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 그라운드 - 감독 인터뷰 포함 안됨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 미키 마뇰로비치 외 출연 / 대주미디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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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언더그라운드를 보고

 

좋은 영화는 이렇게 만나게 되나 보다. ‘언더그라운드를 볼 생각을 하고 전철을 타고 와서 매표소 앞에 섰을 때, 상영시간이 겨우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즐겁게 했다. 정확하게 맞춘 시간과 마침 남아 있는 표. 이렇게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미 각종 정보망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95년 깐느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 영화를 만든 에밀 쿠스타리차 감독은 세계의 유명 감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거장이다. 그가 만든 영화는 모두 화제작품이어서 상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흥행에도 상당히 성공한 것들이다. 그 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1980(26) ‘돌리벨을 아시나요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

1985(31) ‘아빠는 출장중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1989(35) ‘집시의 시간 깐느영화제 최우수감독상

1993(39) ‘아리조나드림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1995(41) ‘언드그라운드 깐느영화제 그랑프리

 

이 정도 경력이라면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뛰어난 감각과 탁월한 영화언어를 구사하는 그의 영화는 세계의 지성인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개봉된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지금까지 나온 그의 영화들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영화로서의 관심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매우 예민하고 충격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켜서 마침내 에밀 쿠스타리차는 유럽 여론에 밀려 감독을 그만두겠다는 선언까지 하고 말았다. 그만큼 그의 영화가 불러온 반향이 컸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에 관한 내용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이 영화 언더그라운드는 크게 두 부분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는 영화 그 자체의 미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역사적인 배경이다. 이것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 언드그라운드에 대한 이해를 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먼저, 이 영화의 미학에 관해 살펴보자. 이 영화의 큰 줄기는 환상적 사실주의(magic realism)’이다. 이 사실을 잘 모르고 영화를 본 관객들은 재미없다’ ‘너무 황당하다’ ‘이해가 안된다는 말을 하게 된다. 필자도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다른 관객들이 하는 이런 말을 들었는데, 역시 사물에 관한 이해는 자신이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생각났다.

이 영화는 매우 심각한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보여주는 이미지는 결코 심각하지 않다. 오히려 상당히 낙관적이고 코믹한 연출을 하고 있는데, 영화의 초반에는 블랙 코미디처럼 보이다가 점차 뒷부분으로 가면서 주제의 심각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영화 상영시간이 2시간 52분이나 되어 다른 영화에 비해서 상당히 길었지만 정작 감독 에밀 쿠스타리차는 편집하기 전의 3시간 12분으로 그냥 내보내고 싶어했고 하고싶은 말을 다 했다면 아마 5시간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가 길어서 지루하지나 않을까 염려할 필요는 없다. 이 영화를 볼 생각을 할 정도의 관객이라면 결코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이어주는 것은 음악이다. 모든 영화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음악인 것은 분명하지만 특히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한 작품(영화)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감독은 그 영화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특성을 부여하게 마련이다. 즉 영화의 색, 질감, 음악, 언어, 의상, 배경, 카메라 워크 등이 그런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인데, 특별히 강조되는 경우에 그 영화의 특성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음악은 매우 특별하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집시들의 요란하고 시끄러운 음악이 영화를 가득 채운다.하지만 요란하고 시끄러운 이 음악은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이어서 신명과 함께 음악 그 자체로도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또한 영화의 초반부터 시작되는 음악은 단순히 영화의 줄거리에 필요한 배경으로 쓰이는 정도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시끄럽고 요란하며 정신없이 불어대는 관악기의 화음과 북의 어우러짐은 전쟁터의 포탄소리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는 것이다.

예술창작행위는 표현하는 방식이 다를뿐 인간의 감성을 움직이는 데 근본 목적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정도로 반응을 보이게 된다. 이를테면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있다고 했을 때, 문자의 기호와 영상(이미지)의 기호와 소리(음악)의 기호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감동을 전달하고 있다. 이것을 수용하는 독자(관객)는 기호에 따라 한 번의 재해석으로 충분하게 받아들이는가 하면(소설이나 음악) 두 번이나 그 이상의 재해석으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영화)가 있다. 물론 이것은 일반론이다. 소설이나 음악은 일반적으로 여러번의 재해석을 필요로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며 영화도 대부분의 경우 재해석을 하지 않고도 받아들일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른바 작품으로서의 영화를 만나게 되면 한 번의 재해석으로 영화를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고 이미지의 다양성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문자의 기호는 그 기호를 해석하는데 다중적 이미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문자 그 자체가 아니라 소설이 가지고 있는 주제와 흐름, 인물의 성격, 활동, 언어 등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지보다 명료한 것은 사실이다. 소리(음악)의 기호 역시 작곡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지휘자의 의도, 독주나나 협연자의 의도 등이 연주할 때마다 다를 것은 분명하지만 음악에는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가 있으므로 복잡한 해석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유독 영화만은, 특히 예술영화만은 이미지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관객들이 이 언어를 수용하고 해석하기에 많은 어려움을 갖게 된다. 예술영화에 관객들이 많이 찾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런 난해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술영화의 난해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또스또예프스키의 소설이 어려우니까 좀 더 쉽게 쓰라는 말과 같다. 관객이 영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지 영화를 관객의 수준에 맞게 끌어내리라는 것은 어패가 있다.

이 영화 언더그라운드에서 사용된 음악, 표현방식은 감독의 언어이다. 감독이 가지고 있는 고유하고 개성있는 언어가 영화의 영상과 음악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블랙 코미디와 과장법이 사용된 것도 전쟁이라는 추악한 인간의 행동을 비꼬기 위한 수단이며 환상으로 보여주는 희망의 모습들은 고통 속에서 인간이 바라는 소박한 꿈과 같은 것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또 보고 나서 한결같이 느낀 감정은 영화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영화답게,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천억을 들여서 만든 헐리우드 영화들은 오락성만 강조했을뿐 결코 잘 만든 영화는 아니다. 잘 만든 영화의 본보기 가운데 한 편으로 이 영화 언더그라운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영화답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감독 에밀 쿠스타리차는 출연자들에게 독특한 개성을 불어넣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다못해 트럼펫을 부는 집시 한 명이라도 그 몸짓과 얼굴 표정이 근사했다.

영화를 보고나서 마치 흑백영화를 본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만큼 화면 이미지를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어둡고 무거운 톤의 영상 이미지와 시끄럽고 요란한 음악, 전쟁의 광기, 지하생활의 답답함 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이 영화를 만들고나서 감독인 에밀 쿠스타리차는 유럽 여론에 밀려 감독생활을 그만두겠노라고 선언했다.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에밀 쿠스타리차가 만든 영화 언더그라운드를 두고 세르비아의 선전물이라고 악평을 했다. 즉 학살자 편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면서도 미묘하고 복잡하다. 유럽의 평론가들이 혹평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 영화의 기본 주제는 반전과 반이데올로기라는 것은 분명하다.

영화 내용에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은 영화가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상징성 때문에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 만일 유럽의 평론가들이 에밀 쿠스타리차를 살인자의 편이라고 비판했다면 그것은 영화의 일부를 자의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밀 쿠스타리차 자신은 자신의 조국 유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어했다고 프랑스 영화 잡지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주장했다.

사실, 앞에서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두 가지 방법을 말했지만 역사적 배경은 더할 수 없이 복잡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 만든 자신의 조국에 관한 영화이니 감독 자신만큼 절실하고 복잡한 심정을 가진 사람도 드물 것이다. 유고 내전은 인류양심의 실험장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민족의 분쟁은 심각하다.

영화에서 유고 내전 부분은 뒤에 아주 조금 나온다. 2차 세계대전, 독일이 유고를 침공할 때부터 시작한 영화는1980년 티토가 사망하고 나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의 내전까지를 전쟁의 연속기간으로 설정하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유고 내전을 그리고 있으니 이 영화가 현실에 관한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하에 40년 넘게 갖혀 지내왔던 사람들은 유고가 분리되었는지,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해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독일의 침략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을 뿐이다.

좀 더 넓게 본다면 유고의 내전까지도 이 영화에서는 상징적인 전쟁으로 읽어야 한다. 감독 에밀 쿠스타리차가 하고 싶었던 말은 유고의 내전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의 광기와 이데올로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영화는 블랙 코미디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과장법을 쓰고 있는데, 이것이 전쟁을 일으키는 인간들과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들을 비웃기 위한 장치라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 영화의 끝부분에 갑자기 배우가 관객을 향해 진지한 발언을 한다. 세상이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희망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라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은 환상적 사실주의를 잘 드러내고 있다. 현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저세상에 가서라도 행복하고 살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는 감동의 눈물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또한 영화를 영화답게 만들어서 영화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변혁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영화를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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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본
워너브라더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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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돌로레스 크레이본을 보고

 

어제 저녁에 갑자기 영화를 보러 가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돌로레스 클레이본이었다. 이 영화가 마음을 끌었던 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바로 케시 베이츠와 제니퍼 제이슨 리이다. 케시 베이츠는 생존하는 여배우 가운데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다. 영화 미저리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었으며 미저리에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상을 받은 것과는 전혀 관계없이 나는 케시 베이츠 아줌마를 좋아한다. 그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케시 베이츠라는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케시 베이츠는 이미 오래전부터 연극무대에서 연기를 해왔었다. 영화에서 발견한 그이의 아름다움은 별다른 것이 없다.케시 베이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이의 외모가 참으로 평범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나이도 있고 몸도 뚱뚱하고 키도 별로 크지 않은, 옆집 아주머니같은 수수함이 있는 보통의 중년 여성이다.

하지만 케시 베이츠에게는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나는 그이를 처음 영화에서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버리고 말았다. 조금도 숨김없이 솔직한 고백이다. 영화 미저리에서 싸이코 전직 간호사 역할을 맡았던 케시 베이츠는 완벽한 연기로 영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완벽한 연기의 중심은 얼굴 표정, 특히 눈빛의 연기에서 나오고 있었다. 케시 베이츠의 눈빛은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악함, 사랑과 저주의 감정을 순간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눈빛만으로 연기를 할 수는 없지만 그이의 온몸에서 나오는 연기의 결정이 눈과 눈빛의 표정에서 절정을 이루는 것은 분명하다.

케시 베이츠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이는 타고난 연기자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세상의 어떤 배우보다 완벽한 연기를 한다고 나는 자신한다. 보통 여성 배우의 연기는 남성 배우에 비해 낮게 평가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자 관행이었다. 이를테면 세계의 대배우를 들었을 때, 말론 브란도를 비롯해 몇 명이 내리 남성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성의 연기력이 낮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배경은 차치하고 이제 연기력으로 따지자면 케시 베이츠와 같은 대배우가 대접을 받아야한다고 믿는다. ‘미저리에서의 그 천진과 악마의 눈빛이 교차하던 표정연기와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에서 평범한 여성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당당한 여성으로 바뀌는 드라마틱하고 유쾌한 연기를 보면 케시 베이츠가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완벽하게 이해하고 소화한 다음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미모와 몸매를 바탕으로 육체과시형 배우들이 판을 치는 요즘 내면의 복잡한 심리와 지성에 바탕을 둔 연기를 하는 순수한 연기파 배우들이 더욱 귀중하게 생각된다. 케시 베이츠는 좋은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지성파 배우이며 그이의 완벽한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믿는다.

내면의 연기로 말하자면 제니퍼 제이슨 리도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영화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에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창녀로 연기를 했던 제니퍼는 나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그이 역시 1994년 최우수 여배우로 선정되었으며 1995년에 영화 조지아로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그이만의 개성있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영화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의 영화음악 가운데 ‘a love idea’는 내 영혼을 흔들었다고 말할 만큼 아름다운 곡이었다. 이 곡과 함께 제니퍼의 연기도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니퍼는 케시 베이츠만큼 충격을 주지는 못했다. 아직 그가 출연한 영화를 몇 개 못본 탓도 있지만 좋은 배우라는 인상 외에는 아직 이렇다하게 마음을 파고들지 못하고 있다.

이 두 주연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이니 나로서는 너무나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내용이 어떻든 케시 베이츠만 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갔을 것이다. 나는 영화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바로 감독을 보는 것이다. 어떤 감독이 어떤 영화를 만드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소설가의 이름을 보고 책을 사듯이 영화는 영화감독의 이름을 보고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기준은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옳다고 믿는다.

그런데 예외가 있다면 바로 케시 베이츠와 같은 배우 때문이다. 케시 베이츠에게 보내는 나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애정은 바로 그의 연기력에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 배우의 연기력을 완벽하게 믿는 것도 힘들지만 나는 케시 베이츠를 무조건 신뢰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케시 베이츠를 믿고 사랑하는 것 때문에라도 갔겠지만, 이 영화의 원작자가 바로 스티븐 킹이라는 사실이 또 나를 들뜨게 했다. 스티븐 킹이 누구인가? ‘미저리를 쓴 작가이고 쇼생크 탈출을 작가가 아니던가. 나는 영화 미저리를 보고 나서도,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고 나서도 스티븐 킹이라는 작가를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았었다. 그저 글 잘쓰는 추리소설가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에 어느 통신망에서 스티븐 킹이 쓴 소설 쇼생크 탈출을 구해서 읽을 기회가 있었다. 어떤 분이 애써 영문을 한글로 번역해 놓은 것이었는데, 분량도 만만치않았다.

그 소설을 읽고나서 나는 스티븐 킹을 단순한 추리작가로 여기지 않고 아주 훌륭한 작가로 인정했다. 스티븐 킹은 존경할만한 작가이다. 소설 쇼생크 탈출을 읽으면서 나는 영화보다 훨씬 더 많은 감동을 받았으며 영화를 볼 때보다 더 많은 상상과 자유의 갈망을 꿈꾸게 되었다. 이렇게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라면 분명 훌륭한 작가이다. 그를 단순히 대중작가로 치부해버리기에는 그의 작품이 너무 좋았다.

원작 소설의 훌륭함과 함께 뛰어난 명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를 안본다는 것은 영화와 철천지 원수지간이 아닌 다음에야 거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영화는 상영시간이 무려 2시간 15분이나 된다. 135분나 되는 긴 시간동안 스펙타클하지도, 폭력이나 섹스가 난무하지도, 스피드와 환상이 나타나지도 않는다. 어찌보면 아주 심심한 영화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2시간 15분이 마치 한30분 정도 지난 것처럼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빠르게 흘러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까닭일까.

이 영화의 원작 소설인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가지고 있는 탄탄한 구성력이 먼저 떠올랐다. 원작이 훌륭하면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당연히 그보다 더 탄탄한 구성력을 가지게 된다. 순서는 영화에 맞게 바뀌지만 당연히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해 원작과는 다른 형태를 보이게 된다. 소설과 비슷하게 이 영화에서도 문제를 던지고 하나씩 풀어나가는 추리기법을 동원했다.

주인 마님인 베라의 살인범으로 몰리는 돌로레스, 돌로레스를 구속하기 위해 사건을 맡은 존 매키 형사, 돌로레스의 딸인 셀레나를 사건에 끌어들이는 것도 역시 존 매키였다. ‘베라의 살인사건을 계기로 15년만에 고향을 찾은 셀레나, 그리고 18년 전에 발생했던 돌로레스의 남편이자 셀레나의 아버지 의문의 실족사가 함께 물리면서 사건은 혼란과 미궁 속에 빠진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이 상당히 적은 편에 속한다. 돌로레스, 그의 딸 셀레나, 돌로레스의 술주정뱅이 남편, 부자집 마나님 베라, 형사 존 매키가 거의 전부이다. 이들이 길게는 25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동시에 연기하는 것이다. 조연으로 나오는 마님 베라역을 맡은 쥬디 파피트의 연기도 상당히 인상 깊었다. 젊은 마나님에서 중풍든 늙은이까지 상당히 어려운 역을 자연스럽게 해냈고 이지적이고 냉정한 차가움에서 점차 돌로레스의 친구로 바뀌는 그 따뜻한 인간성의 표현이 마음 아프면서도 감동을 주었다. 또한 정의의 화신인 존 매키 형사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플로머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바로 일곱 아이의 아버지인 폰트랩 대령 역을 맡았던 유명한 사람이다. 연륜이 있는 만큼 연기력 또한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주고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몇 개의 함정과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아주 자세하게 논의하는 것은 이 글의 한계로 접어두고 간단하게 짚고 넘어가자. 먼저, 여성의 우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만큼 여성의 입장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다. 영화에서 여성의 우정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25년 전에 돌로레스는 부자집의 하녀로 들어간다. 주인마님은 물론 베라이다. 이 둘은 당연히 주인과 하녀의 사이로 시작한다. 하지만 겨울 여행을 떠났던 베라와 남편 잭은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베라만이 돌아오게 된다. 그전에 설정된 내용은 베라의 남편 잭이 아내에게 무관심하고 애정도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베라가 돌로레스를 완전히 신뢰하게 되었을 때, 베라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 돌로레스가 몇 년동안 푼푼이 모아두었던 돈을 은행에서 빼낸 술주정뱅이 남편이 딸인 셀레나까지 성폭행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돌로레스는 그 충격 때문에 깊은 절망과 슬픔에 잠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본 세라는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말하라고 설득하고 돌로레스의 말을 들은 베라는 자신이 어떻게 남편을 죽였는지 말한다. 그리고 더 큰 사랑을 위해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돌로레스를 위로한다.

관객은 이미 모든 정황을 알아차린다. 베라는 잭의 차브레이크를 고장낸 다음 교통사고로 죽은 것처럼 만들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베라는 돌로레스의 술주정뱅이 남편을 죽이라는 암시를 한다. 두 여자의 우정은 이렇게 같은 고통을 이해함으로써 이루어진다. , 동일한 대상, 남편이라는 남성지배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한 공감대를 통해 여성의 우정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15년 전에 집을 떠나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조차 하지 않았던 딸 셀레나와 돌로레스의 우정이다. 두 사람은 모녀사이지만 딸은 엄마를 증오하고 있었다. 엄마가 아버지를 살해했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오해는 엄마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풀리게 된다. 셀레나는 엄마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감수해야 했는지 마침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두 사람의 화해로 이 사건은 행복한 결론으로 나아간다.

여성의 우정이 영화의 한 축을 이루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남성들은 폭력을 통해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지배를 드러내고 있다. 돌로레스의 남편은 술주정뱅이에다 아내를 구타하는 전형적인 악당이다. 게다가 아내가 푼푼이 모은 딸의 장학금 통장을 털어서 도박과 술로 날리거나 딸을 성추행하는 인간쓰레기이다. 결국 아내의 꾀임에 빠져 죽음을 당하지만 그의 죽음을 아무도 동정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돌로레스가 은행에 쫓아가서 은행장에게 따질 때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온다. , 돌로레스는 자신이 여자였기 때문에 남편이 자신 몰래 통장을 해약할 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만일 남편의 통장을 몰래 돌로레스가 해약하려 했다면 당장 전화를 걸어 확인했을 것이라는 말을 한다. , 모든 남성은 여성을 얕잡아보거나 우습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폭로되고 있는 것이다.

사건을 추적하는 형사도 마찬가지이다. 30년동안 86건의 살인사건을 맡았던 존 매키 형사는 그 가운데서 85건을 해결했다. 정말 훌륭한 형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단 한 사건, 바로 18년전 돌로레스의 남편이 실족사한 사건에 대해서는 살인사건이 아니라 실족사로 처리를 하고 말았다. 심증은 있지만 물증이 없기 때문에 돌로레스를 기소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사건 이후 존 매키 형사는 자신의 명예에 오점이 남았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베라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돌로레스의 사건을 맡는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돌로레스를 살인자로 몰아가려는 존 매키 형사의 태도는 마지막에 셀레나의 날카로운 기자 본연의 모습이 나오면서 참담하게 무너진다.

이 영화가 가지는 또 하나의 아름다움은 영상에 있다. 영화는 영상의 미학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스토리와 주제가 아무리 좋아도 영상이라는 구체적인 표현이 아름답지 못하면 실패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매우 신선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한 장면에서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데, 컬러를 달리해서 과거와 현재를 구분하고 있다. 또한 이미지의 흐름이 동일한 현상, 이를테면 문을 닫는다든가 커피를 마신다든가 하는 행위에서 연속적으로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고 있어서 자연스럽고 흥미있게 보였다.

135분동안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흥미진진하고 감동에 젖어 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들려면 적어도 이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없이 많은 오락용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영화가 사회와 역사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영화는 단순히 오락의 기능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인간의 내면을 드러내서 감정을 정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단순히 감정을 정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현실에 대한 심각한 발언을 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사회를 개혁하고 변혁하는 도구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긍정적인 의미에서 이 영화는 삶의 내면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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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령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레나토 살바토리 외 출연 / 디비존필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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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계엄령을 보고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영화가 하나 더 들어왔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영화였다. 그의 작품 실종 뮤직박스는 비디오로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우선 이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적어본다.

이 영화는 1973년에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 영화는 그 이전의 사실을 담고 있다. 1967년의 우루과이. 지금도 그렇지만 제3세계에 대한 미제국주의의 공작이 매우 활발하던 시기이다. 브라질, 칠레, 쿠바, 산타도밍고 등 남미의 여러나라에서 이미 혁혁한 전과를 올린 미제국주의의 CIA와 군부독재정권은 민주세력이 활발한 지역에서 그 지도자나 조직을 와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화면이 열리면서 황폐한 도시의 음산하고 음울하고 불안한 모습이 드러난다. 버려진 차, 더럽고 낡은 건물들, 그리고 점차 소음이 가득차면서 도로를 메운 차량과 사람들, 군인, 경찰, 무전기를 든 기관원의 모습이 섬뜩하게 보인다. 가끔씩 총소리가 들리고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군인들에게 수색을 당하고 차량도 모두 열린 채 철저하게 수색한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불안과 공포 속에서 검문을 당하고 있다. 공포와 불안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수색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이유는 미국인 필립 미카엘 산토르를 찾기 위해서이다. 그는 브라질 영사와 함께 납치되었다. 두 사람을 납치한 조직은 투마파로스(민족해방운동)’이고 군부독재에 반대하여 투쟁하는 민중조직이다. 그러나 결국 산토르는 차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다. 우르과이 군사독재정부는 일개 민간인 신분의 미국인을 위해 국장을 치른다. 또한 민간인의 장례를 국가의 임시공휴일로 하고 총리를 비롯한 국가의 고위인사와 군사령관 등이 모두 참석하는 이상한 현상을 보여준다. 산토르는 미국민간개발국의 경제조사원이라는 민간인 신분이었다.

화면이 바뀌고 시간은 산토르가 납치되는 것으로 다시 시작된다. 산토르는 납치되어 어느 지하실에 감금되고 민족해방운동의 요원들에 의해 심문을 당한다. 처음에는 완강하게 모든 것을 거부하던 산토르도 민족해방운동에서 제시하는 완벽한 증거물들을 보면서 모든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자신의 정체와 역할을 모두 시인하는 것이다. 산토르는 민간인도 아니고 민간개발국의 경제조사원도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파견된 고문,파괴,납치,암살,선동,첩보, 등을 교육하는 전문 기술자이며 지휘자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남미의 여러나라들을 돌아다니면서 군사쿠데타를 지원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학생운동,노동운동,재야인사,종교인 등을 암살하고 그 조직을 와해시키는 역할을 맡아서 경찰을 지도해왔던 것이다.

미국은 참으로 위대한 나라이다. 그들은 반공의 이름으로 군사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제3세계 민중의 삶을 갈기갈지 찢어놓았다. 특히, 경찰을 통해 민중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민주주의 조직을 와해시키고 그 지도자를 암살하거나 학살하는 방법을 과학적으로 가리킴으로서 암살과 납치의 피묻은 손을 자랑하는 위대한 국가인 것이다.

3세계, 특히 남미의 군사독재정권의 잔인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에 비하면 금메달과 은메달을 놓고 다툴 정도이지만 그들의 잔임함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은, 정권 자체의 부도덕성에서 나오는 것도 있지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미국의 지도에서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미국은 군사독재정권에게 민주지도자들을 잡아서 어떻게하면 더 효율적으로 고문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기 위해 경찰에서 공공연히 고문강의를 하고 경찰이나 군간부들을 미국으로 특별히 유학시켜 선동,암살,폭파,도청,고문 등에 대해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의 본 모습이다.

지금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다. 미국이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직도 남미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군사독재정권이 존재하는 나라가 상당수 있다. 미국은 이른바 민간단체를 통해 경제적 침략을 해오고 그 속에서 훈련된 전투요원들을 투입하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더욱 소름끼치는 것은 우리나라의 실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데에 있다. 경찰의 고문사건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원인모르게 학살되어 발견된 운동권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또한 이근안과 같은 고문전문가의 훈련을 보면서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경찰 속에 혹시라도 문민정부의 개혁의지에 반대하는 세력이나 조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근안이 잡히지 않는 것이 경찰의 무능 때문이라면 그것도 비난받아야 하지만, 혹시라도 같은 경찰이어서 비호를 해주는 것이라면 이것은 단순히 비난의 차원이 아니라 엄청난 음모이며 국민에 대한 도전인 것이다.

코스타 가브라스의 영화를 보면서 왜 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실정과 너무나 닮은 영화 속에서 나는 현실과 영화를 착각할 정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너무 비극적인 현실이다. 이런 비극적인 현실이 하루빨리 사라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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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 - 할인행사
스타맥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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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로스를 보고

 

극장표를 두 장 얻었다. ‘에로스라는 다소 에로틱한 제목의 이 영화는 한국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를 UIP영화를 상영하는 서울극장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아마도 영화수입을 위한 쿼터제 때문에 만든 영화인듯 하다. 사실 처음부터 이 영화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보고싶은 마음도 전혀 없었는데, 우연히 생긴 극장표때문에 보게되었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이다. 지금 한국영화의 수준은 작품성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얀전쟁이 그렇고 서편제가 그렇다. 매우 수준높은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영화의 질적인 수준을 높이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고있으며 한국영화의 발전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어서 고무적이다. 우리 영화를 우리 관객이 보아주지 않으면 뿌리를 내릴 수 없고 문화적 침략이라는 살벌한 용어를 굳이 쓰지않더라도 한국적 정서를 표현하지 못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따라서 한국영화는 미국과 같은 거대자본과 싸워 이길만한 수준높은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고, 관객들은 우리 영화를 아끼고 애정을 가지고 보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앞에서 당위적으로 한 이야기들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적용이 되는지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대다수의 한국영화들을 보면 이내 알 수 있다. 오늘 본 영화 에로스만 하더라도 도대체 이 영화가 왜 만들어져서 상영이 되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영화의 선정성 문제에 관한 시비와 논란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시대착오적이고 관객을 우롱하는 무조건적 벗기기 영화의 재탕으로 이 영화는 지금까지 나온 에로물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열악한 제작상황, 적은 자본, 소재의 제한 등 한국영화가 가지고 있는 많은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적은 자본으로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제작자의 심정도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여자 옷이나 벗기고 신음소리나 울린다고 관객들이 극장으로 몰려들 것으로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창작과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에로티시즘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옳은 이야기이다. 바로 그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는 것이 여자의 옷을 벗겨서 가슴을 드러내고 노골적인 성행위와 신음소리를 지르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도 옳은 말이지만, 광주민중항쟁이나 노동자의 파업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에서 완전히 질식해버리는 이 나라의 영화산업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은 어떻게 변명할 것인가.

이른바 창작과 표현의 자유라는 미명아래 영화 속에서 여성의 알몸을 드러내고 적나라한 성행위를 표현하는 저질 포르노물이 근사한 상품으로 포장되어 광고되고 있다. 물론, 여성이나 남성의 육체가 알몸으로 등장하거나 성행위의 노골적인 표현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봉건시대의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아니고 남녀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표현하는 영화를 도덕적으로 비난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의 노출은 그 영화의 줄거리나 주제에 맞게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서 만드는 이른바 에로물들의 대부분은 여성의 알몸을 필요이상으로 과장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성의 상품화이다.

영화산업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철저하게 자본의 논리에 적응하는 첨단산업이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다. 따라서 영화의 주제나 소재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체제에 비판적인 내용이나 변혁을 주장하는 영화들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설령 만들어졌다해도 공권력에 의해 상영이 금지되거나 필름이 몰수된다. 우리는 그 확실한 예를 많이 보아왔다. 그렇기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돈을 투자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이윤을 보장할만한 영화를 만들어야 하며 그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바로 을 상품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제작된 한국영화의 상당 부분이 과 관계된 영화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애마부인’‘’‘산딸기’‘변강쇠등으로 대표되는 에로티시즘영화.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배경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우선, 표현의 자유에 대한 보이지않는 통제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 민중의 의식을 일깨우는 내용들은 만들어질 수 없으며 소수의 영화인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해도 상영되지는 못한다. 극히 소수만이 그 내용을 알 뿐이다. 이것은 권력이 부패한 나라일수록 심한데, 우리나라의 경우 군부독재시절에는 폭력적으로 소재의 제한을 막았다. 물론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매체에서 체제비판적인 내용은 다룰 수가 없었다.

두번째는 자본의 빈곤이다.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영화를 한편 제작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우리나라 돈으로 수백억, 수천억원이라고 한다. 이렇게 돈을 퍼부어서 만든 영화는 질이 좋을수밖에 없고, 흥행에도 성공을 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영화는 극소수의 영화를 빼고는 자본력이 없어서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지 못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적은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영화는 제한적이고,그나마 가장 손쉬운 것이 사랑 의 문제를 다룬 영화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오락기능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의 상품화이기 때문이다. 한국영화가 에로물을 만드는 것은,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때의 흥행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이 영화가 비디오테이프로 담겨서 일반 가정까지 배달되었을 때의 흥행성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한국영화의 에로물을 유치하고 조잡하며 한심한 것으로 생각하고 영화관까지 일부러 찾아가서 볼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하지만 관객들이 개별화되는 가정에서는 은밀하고 선정적인 것을 즐겨 찾는다. 한때 여관 등에서 포르노 비디오테이프를 상영하지 않으면 손님이 줄어든다는 사실과 가정에서 비디오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곧 음란비디오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때, 개별화된 사람들은성의 상품화에 매우 집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동네마다 몇 개씩이나 되는 비디오 대여점의 한국영화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이른바 에로물임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골적인 성행위를 표현하는 이런 에로물이 제작자와 수요자 즉 관객과의 완전한 합의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원칙에는 수요가 있으니까 공급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수요라는 것은 조작에 의해서도 만들어진다. , 다른 대체물이 없기 때문에 수요가 발생하는 것이고, 수요가 발생하도록 상황을 조작하는 것이다. 전두환 독재정권이 들어서면서 유명하게 된 이야기 가운데 ‘3S 정책이라는 것이 있다. 이른바 스포츠,섹스,스크린이라고 불리는 이 세 가지 정책은 민중의 우매화를 위한 정권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노태우정권하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별로 변한 것같지 않다.

권력을 잡은 소수는 변화를 바라지 않고 다수의 민중들이 우매하게 따라주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런 정책을 입안하게 된다. , 포르노에 가까운 영화들은 자본의 영세성에도 그 원인이 있지만 권력과의 역관계에 더 큰 비중이 있는 것이다.

대중매체의 중요성과 그 기능의 정치성, 즉 이데올로기성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적을 한 이효성 교수의 글도 있거니와 다른 모든 매체들과 함께 영화는 대중들의 정서를 좌우하는 중요한 매체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영화의 선정성은 비판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소재의 제한과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고 다양한 주제와 표현들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 가운데 성에 대한 예술적 표현과 음란물에 대한 논란이 가능할 것이며 한국영화의 수준도 질적으로 발전할 것이다. 현재의 이같은 영화산업 구조 속에서는 한국영화인의 일부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고 있다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속으로 썩어들어가는 늪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는 알몸을 드러내고 성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의 발길을 잡으려는 유치하고 구태의연한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영화의 발전에 대한 일차적인 노력은 영화인들이 스스로 노력하고 싸워서 권리를 찾아야 하며 그러한 노력이 있을때, 관객들은 한국영화를 찾는 것으로 격려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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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디가드 SE - [할인행사]
믹 잭슨 감독, 케빈 코스트너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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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디가드를 보고

 

워너 브러더스에서 만들어 보급한 직배영화 보디가드는 주연을 맡은 배우들이 미국 최고의 스타들이라는 점에서 일단 흥행 성공을 보장하고 있었다. 영화 늑대와 춤을,꿈의 구장 등에서 화려하게 국내 무대에 등장한 캐빈 코스트너와 미국 최고의 흑인 여가수 휘트니 휴스턴이 나오는 이 영화의 주제는 간단하다.

극중에서 유명한 가수로 등장하는 레이첼(휘트니 휴스턴)에게는 보디가드가 필요했고, 미국 대통령 경호원 - 그 미국 대통령이 레이건으로 나온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캐빈 코스트너는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부시를 지지한 우익 보수주의자이다 - 으로 있다가 레이건이 총상에 맞는 사건 때문에 해고 당해서 밥벌이로 개인 경호원을 하고 있는 케빈 코스트너가 보디가드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사랑이 싹트고 휘트니 휴스턴을 살해하려는 암살자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이들의 사랑이 정점에 이른다는 조금은 신파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신파적이었지만, 이 영화가 던져주는 충격은 다른 어느 영화보다 강했다. 그것은 본래 허리우드 영화가 그렇듯이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물량공세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그 물량에 압도 당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해도, 그 밖에도 심상치 않은 조짐을 몇 가지 더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말 이 영화는 엄청난 돈을 들여서 - 물론, 터미네이터처럼 고도의 컴퓨터 그래픽이나 특수장치들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보다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국내 영화에 비한다면 천문학적 숫자의 돈이 들어간 것은 분명할 것이다. - 만든 영화였기 때문에 화면으로 관객을 압도하고 있다. 그 화려하고 열정적인 음악, 현란한 영상, 베버리 힐즈의 최고 부자들이 살고 있는 집안의 정경 등등 경제식민지 국민들을 기죽이는 장면은 어디에고 있었다.

이처럼 미국 자본의 막강한 위력이 드러나고 있는 영화 속에는 보이지 않는 또다른 엄청난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서 백인과 흑인이 차지하고 있는 존재방식의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인종차별을 겪고있지 않은 동양권에서는 그리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인종문제가 왜? 3세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알아보자.

이 영화가 가진 고도의 이데올로기는 흑인 여가수 - 흑인이며 여가수란 점을 명심해야 한다 - 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보디가드로 백인을 등장시키고 있다. 생각하지 않고 보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이 캐릭터의 배치는 사실, 무서운 음모일 수 있다.

현재 미국에는 약 1천만 명이 넘는 흑인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대단히 열악한 상태에서 많은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백인 우월주의가 19세기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아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으며 흑인의 고통은 오늘날 로스엔젤레스 폭동과 같은 형태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극히 소수의 흑인들 - 마이클 잭슨, 휘트니 휴스턴, 영화배우 에디 머피 등 - 은 그들의 재능을 팔아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 이런 소수의 흑인 부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든 다음, ‘어메리칸 드림을 외쳐대는 것이다. “, 봐라. 너희들도 노력하면 저렇게 잘 살 수 있다.” 흑인들은 자신들의 정치, 경제적 존재에 대해서는 알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저 어떻게 하면 일확천금을 잡을 수 있을까 하고 꿈 속을 헤매이게 되는 것이다. 물론 흑인들 가운데도 지성인이 있고, 사회운동을 하거나 마르크스주의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 역시 올바른 인간 평등의 자세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없지 않다. 지난번 로스엔젤레스 폭동 때만 해도 흑인 지도자라고 하는 인물들은 무조건 흑인을 감싸고 돌았을 뿐, 객관적인 문제조차 시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의 이데올로기인 어메리칸 드림에 속아 미국으로 몰려들어간 제3세계 민중들의 삶은 어떠한가. 멕시코에서, 남아메리카에서, 동양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갔고 극히 소수는 성공을 했다. 그러나 미국은 현재 인구의 2%가 전체 부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백인들은, 영화나 텔레비전 속에 흑인을 등장시키고 그들과 백인들이 평등한 존재라고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첫번째 이 영화의 이데올로기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미국의 백인들. 지금 미국의 현실이 과연 그런가.

다음의 이데올로기는 남성과 여성의 성차별에서 오는 이데올로기이다. 이 영화가 얼마나 여성을 모욕하고 있는지 영화를 보고난 다음 깨달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것은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백인 여성이었어도 마찬가지였겠지만 흑인이기 때문에 더 왜곡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여주인공 휘트니 휴스턴은 영화 속에서도 최고의 스타이다. 그런 스타가 자신의 보디가드에게 반해서 유혹을 하고, 동침을 한다. 물론, 직업을 떠나서 사람이기 때문에 반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든지 인정한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는 백인 여자가 일정 정도의 배역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없다. 조연인 휘트니 휴스턴의 언니도 케빈 코스트너를 유혹한다. 비록,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기는 하지만 남성인 케빈 코스트너는 이러한 유혹을 당당하게 물리치고, 자신의 직업인 보디가드를 냉철한 이성으로 계속해 나간다., 여성은 직업을 가진 여성이건 직업이 없는 여성이건, 사랑에 빠지면 정신을 못차리는데, 남성은 매우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는 것을 은밀하게 전달하고 있다. 이 주장의 크라이막스가 바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휘트니 휴스턴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출발하려는 순간 다시 비행기에서 내려와 케빈 코스트너에게 안기는 장면, 우리는 유치하고 신파라고 웃었지만, 가만히 보면 여성의 나약함, 감정적인 면과 남성의 우월함, 이성적인 면, 가부장적 존재(가부장적 존재는 언제나 듬직하고 기대고 싶은 충동이 드는 존재이다)로서 느끼게 되는 것을 부각시키고 있다.

위의 내용이 미국의 사정과 일반적인 얘기라면 우리, 3세계 민중들에게 보여지는 이 영화의 중요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먼저 제국주의의 문화적 침투를 들 수 있겠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만들어졌고, 미국 영화배우와 가수를 배우로 사용했다. 제국주의적 문화침략에 관한 경계와 문제제기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정말이지 미국은 온몸으로 제국주의적 문화와 자본을 침투시키고 있다. 자신의 나라에서 인기있는 스타들을 등장하는 것은 외국사람, 특히 동양의 제3세계 민중들로 하여금 막연한 동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게 하는데 충분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바로 그 문화, 즉 양키문화를 여과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교두보가 되는 것이다. 불쾌하기는 했지만, 이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앞에서 바로 이 영화 보디가드의 주제가를 부른 휘트니 휴스턴의 테이프와 음반이 잘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 다시한번 절실하게 느꼈다.

미국의 문화상품이 잘 팔리는 것은 물론이고 제3세계 민중들의 의식이 미국식=양키식으로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뀌는데 큰 몫을 하는 것이 바로 영화이고보면 미국 직배영화가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털어서 미 제국주의 영화사에 바치면서도 그저 좋다고 깔깔거리고 있다. 우매한 백성들은 탓해야 할까. 아니면 제국주의의 막강한 화력(문화적 자본)을 원망해야 할까.

그저 오락영화 한편을 보고 이렇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고민하게 되는 나의 과잉된 자의식을 탓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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