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VHS] 그대 안의 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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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대안의 블루]를 보고

 뤼미에르에서 영화 [그대안의 블루]를 보았다. 한국 최고의 영화배우 안성기씨와 강수연씨가 주연하는 이 영화는 예전에 만들어졌던 많은 한국영화와는 몇 가지 점에서 눈길을 끈다. 팜플렛에서는 이 영화의 성격을 설명하는 글이 없었다. 다만, 이 영화가 얼마나 정성을 들여 만들어졌으며 영화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프로근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자화자찬의 목소리 뿐이었다. 이 영화의 성격을 드러내는 글은 단 두 줄, ‘모던하게, 사랑을 자극적으로, 생을 말한다!’라는 카피가 그것인데, 이 또한 너무 관념적이어서 영화의 성격을 단번에 짚어내기는 어려웠다. 
 우리가 서양영화를 보게 될 때면 신문광고나 영화간판에 써있는 광고문구만으로도 그 영화의 성격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집시의 시간]이나 [토토의 천국], 그리고 [그대안의 블루] 같은, 서로 다르지만 그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는 영화들도 있기는 하다. 
 영화의 주제가 분명한 것이 좋은 이유는 관객들이 영화의 내용에 대해서 갈등을 일으키지 않아도 좋다는 데 있다. 물론, 영화의 주제가 분명하다는 것이 곧바로 영화가 좋다라는 뜻은 아니다. 관객의 이해와 감동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는 바로 주제에 있다는 뜻이다. 최근에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가운데 내용이 있는 영화로는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한 사람의 힘(The Power of One)]을 들 수 있다. 영화를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의미와 무게를 충실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가 가지는 미덕을 살리고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그대안의 블루]는 어떤가. 이 영화에는 주제가 없다. 아니, 주제는 있지만 모호하다. 이 영화를 이루는 골격은 여주인공 유림의 자아발견과 존재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디스플레이어라는 직업의 두 남녀가 보여주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애정, 일에 대한 맹목, 그리고 무엇보다 화려한 세트로 대충 넘어가려는 심미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이런 말이 있다면-의 겉치레 뿐이었다. 
 아마도 페미니스트로 불러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진 남자주인공 호석과 여자는 사랑으로서 완성된다고 믿는 유림 두 사람은 모두 전문직업인으로서 프로근성을 가지고 있다. 호석의 24시간 고용제의를 받아들이는 유림은 호석을 통해 일을 배우고 자리를 잡아나가지만 호석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과 늘 갈등을 겪는다. 이 스토리 역시 마지막에는 유림이 자기 자리를 찾는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지만 스토리의 진부함과는 관계없이 나는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어설픈 점을 짚어보겠다.
 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장점은 남녀 주인공이 우리나라 최고의 배우라는데 있다. 내가 좋아하기도 하는 이 두 남녀 배우는 그래서 연기 또한 흠잡을 곳이 없다. 그러나 두 주인공을 빼고 나머지 조연이나 액스트라로 등장하는 사람들의 연기는 정말 수준 이하였다.
 먼저, 호석의 친구이며 학원원장이 유림을 불러세울 때 대사를 보자.
 “아가씨, 디스플레이 배울래요?”
 이렇게 무식하게 말하는 원장도 있던가. 그리고 그 자세하며 억양 등은 참으로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기본이 되어있지 않았다. 대사의 촌스러움때문에 영화의 맥이 끊어지는 것같을 정도였으니까. 이런 장면은 곳곳에서 나왔다. 락 까페에서 유림이 혼자 술을 마시며 춤을 추고 있을 때, 함께 있던 젊은 남녀들의 모습은 마치 지금 영화를 찍고 있다라는 것을 거칠게 드러내고 있었다. 어색한 몸짓, 무표정, 그래서 느껴지는 촌스러움. 또한 호석의 작업실에서 누드사진을 찍던 모델여자의 단 한마디 대사는 어떤가. “더 이상 힘들어서 못올리겠어요.” 단 한마디의 대사인데도 원고를 읽는 것같은 억양과 표정이 참, 해도 너무한다 싶었다. 옷만 벗기면 대순가. 대사 한마디 제대로 연습시키지 않고 찍어대는 안일함이 보이는듯 해서 짜증이 났다.
 그리고 호석이 가지고 있는 그 비싼 매킨토시 컴퓨터는 꼭 컴퓨터가 없어도 될 정도록 간단한 작업이었다. 컴퓨터로는 아무런 작업도 하지 않으면서 무슨 대단한 기계인양 소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컴퓨터를 조금 아는 사람에게는 한심하게 보였다. 실제로 유림이가 하는 일의 거의 전부는 책상에서 이루어졌다.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저 근사하게 보일려고 셋트를 꾸며놓은 것이 눈에 너무 띄었다. 영화 속에서 소품들은 나름대로의 분명한 역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모를리 없을텐데, 그 화려하고 파격적인 실내장치와는 사뭇 달라보여서 형식미를 앞세우려는 의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 영화가 포스트모던하다고 느낀 것가운데 하나가 영화 [러브스토리]를 의도적으로 베꼈다는 것으로 확인된다. [러브스토리]에 사용된 음악과 그 배우들의 행동을 유림과 유림의 애인이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데,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특징이다. 그리고 그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것도 부모가 불분명한 사생아처럼 족보에도 없는 것을 무슨 대단한 이즘인 것처럼 포장하고 선전해대는 상업주의자들의 상품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갈 것은 주인공 호석의 편집증적인 관음증에 관해서이다. 호석은 자신이 단 한번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여성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려고 하지 않았으며 유림이 곤란할 때 자신이 모두 도와주는 행동을 통해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호석이 어쩐 일인지 유림이 하는 행동을 모두 비디오카메라에 담아서 보관하고 있다가 유림이가 평범한 생활로 돌아오자 그 테이프를 보냄으로써 다시 유림을 가정에서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왜일까. 
 그리고 호석이 가지고 있는 비밀, 바로 엑스에게서 자주 오는 메세지의 비밀을 이 영화에서는 끝까지 밝히지 않고 있다. 유림이 호석에게 콘돔을 쥐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성립된다면 정말 그것은 비밀이 아니라 호석의 매매춘을 보여주는 행동을 확인하는 것이나 아닌지.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그린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문직업인의 치열한 삶을 그린 것도 아니다. 그저 두 남녀가 만나서 감각적으로 사랑하고 헤어지는 통속적인 내용을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서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런 영화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영화상의 기법이나 편집, 제작진들의 디자인, 촬영기법 등 일반인들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내용들뿐이고 모호한 주제와 어수선한 영화를 아름답게 포장한 영화에는 속지말아야 한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두 배우가 나온 영화임에도 이렇게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영화가 다양한 장르와 제작기법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해서가 아니다. 현대사회의 부조리와 인간성 상실에 대해서 영상적 미학으로 표현하려는 의도까지도 알겠는데, 과연 그런 효과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직 리얼리즘에 충실한 작품도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재의 수준에서 너무 앞서가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관객들이 이런 내용을 충분히 수용하고 있다면 분명 문제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관객들도 이 영화가 어렵고 뭐가뭔지 모르겠다고 한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욕심이 있고, 또 그런 의욕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분명하지만 관객의 감성을 서둘러 끌어당기려는 노력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것은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고 안하고의 차이와는 별개의 것이다. 아주 좋은 영화도 흥행에 실패할 때도 있고, 그저 그런 영화도 흥행에서는 성공할 때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제작자가 시대의 흐름과 동시대 사람의 의식, 사회의 모순, 갈등구조 등을 보다 사실적으로 풀어나가는 데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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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턴 애비뉴 - 초특가판
네오센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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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웨스턴 에비뉴를 보고

 

한국인의 이민은 100년전부터 있어왔다. 최초의 서양이민은 하와이의 사탕수수농장 노동자였으며 조선민족의 비참한 역사적 현실과 맞물리는 시대적 상황이었다. 특히 70년대의 이민 붐은 팍스아메리카나를 꿈꾸는 미국인들과 그들에게서 무조건적인 희망을 느끼며 비판없이 받아들였던 양키문화에 이끌린 환상의 이민이었다. 무조건 미국에만 가면 한밑천 잡고 잘 살 수 있다는 허황한 꿈을 가지고 너도나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가난한 조국보다는 배부른 거지로라도 외국에서 살고싶은 그 참담한 현실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분단된 조국, 가난한 제3세계인 한국의 실정은 이민을 생존의 도피처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현실을 만들었던 것이다. 바로 그 시기에 이민한 한 가족의 이야기가 바로 웨스턴 에비뉴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자란 매리언(수지)과 그 형제들은 자신들을 잘 키우기 위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은 부모님들의 뜻에 따르지 않고 미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부모들은 한국적(유교적) 사고방식으로 자식들을 간섭하고 갈등을 일으키며 돌이킬 수 없는 이질감을 느낀다.

동양인으로 인종적 차별이 심한 미국인 사회에서 어떻게든 완벽한 미국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이민 2세들. 그러나 그들은 결코 완벽한 미국인이 될 수는 없다. 매리언은 다니던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드라마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하고 딸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들과의 갈등으로 매리언은 집을 나오고 만다.

미국인과 동거를 하며 스스로 자립을 하려던 매리언은 결국 실패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가운데 두순자사건과 로드니킹 사건이 서로 연결되면서 로스엔젤레스에서는 폭동이 일어나고, 한국인과 흑인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이 벌어진다.

결국 매리언의 둘째 오빠와 매리언의 흑인남자친구가 총에 맞아죽고 사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이 영화는 미국에 이민온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이민 1세와 이민 2세가 미국에서 각각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가는가를 나름대로 충실하게 보여주고는 있지만,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영화는 일관된 흐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영화의 앞부분과 뒷부분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상태로 진행되는 점에서 그러한데, 앞부분은 매리언의 방황과 갈등과 고통스러운 적응과정과 그 실패가 드러나는 부분이고 뒷부분은 집으로 돌아와 평온을 되찾는 매리언보다는 로스엔젤레스에서 벌어진 폭동과정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상황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떨어져 관객에게 인식되고 있다. 특히 앞부분에서 지루할 정도로 계속되는 매리언의 일상사와 정사장면은 뒷부분에서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으므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이민 2세가 미국사회에서 적응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다가 결국 실패한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서로 뿔뿔히 흩어졌던 가족들이 마침내 하나로 만나서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과정으로서의 방황인지가 분명치 않고 스토리전개에 무리가 따르고 있다.

감독이 무슨 말을 할려는지 그 의도는 짐작하겠지만, 미국사회에서 한국인들이 적응해가는 방법과 흑인들과의 갈등이 생기게 된 원인,한국인의 잘못된 점들을 보다 현실적이고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도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한국인과 흑인과의 갈등 부분이다. 하지만 흑인의 폭력적인 모습에 비해 한국인들이 평소에 흑인들에게 어떻게 대해왔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흑인들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과 유치한 인종감정도 분명 잘못된 면이지만 한국인들은 그런 흑인들에 대해 마치 백인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본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영화 속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매리언이 미국계 중국인 남자와 정사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의 신이 매우 길기도 하였지만 또한 적나라해서 미성년자 불가라는 딱지가 붙었던 걸로 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가 어떤 것인지는 이 신에서도 분명하지가 않다. 핑크 프로이드의 ‘THE WALL’ 뮤직비디오가 화면에 나오고 음악이 흐른다. 그 화면에 나오는 장면은 매우 선정적인 에니메이션인데, 감독의 의도적인 연출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장면을 매우 상징적으로 느꼈는데, 미국 사회의 단면과 함께 미국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양인들의 심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정사장면이 필요이상으로 길었던 것은 사실이다. 자칫하면 이 장면이 상업주의적 선정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을듯 하다. 장길수 감독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감각적인 연출기법이 이 영화에서도 가끔 등장하는데, 영화 뒷부분의 무게와 역사적 의미를 표현하기 위한 다큐멘타리 기법 - 영화의 장면에 등장하는 실제 텔레비전 장면 - 을 본다면 앞부분은 너무 가볍고 개인사적 관심에 가깝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물론, 매리언의 방황과 갈등과 고통이 반드시 개인적이지는 않겠지만, 아무래도 주제에 비해 가볍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가 가지는 의미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보다는 미국의 한국인들이 어떻게 미국인화되어가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나름대로의 답변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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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SE
임권택 감독, 김명곤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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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편제를 보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의 곡절과 구비구비가 어쩌면 그렇게도 서럽고 한스러울 수가 있을까. 가을 낙엽을 휘몰아가는 찬바람같기도 하도 새벽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같기도 하고 한겨울 문살을 흔들고 지나가는 긴 한숨같기도 한 이야기.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사람사는 모습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의 설레임으로 눈물을 삼키며 지켜봐야 했던 서편제. 복받쳐오르는 한을 삼키며 다시 인생의 숲으로 들어가는 동호와 송화의 만남과 이별을 지켜보면서 인생이, 삶이 참으로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남도 판소리를 지켜가는 소리꾼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참으로 오랫만에 만난 보기드문 한국영화의 전형이다. 해방 전 식민지 시대부터 전쟁이 끝나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까지의 역사적 배경을 깔고 판소리를 생명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한 가족의 서러운 삶의 이야기이다. 스승의 애첩과 사랑을 했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한 유봉은 지방으로 떠돌며 소리를 해서 먹고 산다. 그에게는 오가는 길에 주워온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소리를 가르치기 위해 데리고 다닌다. 유봉은 어느 고을에서 어린 사내아이를 기르고 있던 과부와 눈이 맞아 달아나지만 아이를 낳다가 과부는 죽고 만다. 그후 두 아이를 키우며 소리를 가르치는 유봉에게는 오직 판소리만이 그의 삶에 있어 전부이고 최고이며 마지막 가치이자 의미있는 일이었다. 
 두 아이들이 자라면서 누이 송화는 아버지 유봉의 뜻을 잘따라 소리를 배우고 동호는 고수로 성장하지만 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전쟁도 끝나고 급속하게 밀려들어오는 외세의 문화에 우리의 전통문화는 사라지고 판소리도 그 자리를 잃게 된다. 동호는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이복누이 송화와 자신을 학대하는 아버지를 미워하다가 마침내 떠나가고 송화는 동호와의 이별로 충격을 받아 소리공부를 그만둔다. 그러나 유봉은 송화의 눈을 멀게해 다시 소리를 하도록 하고 점차 늙어가고 쇠락해가는 시대 속에서 유봉은 송화를 남기고 죽고만다. 송화는 자신의 눈을 멀게 한 것이 바로 아버지 유봉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면서도 조금도 내색을 하지않고 소리공부에만 전념한다. 유봉은 죽어가면서 이런 사실을 모두 알고, 마지막으로 서편제, 동편제를 뛰어 넘는 득음의 경지까지 이르라고 송화에게 당부한다.
 동호는 자리를 잡고 누이 송화를 찾아나서고, 구석진 산골마을 주막에서 만난 두 오누이는 소리와 북으로 서로 어우러져 그동안의 한을 푼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아름다움은 바로 우리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것, 말로는 늘 하고 있지만 정작 무엇이 우리의 것이고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는지는 크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은 형편에서 판소리의 전승을 담은 이 영화는 우리의 전통문화와 민중의 한이 어우러진 수준있는 영화였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주인공 동호가 누이인 송화를 찾아나선 것으로 이어져 마침내 서로 만나 회한을 풀어내는 것으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 가족사이며 판소리의 흐름, 한 인간의 서럽고 기구한 삶의 궤적들이 등장한다. 특히 송화의 삶은 영화의 중간에서부터 관객의 기대와 호기심을 유발하며 계속적인 긴장과 감정의 충만함을 가져온다. 송화가 살아가는 그 참담하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에 모두들 눈물을 삼키게 되고 만다. 또한 사계절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 강산과 흐드러지는 판소리 가락이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내 마음속의 정서에 물결을 일으켰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동호와 송화의 이야기가 마치 지금의 현실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고 말았다. 지금도 송화는 저 남도의 어느 시골주막에서 자신의 소리를 듣고싶은 사람에게 한을 넘는 소리를 들려주고 있을 것만 같다. 나와 그들을 일체화시키는 이 감정은 그만큼 영화 속 주인공들의 삶이 절실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한때 우리의 전통문화가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버림받고 외국의 근본없는 쓰레기 문화들이 비싸게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그런 현상은 여전하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서 우리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자리매김은 반가운 일이다. 이 영화는 판소리로 대표되는 우리 문화의 쇄락과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그려내고 있다. 비록 가족사적 성격을 띄고는 있지만 많은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드러내기에는 가족사만큼 전형적인 방법도 없다. 마지막에 동호와 송화가 만나고 서로 한을 풀어내는 모습 속에서 성숙한 우리 전통문화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인생은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것임을 깨닫게 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영화 한편을 보고나서 그 느낌만큼 절실하게 적지 못하는 이 천박한 글솜씨가 안타까울 뿐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꼭 가서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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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델마와 루이스
리들리 스콧 감독, 수잔 서랜든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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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여성문제가 점차 일반화되면서 우리는 여성문제가 여성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인식에는 공감을 하게 되었다. 아직까지도 여성문제를 여성상위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무식한 남성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젊은 세대들은 이제 여성문제를 남녀가 함께 풀어가야 하는 인간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런 면에서 여성문제를 다루는 예술작품의 창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격려와 비판이 남다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문제를 모든 이데올로기, 제도, 관습, 차별의 중심고리로 둘 만큼 여성문제는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심각한 관심이 되고 있다. 특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약화되고 국가간의 관심이 경제와 환경 등으로 바뀌어 가면서 여성문제는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일반 남녀 노동자가 당하는 자본가의 착취와 제도적 억압의 예속은 물론이고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성차별과 성적 불평등과 억압의 이중적인 노예생활을 당하고 있다. 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여성이었던 것이다. 최근에 소련과 동유럽의 해체가 가속화되고 자본주의적 경제를 받아들이면서 여성들은 더욱 큰 피해를 당하고 있다고 한다. 서독에 흡수된 동독의 여성들은 실업대상의 첫번째 순위이고 모든 사회주의 국가들은 여성을 위한 복지정책들을 폐기함으로써 노동강도를 훨씬 열악하게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생산력을 높인다는 자본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페미니즘에 관한 논의와 관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여성의 지위나 모권이 제도적으로 보호되고 남녀의 성평등이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이것은 진보적 이데올로기가 보여주는 발전된 인류의 모습이었다. 이미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권에서는 여성문제를 구체적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아직도 여성문제가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고, 사회적으로, 구조적으로 개선되는 여지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부장제도, 남성 우월주의의 성차별이 만들어내고 있는 적나라한 모습인 것이다. 이제 여성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더 이상 참고 기다릴 수 없는 절실하고 구체적인 고통으로 다가오고 있고, 문제의 핵심이 바로 자본주의 그 자체를 건드려야만 해결될 수 있는 엄청난 활화산과 같은 것이어서 지배자인 남성들도 더 이상 침묵만을 강요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따라서 여성문제를 다루는 창작물들은 작가의 태도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한때 페미니즘이 상업적 선정주의로 이용되어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온갖 선정적인 영화, 연극, 잡지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그야말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자본가들의 수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여성문제를 희화화하고 대상화하여 대중들로 하여금 여성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도록 하는 수법인 것이다. 
 지금도 거의 모든 여성들 - 거의 모든 남성들은 둘째 치고라도 당사자인 여성들 - 은 여성문제가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은 여성문제가 사회적인 관심으로 떠오른지 불과 얼마되지 않았고, 여성문제에 대한 토론이나 문제제기가 활발하지 않았으며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여성문제에 대한 이론적 접근은 지금도 매우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 여성문제를 다루는 단체마다 제각기 논의의 수위나 시각이 다르고 세계적으로도 이러한 편차는 매우 크다. 따라서 일반 여성의 참여와 의식화를 빠른 시간에 기대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러한 대중적 접근이 바로 대중문화를 통한 문제의식의 공유인 것이다. 
 우리 문화계에서도 얼마전부터 여성주의를 표방한 작품들이 다수 창작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바로 소설인데, 여성소설가들이 주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연극, 미술 등에서 일부 문제제기가 나오고 있는 정도이다. 여성문제를 다루는 단체들이 간판을 많이 내걸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기는 하지만 아직 그 활동이 미약한 실정이다. 소설에서는 박완서, 양귀자, 윤정모, 이경자 등이 여성문제를 다루고 있고 젊은 세대에서 점차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들이 나오고 있다.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도 그런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공지영은 이미 다른 장편을 통해 그의 관심이 사회적임을 알렸는데,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와 같이 운동권 학생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에 이어 여성문제를 다룬 소설을 펴냈고 이것이 연극으로 각색된 것이다. 
 그러나 필자 개인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공지영의 작품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나는 그의 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를 읽고 비판이 아닌, 비난을 퍼붓고 말았는데, 그것은 작품 속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아주 옳지 않고 왜곡된 시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미학적 완성도는 차치하고라도 작가의 시각부터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다음부터는 작가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다. 애정은 고사하고 진보성을 내세워 진보적인 사람들의 삶과 세계관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혁명의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고 했다. 진보적임네, 여성주의임네 하고 떠들면서 써내는 이른바 진보적 작가들의 수준미달인 작품이 진정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 농민, 대중들에게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나갔지만, 나는 그런 작가들을 알고 있다. 자신은 유교적 가부장제의 화신이면서도 글은 페미니스트라고 내세우는 이중인격자가 있고, 그런 사람들이 바로 옛날에 이른바 ‘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물론 세월이 흘렀으니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며, 달라져야 할 것이다. 나는 지난날의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아직까지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면 - 분명, 존재하지만 - 그것은 그 한 두 사람의 명예 뿐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진영 전체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나는 거금을 들이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보았다.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고 이 연극을 보러왔다. 좌석은 빈틈없이 차고, 모두들 진지하게 관람을 했다. 나는 처음부터 편견(?)을 가지고 연극을 보았다. 주위에서 이 연극에 대한 올바른 비판의 소리를 못들어 보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여성문제를 연구하는 친구들도 보고는 모두들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고, 심지어 오숙희 씨는 월간 [말]지에서 극찬의 평을 해놓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이 연극을 보고 무언가 비판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고 싶었다. 
 하지만 열렬하던 내 전의는 연극이 진행되고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점차 식었고 연극이 끝나고 나서는 그저 허탈해지고 말았다. 내가 이 연극에서 무언가 엄청난 것을 기대하는 것부터 잘못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 끝나고 연출자와 토론시간이 있었을 때, 나는 연출자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연출자 역시 이 연극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여성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할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했다. 연극은 원작소설과 다른 곳이 많아서 소설과 비교하기는 어려웠고, 연극 그 자체가 그저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굳이 원작자인 공지영씨의 작품을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이 연극은 한마디로 [여성주의 연극]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세 명의 여성이 결혼하고 살아가면서 겪는 이야기를 구체적이고 진실되게 그리고 있기는 하지만, 여성들이 나오고 여성들의 입장에서 여성들이 당하는 아픔을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여성주의 연극은 아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연극에서 여성문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부분은 없었다. 그 본질이라는 것이 딱히 어떻게 드러나야 한다는 정석은 없지만, 그리고 제작자들은 연극 속에 그러한 요소들은 모두 녹아들어 있다고 말하겠지만, 여성문제의 본질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세명의 여성이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한 친구가 자살을 하고, 남편과의 불화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 등으로 이어지는 이 연극에서 여성문제의 현상은 있었지만 본질은 없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현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있다. 하다못해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도 여성문제의 현상은 드러나고 있다. 
 연출가도 대안은 없다고 인정했지만, 이 연극이 여성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대중들이 관심을 가지고 보는 한, 연극의 제작자들에게는 여성문제를 올바르게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연극에서는 그러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연극을 보고나서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스토리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라, 여성문제를 이렇게 밖에 다룰 수 없었나 하는 것과,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정도였는가 하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고보면 우리나라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수준이 이정도에 불과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여성문제에 대한 논의는 많지만 대중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결국 이 연극의 수준일 것이다. 연극에서는 모두 중산층 여성들이다. 대학을 나오고 재원들로서 중류의 가정을 이루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있고, 파출부를 고용하고, 자신의 일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다. 자신의 일때문에 남편과 마찰을 빚고, 결국 이혼을 한다. 여성문제가 여성이 일을 가져야만 하는 것이거나, 여성이 독립할 수 있는 것만을 이야기 한다면 여성노동자, 빈민여성, 향락산업에 희생 당하는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여성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이 연극에서 이런 것을 기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들은 다루지 않는 작가들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성문제가 여성의 보편적인 문제라는 것을 공감한다면 여성문제의 전형이 있을 것이다. 그 전형이 과연 민중적 시각에서 어떤 것인가를 찾아내는 것이 바로 작가들이 할 일이다. 중산충 여성들을 내세워 그들의 고민을 털어놓는 것으로 여성문제를 다룰려고 한다면, 부르조아적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여성의 문제를 가정과 여성의 자립이나 남편과 아내의 대립구도로만 설정하는 것도 여성문제를 넓게 보는데 방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영화 [델마와 루이스]는 여성문제를 보다 사회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매우 심각한 줄거리를 다루면서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밝은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것이 오히려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고 있다면 나의 지나친 옹호일까. 그러나 챨리 채플린이 자신의 무성영화에서 영상과 음악을 전혀 다르게 사용함으로써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아주 우연하게 발생한 사건 때문에 두 여성의 운명이 바뀐다는 줄거리이다. 그러나 그 ‘우연’이라는 사건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여성에게 성폭행이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이며 두려움이다.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이 평등한 인간으로 서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남성들의 ‘폭력’인 것이다. 
 활동적인 루이스와 전형적인 가정주부 델마는 이틀동안의 여행에 마음 설레이며 출발을 한다. 오랫만에 해방감을 느낀 델마는 술도 마시고 클럽에서 처음보는 남자와 춤도 춘다. 그리고 그 남자에게 성폭행 당하기 직전에 루이스가 구해준다. 남자는 여자를 무시하고 깔보고 손찌검을 하는데, 모욕적인 말에 루이스는 총으로 그 남자를 쏘아 죽이고 만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사고로 두 여성은 도망을 가는데, 경찰에 자수하지 않은 이유가 중간에 나온다. 루이스는 이미 성폭행을 당한 경험이 있었고, 남성들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폭력적인가를 알고 있었다. 즉, 루이스는 법에 호소를 해도 법이 남성들에게 더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도피는 중간에 많은 우여곡적을 겪으면서 마침내 두 여성은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자신의 본성을 되찾게 된다. 여성으로서 자신들이 받았던 사회에서의 억압과 남성들의 차별, 구조적인 모순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에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었고 비극적인 순간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여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감을 찾고 기쁨에 넘친다.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이다. 그들은 경찰에 쫓기면서 부득이 하게 사고를 치면서 자신들이 갖혀있었던 사회의 벽을 뛰어넘는다. 그리고는 마침내 새롭게 세상에 눈을 뜨게 된다. 그들은 말한다. 모든 것이 달라져 보인다고. 새롭게 눈을 뜬 것같다고. 그들은 여성으로서의 자신,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찾은 것이다. 
 자신을 죽음의 벼랑에 몰아넣은 것은 다름아닌 남성이었다. 학대하는 남편, 성폭행을 일삼는 술집 남자, 돈을 훔쳐 달아난 사기꾼 남성 등등 남성들로 인해 두 여성의 삶은 변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벼랑앞에 섰을 때, 잡혀서 원숭이 꼴이 될 수는 없다고 하는 말은 의미있는 말이다. 또다시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범죄자로 농락당할 수는 없다는 각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랜드 캐년의 그 깊은 계곡으로 날아올랐다. 
 아주 비극적인 결말의 이 영화는 그러나 나에게는 오히려 희망을 주었다. 아름다운 두 여성이 희생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동과 흥분으로 가슴이 끓어올랐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나는 두 여성의 죽음이 결코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델마와 루이스가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희생된 가엾은 존재이긴 하지만, 그들은 사건의 중심에서 문제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는 술집남자, 도망자 사기꾼, 트럭운전사들은 다름아닌 바로 남성들이다. 그것도 특정한 계층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남성들이 여성을 성적 도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이런 남성들에 맞서 결연하게 싸웠다. 
 이 영화는 결코 오락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재미가 없다고 투덜대는 여성관객들을 보았는데, 나는 그들의 지적 수준을 의심하고 싶을 정도이다. 바로 자신의 문제를 그렇게 무심하게 넘겨버릴 수가 있는가. 이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자세히 읽지 못한다면 정말 좋은 영화를 놓치는 것이 될 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보고나서 석연치 않았던 감정이 [델마와 루이스]를 보고 깨끗하게 풀렸다. 물론, 연극과 영화가 서로 다르고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서 느끼는 감동도 다르겠지만, 적어도 여성문제를 바라보는 시각과 접근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델마와 루이스]가 훨씬 본격적이다. 물론 [델마와 루이스]에서 극적 효과를 위해 전체적인 분위기를 약간은 희화화 한 것이 비판받을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서로 다른 영화제에서 똑같이 극본상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분명 문제의식을 가진 영화라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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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은 한국문학에서 거대한 봉우리입니다. 그의 '객주'는 홍명희의 '임꺽정'과 박태원의 '갑오농민전쟁'의 뒤를 잇는 민중문학의 보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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