한 옷을 입고 외제차(아우디 A6)를 타고, 많은 직원을 거느린 사장님이 되었다. 리앙즈의 아내가 타오를 찾아온다. 리앙즈가 아내를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앙즈의 성격에 타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건 참지 못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가 이웃들이 말하는 소리 - 아마도 리앙즈의 가족을 도와주려는 선심에서 한 말이겠다 - 리앙즈의 어릴적 친구 타오가 성공했다는 말을 듣고 일방적으로 찾아온 것이다.
타오는 리앙즈의 아내를 반갑게 맞고, 리앙즈는 잘 있는지 묻는다. 리앙즈의 아내는 서럽게 운다. 그녀도 남편이 암투병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프고, 안타깝고, 고통스러웠으니 처음 보는 남편의 친구에게 속절없이 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타오는 리앙즈의 집을 찾아가 리앙즈를 만난다.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집에 누워 있는 리앙즈를 보면서, 타오는 치료비에 쓰라며 돈을 건넨다. 리앙즈는 고마운 마음으로 돈을 받지만, 그 뒤로 리앙즈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리앙즈는 치료를 했어도 오래 살지 못했을 것이다. 리앙즈에게는 아내와 어린 아이가 있고, 이 두 사람은 다시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타오는 진셩과 이혼했지만, 자식인 '달러'를 보고 싶어한다. 어렵게 진셩과 통화해서 '달러'가 비행기를 타고 타오에게 온다. 상하이국제학교를 다니는 어린 '달러'는 어려서 엄마와 헤어져 엄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지금은 아버지, 새엄마와 함께 살고 있고, 국제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중국말도 잘 못한다.
타오가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버지가 고향을 방문했다 갑자기 사망한다. 타오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아들을 다시 진셩에게 돌려보내면서 아들에게 집 열쇠를 준다. 언제든 네 집이니까 돌아오라고.

2025년. 대학생 '달러'는 수업시간에 엄마가 없다고 거짓말한다. 피터(진셩의 영어 이름)는 돈을 많이 벌어 평생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자본가로, 가족이 모두 호주로 이민을 왔다. 하지만 영어를 할 줄 모르는 진셩은 영어만 하는 아들 '달러'와 정서적 거리가 생긴다.
수업시간에 교수는 90년대 중국에서 유행했던 노래라면 '산하고인'을 틀어준다. '달러'는 그 노래가 퍽 낯익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노래라고 생각하지만, 어디에서, 누구와 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달러'는 교수와 함께 집으로 가서 아버지를 만난다. 달러와 진셩이 대화하는 방식은, '달러'가 구글 번역기에 영어로 문장을 입력하고,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해 아버지 진셩에게 보여주거나 들려주는 방식이었는데, 그렇게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래서 중국말을 잘 하는 교수에게 부탁해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다.
'달러'는 대학 생활을 그만두고 싶고, 집을 나가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런 아들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 비웃으며 화를 내는 진셩. 중국의 과거 세대와 현재 세대의 갈등은 나라와 민족, 인종을 가리지 않고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버지와 다투고 집을 나와 교수와 함께 관광용 헬리콥터를 탄다. 시끄러운 헬기의 소음 속에서 '달러'는 중국에 계시는 친엄마 이야기를 꺼내며 서럽게 운다. 그의 내면에는 엄마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중국을 거쳐 교수가 살던 토론토까지 한바퀴 돌며 '달러'의 엄마도 만나보고 중국도, 캐나다도 돌아보고 오자고 말하며 공항에서 항공권을 구입하려 하지만, '달러'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여행을 포기한다. 그에게 중국은 너무 멀고, 낯설고,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타오는 아들이 좋아하는 만두를 빚고, 눈 내리는 골목을 서성인다.

지아장커의 작품 가운데 비교적 덜 건조하고, 이야기의 맥락이 분명한 작품이다. 주인공 세 사람 가운데 아무래도 리앙즈에게 마음이 더 간다. 진셩은 젊어서부터 자본가로 잘 먹고, 잘 사는 인물이었고, 타오도 진셩과 결혼하고 이혼하면서 아마 큰 돈을 위자료로 받아 사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타오 역시 먹고 사는 문제는 겪지 않으며 나이 들어 가는데, 다만 자식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반면 리앙즈는 성실한 노동자로 일하지만, 결국 그는 암으로 고생하다 죽게 되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역시 가난한 노동자의 삶을 살게 된다. 만약 타오가 진셩과 결혼할 마음을 굳혔더라도, 진셩에게 부탁해 리앙즈에게 작은 가게라도 차릴 돈을 건넸다면, 리앙즈가 고향을 떠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영화는 주인공 개인의 세세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핵심은 아니다. 이들 세 명의 친구가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을 중국의 현실에 맞춰 그려 본 것이니, 개인의 삶은 많은 부분 생략된 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노동자 리앙즈의 삶이 고난으로 점철되는 것은, 중국인민의 현대사 역시 그렇다는 걸 의미하는 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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