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콧 감독, 수잔 서랜든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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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여성문제가 점차 일반화되면서 우리는 여성문제가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인식에는 공감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여성문제를 여성상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무식한 남성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제 여성문제를 남녀가 함께 풀어가야 하는 인간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면에서 여성문제를 다루는 예술작품의 창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격려와 비판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문제를 모든 이데올로기, 제도, 관습, 차별의 중심고리로 둘 만큼 여성문제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관심이 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약화되고 국가간의 관심이 경제와 환경 등으로 바뀌어 가면서 여성문제는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일반 남녀 노동자가 당하는 자본가의 착취와 제도적 억압의 예속은 물론이고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성차별과 성적 불평등과 억압의 이중적인 노예생활을 당하고 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여성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소련과 동유럽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자본주의적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여성들은 더욱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서독에 흡수된 동독의 여성들은 실업대상의 첫번째 순위이고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여성을 위한 복지정책들을 폐기함으로써 노동강도를 훨씬 열악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생산력을 높인다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와 관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나 모권이 제도적으로 보호되고 남녀의 성평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것은 진보적 이데올로기가 보여주는 발전된 인류의 모습이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권에서는 여성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직도 여성문제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구조적으로 개선되는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도, 남성 우월주의의 성차별이 만들어내고 있는 적나라한 모습인 것이다. 이제 여성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절실하고 구체적인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고, 문제의 핵심이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를 건드려야만 해결될 수 있는 엄청난 활화산과 같은 것이어서 지배자인 남성들도 더 이상 침묵만을 강요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문제를 다루는 창작물들은 작가의 태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한때 페미니즘이 상업적 선정주의로 이용되어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온갖 선정적인 영화, 연극, 잡지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가들의 수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문제를 희화화하고 대상화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여성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법인 것이다. 
 지금도 거의 모든 여성들 - 거의 모든 남성들은 둘째 치고라도 당사자인 여성들 - 은 여성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여성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으로 떠오른지 불과 얼마되지 않았고, 여성문제에 대한 토론이나 문제제기가 활발하지 않았으며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지금도 매우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여성문제를 다루는 단체마다 제각기 논의의 수위나 시각이 다르고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편차는 매우 크다. 따라서 일반 여성의 참여와 의식화를 빠른 시간에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대중적 접근이 바로 대중문화를 통한 문제의식의 공유인 것이다. 
 우리 문화계에서도 얼마전부터 여성주의를 표방한 작품들이 다수 창작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소설인데, 여성소설가들이 주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연극, 미술 등에서 일부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는 정도이다. 여성문제를 다루는 단체들이 간판을 많이 내걸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 그 활동이 미약한 실정이다. 소설에서는 박완서, 양귀자, 윤정모, 이경자 등이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고 젊은 세대에서 점차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들이 나오고 있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공지영은 이미 다른 장편을 통해 그의 관심이 사회적임을 알렸는데,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와 같이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 이어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을 펴냈고 이것이 연극으로 각색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공지영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나는 그의 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읽고 비판이 아닌, 비난을 퍼붓고 말았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옳지 않고 왜곡된 시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미학적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작가의 시각부터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다음부터는 작가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애정은 고사하고 진보성을 내세워 진보적인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고 했다. 진보적임네, 여성주의임네 하고 떠들면서 써내는 이른바 진보적 작가들의 수준미달인 작품이 진정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 대중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나갔지만, 나는 그런 작가들을 알고 있다. 자신은 유교적 가부장제의 화신이면서도 글은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우는 이중인격자가 있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옛날에 이른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세월이 흘렀으니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며,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나는 지난날의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 분명, 존재하지만 - 그것은 그 한 두 사람의 명예 뿐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거금을 들이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보았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이 연극을 보러왔다. 좌석은 빈틈없이 차고, 모두들 진지하게 관람을 했다. 나는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연극을 보았다. 주위에서 이 연극에 대한 올바른 비판의 소리를 못들어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친구들도 보고는 모두들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오숙희 씨는 월간 [말]지에서 극찬의 평을 해놓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연극을 보고 무언가 비판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열렬하던 내 전의는 연극이 진행되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차 식었고 연극이 끝나고 나서는 그저 허탈해지고 말았다. 내가 이 연극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 끝나고 연출자와 토론시간이 있었을 때, 나는 연출자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연출자 역시 이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여성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연극은 원작소설과 다른 곳이 많아서 소설과 비교하기는 어려웠고, 연극 그 자체가 그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원작자인 공지영씨의 작품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이 연극은 한마디로 [여성주의 연극]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세 명의 여성이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구체적이고 진실되게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나오고 여성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아픔을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여성주의 연극은 아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연극에서 여성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부분은 없었다. 그 본질이라는 것이 딱히 어떻게 드러나야 한다는 정석은 없지만, 그리고 제작자들은 연극 속에 그러한 요소들은 모두 녹아들어 있다고 말하겠지만, 여성문제의 본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세명의 여성이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한 친구가 자살을 하고, 남편과의 불화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 등으로 이어지는 이 연극에서 여성문제의 현상은 있었지만 본질은 없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현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하다못해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도 여성문제의 현상은 드러나고 있다. 
 연출가도 대안은 없다고 인정했지만, 이 연극이 여성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한, 연극의 제작자들에게는 여성문제를 올바르게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극을 보고나서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스토리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여성문제를 이렇게 밖에 다룰 수 없었나 하는 것과,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정도였는가 하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나라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수준이 이정도에 불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결국 이 연극의 수준일 것이다. 연극에서는 모두 중산층 여성들이다. 대학을 나오고 재원들로서 중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있고, 파출부를 고용하고, 자신의 일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자신의 일때문에 남편과 마찰을 빚고, 결국 이혼을 한다. 여성문제가 여성이 일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거나, 여성이 독립할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 한다면 여성노동자, 빈민여성, 향락산업에 희생 당하는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여성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연극에서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은 다루지 않는 작가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성문제가 여성의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을 공감한다면 여성문제의 전형이 있을 것이다. 그 전형이 과연 민중적 시각에서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작가들이 할 일이다. 중산충 여성들을 내세워 그들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으로 여성문제를 다룰려고 한다면, 부르조아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가정과 여성의 자립이나 남편과 아내의 대립구도로만 설정하는 것도 여성문제를 넓게 보는데 방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문제를 보다 사회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매우 심각한 줄거리를 다루면서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면 나의 지나친 옹호일까. 그러나 챨리 채플린이 자신의 무성영화에서 영상과 음악을 전혀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 때문에 두 여성의 운명이 바뀐다는 줄거리이다. 그러나 그 ‘우연’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여성에게 성폭행이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이며 두려움이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인간으로 서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남성들의 ‘폭력’인 것이다. 
 활동적인 루이스와 전형적인 가정주부 델마는 이틀동안의 여행에 마음 설레이며 출발을 한다. 오랫만에 해방감을 느낀 델마는 술도 마시고 클럽에서 처음보는 남자와 춤도 춘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성폭행 당하기 직전에 루이스가 구해준다.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고 깔보고 손찌검을 하는데, 모욕적인 말에 루이스는 총으로 그 남자를 쏘아 죽이고 만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고로 두 여성은 도망을 가는데, 경찰에 자수하지 않은 이유가 중간에 나온다. 루이스는 이미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남성들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폭력적인가를 알고 있었다. 즉, 루이스는 법에 호소를 해도 법이 남성들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도피는 중간에 많은 우여곡적을 겪으면서 마침내 두 여성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게 된다. 여성으로서 자신들이 받았던 사회에서의 억압과 남성들의 차별, 구조적인 모순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비극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찾고 기쁨에 넘친다.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이다. 그들은 경찰에 쫓기면서 부득이 하게 사고를 치면서 자신들이 갖혀있었던 사회의 벽을 뛰어넘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새롭게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들은 말한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고. 새롭게 눈을 뜬 것같다고. 그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찾은 것이다. 
 자신을 죽음의 벼랑에 몰아넣은 것은 다름아닌 남성이었다. 학대하는 남편, 성폭행을 일삼는 술집 남자, 돈을 훔쳐 달아난 사기꾼 남성 등등 남성들로 인해 두 여성의 삶은 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벼랑앞에 섰을 때, 잡혀서 원숭이 꼴이 될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은 의미있는 말이다. 또다시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범죄자로 농락당할 수는 없다는 각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랜드 캐년의 그 깊은 계곡으로 날아올랐다. 
 아주 비극적인 결말의 이 영화는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아름다운 두 여성이 희생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동과 흥분으로 가슴이 끓어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두 여성의 죽음이 결코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희생된 가엾은 존재이긴 하지만, 그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는 술집남자, 도망자 사기꾼, 트럭운전사들은 다름아닌 바로 남성들이다. 그것도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이런 남성들에 맞서 결연하게 싸웠다. 
 이 영화는 결코 오락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재미가 없다고 투덜대는 여성관객들을 보았는데, 나는 그들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이다. 바로 자신의 문제를 그렇게 무심하게 넘겨버릴 수가 있는가.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자세히 읽지 못한다면 정말 좋은 영화를 놓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보고나서 석연치 않았던 감정이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깨끗하게 풀렸다. 물론, 연극과 영화가 서로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서 느끼는 감동도 다르겠지만, 적어도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델마와 루이스]가 훨씬 본격적이다. 물론 [델마와 루이스]에서 극적 효과를 위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약간은 희화화 한 것이 비판받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서로 다른 영화제에서 똑같이 극본상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분명 문제의식을 가진 영화라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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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은 한국문학에서 거대한 봉우리입니다. 그의 '객주'는 홍명희의 '임꺽정'과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의 뒤를 잇는 민중문학의 보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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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의 찬미]를 보고


 영화 [사의 찬미]를 보았다. 최근에 만들어지는 우리 영화의 수준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나름대로  꼼꼼하고 성의있게 보고자 노력했다. 금년 여름에  발표된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은 흥행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이었다. 우리나라의 작품 수준이 대중들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 정도로  일정한 수준에 올랐다는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나의 기대는 영화를 보면서 점차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다. 사실 [사의 찬미]라는 제목이 상징하듯이 내 기대에  만족을 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어느정도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리라 믿었다. 그것은 출연한 배우들을 보면 안다. 윤심덕으로 나오는 장미희,  김우진으로  나오는  임성민,  홍난파로 나오는 이경영, 이들 세 사람은 우리 영화계에서  인정받는 연기자들이다. 
 이렇듯 호화 연기자들이 출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졸작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왜일까? 부족하나마 그 이유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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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 - [초특가판]
영상프라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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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메로]는 살바도르의 대주교이다. 그는 1980년 3월 24일   암살  당했다. 바로 광주에서 대학살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군사독재정권이  극악무도하게 행동한 시기가 어쩌면 우리와 그렇게 일치할 수 있을까.  당시 남미는 '해방신학'이 카톨릭과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상당한  지지와 호응을 얻으며 솟아 오르기  시작한 때였다. 이것은 바로  남미의  열악하고 참담한 정치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극우 군사독재정권이 얼마나  악랄하고  잔인한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쿠바의 혁명이 성공하자 남미의 여러 나라 민중들은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나갔다. 미제국주의의  착취와 탄압으로 허덕이던 민중들은 평등한 세상과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투쟁한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받는 군사독재정권들은 미국에서 수입한 무기로 자기 나라의  민중들을 대량  학살하며 집권을 한다. 이런 가운데 남미에서 깊은 뿌리를  내린  카톨릭이 어떠한 태도로 나오는가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점이었다. 
 남미에서는 종교, 특히 카톨릭은 생활이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종교와 하나가 되어 있으며 사제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제들의 행동은 민중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살바도르에서 평범한 주교 가운데 한  사람인 로메로 역시 그가 살고  있는 조국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 모든 사람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바라는 보통의  사제였다. 그런  그가 로마 교황청에서 대주교로 임명되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한다.  물론 그 전부터 주위의 진보적인 사제들의 영향을  조금씩  받기는 하지만 그것을 쉽게 인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민중들의 삶이  척박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고 군사독재정권이  폭력적  탄압을 하고 있는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깨닫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대주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갑자기 밀어닥친 현실에  어쩔 줄을 모른다. 민중들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실종된 사람은  수  만명에 이른다. 평화로운 미사 집회에 총을 쏘아 수 십명이 살해 당하는 현실을 보면서 조금씩 현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군사독재정권은 종교의 비판마져도 받아들이지 않고   탄압하기에  이른다. 민중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제를 학살하고  체포하여 고문한다. 마침내는  대주교인 로메로 자신마져 체포 당해  유치장에 구금된다.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은 대주교를 만나주지 않고 정치범 석방 탄원에 '정치범은 없다'고  거짓말을 한다. 모순과 비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로메로는 마침내 종교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를 깨닫고 그것을 민중들에게 설교한다. 강도 높은 비판은 민중들을 일깨우고 군사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는 말한다. "미국은 더 이상 살바도르를 지원하지 말라. 미국이 지원하는 무기가 우리 민중들을  학살하는데  쓰이고  있다." "종교는 가난하고 억눌린 자들을 위해 있어야 한다." "고통받는 민중들이여, 그대들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워야 한다."이렇게 민중의 편에 서서 독재와 불의에 맞서 싸우던  로메로는 마침내  암살 당한다. 군사독재정권이 그를 암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생전에 그는 암살의 위협을 받고도 태연히  말했다. 
 "나를 죽이는 것은 쉽다. 그러나 나는 죽어서 살바도르  민중의 가슴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에서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불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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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바도르(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올리버 스톤 감독, 제임스 벨루시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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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살바도르]와 [로메로]를 보았다. 이 영화를 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혼란과 두려움,공포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아니,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의 현실과 너무 비슷한 느낌이 들어 숨조차 쉬기  힘든 고통을 느끼면서 이 시대에 살아있음이 부끄럽고 참담했다. 
 이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살바도르의 민중들만이  겪는  고통일까.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져 죽음으로 발견될지  모르는  이 공포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 이 영화는 다시 한번 나의 내면을 고통스럽게  휘젓고 말았다. 
 [살바도르]는 한 미국인 사이비 기자--그러나 그는 진정한 기자였다--  로이가 특종을 얻기 위해 살바도르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미국에서  만든 이 영화는 헐리우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미국의 일상적인 생활에 찌든  로이는 현실에서 도피하듯이 미국을 떠난다. 친구와 함께. 비록 사이비 기자이기는 하지만 로이의 양심은 남아 있다. 그에게는  살바도르에 애인이 있다. 군부 쿠데타가 발생한  살바도르는 마치 전쟁터처럼 모든 것이 파괴되고 어지러웠다. 군부에  의해 자행되는 살육으로 민중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게릴라  반군과의 접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의 지원으로 겨우 버티는 극우 군사독재정권은 공포정치로 일관한다. 
 이런 가운데 로이는 특종이 될만한 사진을 찍기 위해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 속으로 뛰어들어가기도 하고 게릴라 본부를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극우 군사독재정권은 미국을 등에 업고  전례를 볼 수 없는 탄압을  자행한다. 평화집회를 열고 있는  민중들에게 총을 발사하여수 십명이 죽어가는  것은 예사이고  반정부 활동이나 데모대의 앞장을 선 사람들을 추적하여 납치, 살해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는 로이의  친구이기도 한 미국인 수녀들을 납치하여 강간한 다음 처참하게 죽여 땅 속에  묻어버린 일이 발견되기도 한다. 이렇게 죽어가거나 실종된 사람들은 수 만명에 이르고 군사독재정권을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무조건  좌익,빨갱이,공산주의자로 몰아 정식 재판도  없이 살해하는 것이 살바도르이다. 
 미국인 기자 로이는 점차 자신이 어디에 들어와 있는지깨닫게 된다. 그는 어떤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월남이나 캄보디아에서 취재한 경험으로 미국이 살바도르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게 된다. 
 이런 가운데 로이 애인의 남동생과 친구가 경찰에 잡혀가자  뇌물을  써서 친구는 겨우 빼내오지만 남동생은 그대로 남는다. 미국 대사에게 부탁을 하였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고 로이의  비판적인 행동은 점차  군사독재정권의 미움을 받는다. 
 다른 신문사 기자이며 친구이기도 한 죤과 함께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를 취재하러 나갔으나 미국이 지원한 비행기의 총격으로 죤이 사망하고 로이는 살바도르를 떠날 결심을 한다. 지난번  게릴라 쪽의 취재를 빌미로 군사독재정권은  로이를  체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애인의 남동생은 시체로  발견되고 로이는  애인과 함께 살바도르를 떠난다. 증명서 발급을 위해 미국  대사관의 직원들과 만나지만 미국의 이익을 위해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그들의 논리에 맞서 말다툼이 벌어지고 증명서를 위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국경선에서 검문에 걸린 로이는 그를  살해하라는  군사독재정권의 명령을 받은 일단의 테러리스트들에게 죽음을 당하기 직전에  미국  대사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살아난다. 죽음의 늪에서 살아난 듯 안심을 하고 버스를 속에 앉아 있던  로이  일행은 그러나 다시 그 죽음의 늪이 기다리고 있었다. 
 살바도르 사람인 애인을 군사독재정권이 체포하는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로이까지 체포하여 다시 살바도르로 끌고 간다. 
 이것은 아주 간략하게 줄인 줄거리이다. 이 속에 담긴 많은  것들을 말하기에는 나의 글솜씨가 형편없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극도의 흥분과 공포, 두려움,  분노, 고통스러움으로 몸이  마비되는 것같았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있는 그대로를 비교하자면 우리는 살바도르보다   나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독재의 정도가 강하고 약하고의 차이를 두고 민주정부와 독재정부를  나눌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가 아니면 독재라는 단순 흑백논리는 아니지만  민주주의가 양적인 문제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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