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일기 - 묻힌 기억을 끄집어내는 민간인 학살의 기록
박건웅 지음 / 우리나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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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일기 - 박건웅

잠자기 전에 조금이라도 책을 읽고 자는 습관이 있는데, 어제는 막 도착한 이 책을 손에 들었다. 몇 페이지만 읽으려다 그만 다 읽고 말았다. 80년대 중반 그러니까 20대 중반에 선배들과 사회과학 공부를 할 때 정치, 경제, 철학, 역사를 집중해서 공부했는데, 한국근현대사도 그때 기본을 배웠다.
한국 역사-통사-를 처음 배울 때, '민중사'의 관점으로 배우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지배자의 관점으로 쓴 역사이거나, 친일 역사의 관점으로 쓴 역사를 배우게 될 가능성이 높다. 역사는 정치와 뗄 수 없으며, 정치는 경제와 뗄 수 없는 관련이 있다는 걸 바탕에 깔고 공부해야 한다.
특히 한국 근현대사-1984년 동학혁명부터 1987년 노동자대투쟁까지-를 올바르게 공부한 사람이라면, 결코 일베충이나 친일매국노가 될 수 없다. 지금 일베충과 친일매국노, 민족반역자들이 날뛰는 건, 그들이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학교 교육이 그만큼 부실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건 영어, 수학 따위가 아니라 역사여야 한다. 일제강점기 시기 친일매국노의 범죄와 독립운동가들의 처절한 항쟁, 해방 이후 이승만 도당의 독재와 만행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비뚤어진 역사인식을 가진 일베충과 매국노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보도연맹 학살 사건은 아직도 전체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이승만 정권의 최대 학살 사건이자 한국현대사에게 가장 비극적인 학살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에 벌어졌지만, 이 학살 사건과 한줄로 연결되는 또 다른 학살 사건인 '제주4.3'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1947년 3월부터 시작된 제주4.3 봉기는 제주 경찰이 3.1만세운동 기념식에서 무고한 시민에게 총을 쏴 학살한 사건을 기점으로 시작되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이후, 제주도에는 인구가 급격히 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돈을 벌러 갔던 제주도민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기 시작한 것이다.
1947년 무렵 약 30만 명에 이르렀던 제주도민 가운데 당연히 다양한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공산주의자, 남로당원도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에서 남로당을 '토벌'한다는 목적을 갖고 군대를 투입했고, 이건 다시 1948년 '여수, 순천 사건'으로 연결된다. 
즉, 1950년 6월 25일, 공식적으로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한국전쟁과 그 직후 벌어졌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 이전에 이승만과 극우집단은 대구10.1 사건(1946년), 제주4.3(1947년), 여수, 순천 사건(1948년) 등 일련의 조선노동당과 공산주의자, 진보적 지식인, 노동자들이 일으킨 봉기를 폭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이미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 노동자, 지식인은 물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 전력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보도연맹'을 조직한다. 보도연맹을 기획, 관리한 자들은 한때 좌익 활동을 하다 전향한 배신자들과 극우, 친일매국노, 북한에서 내려온 개신교도 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이 주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권은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을 '예비 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불법 체포해 감옥이나 큰 건물에 몰아 넣었고, 그렇게 잡아온 사람들을 '체계적'으로 학살했다. '악마의 일기'는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그린 그래픽노블이다. 이 작품의 원작은 박만순 선생님의 저작 '기억전쟁'임을 작가가 밝히고 있다. 작품은 여러 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연작이지만 하나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다락방
해방
창고
이름
목총
귀신
외무덤
삼형제
두 얼굴
호환
만세
순이
만남
기억
증언

작품의 형식을 보면, 작가는 그림 형식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창고'부터 '순이'까지는 의도적으로 어린이가 그린 듯한, 서툰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 부분은 실제 학살 장면이 등장하고,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의 만행이 잔혹하게 드러나는 장면이 많아서 오히려 의도적으로 그림을 서툴게 표현함으로써 공포를 누그러뜨리지만, 어린이의 시각으로 보는 듯한 솔직함으로 이승만 정부가 국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장치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제목처럼, '창고'에서 '순이'까지 보도연맹 학살의 직접 내용은 한 소년의 일기처럼 기록되었다. 우리가 어렸을 때 그림일기를 쓴 형식을 따라 윗부분에는 그림을 그리고, 아래는 내용을 적는 형식이다. 그림은 단순하고, 내용은 짧고 간략하게 생략되어 있지만, 독자는 오히려 그 간략한 형식의 그림과 짧은 내용만으로도 사건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앞부분 '다락방'과 '해방'에서는 주인공 '육삼이'의 이야기와 그가 '악마'가 되는 과정을 그린다. 일제강점기 시기, 어린이였던 육삼이는 햇볕을 보면 몸이 불타는 듯한 고통에 시달리는 병이 있어 다락방에서 지낸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자, 아버지가 목사였지만 몸에 666 문신을 새기고 나왔다고 해서 부모도 그를 '악마'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육삼이는 가장 친한 친구 필순이와 사이 좋게 지내면서 행복한 시기를 보내지만, 자기 뜻과는 상관 없이 보도연맹 가입자들 속에 묻혀 들어가 군인에게 학살당하고, '악마'로 부활한다. 그리고 그는 '창고'부터 '순이'까지 이승만 정부가 저지른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목격하고, '만남'에서 전쟁이 끝나고 4.19혁명이 일어난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승만을 찾아간다. 이승만은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저지른 잔혹한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후 박정희 군사쿠데타, 전두환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는 한국현대사가 압축되어 나타나고, 1987년 민주항쟁이 그려진다.
'기억'에서는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이 나오고, 세월호 참사가 기록된다. 악마가 된 육삼이는 자신이 살았던 고향에 가 보지만, 고향은 골프장으로, 아파트로, 모텔로, 대형 교회로 바뀌었고, 사람들은 과거를 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박근혜가 탄핵당하고, 육삼이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666이 사실은 999 즉 '은하철도 999'의 철이였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기의 보금자리였던 다락방 속으로 들어가 엄마를 만난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영혼으로 사라진 육삼이를 보도연맹 발굴단이 학살당한 사람들이 묻힌 곳을 파헤쳐 육삼이의 유골을 발견한다.
'증언'에서는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학살한 당사자 가운데 용기 있는 한 사람의 증언을 통해, 보도연맹 학살 사건이 단순한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서 치밀하게 기획하고 실행한 계획된 학살 사건이라는 것을 밝힌다.

박건웅 작가는 한국현대사의 비극을 꾸준히 그래픽노블로 작업하고 있다. '꽃' '노근리 이야기' '홍이 이야기' '어느 혁명가의 삶' '짐승의 시간' '그해 봄' '제시 이야기' '예안송' '아리랑' 그리고 이 작품 '악마의 일기'까지 어느 한 작품 소홀할 수 없는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대목을 그리고 있다.
나는 박건웅 작가의 작품을 초, 중, 고등학교 역사 교재로 써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역사책을 읽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래픽노블로 만든 작품들은 청소년이 읽기 쉽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정식 교재로 쓰지 못한다면, 보조 교재로 청소년들이 꼭 한번씩은 읽을 수 있도록 학교도서관에 배치하고, 선생님들이 추천해서 - 사실, 선생님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 청소년들이 이 일련의 작품들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토론을 하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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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해
이윤길 지음 / 신생(전망)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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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해 - 이윤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익명이다. 작가는 본능적으로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던 걸까.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 1기관사, 조기장 '심근수'만 유일하게 이름이 나오지만, 정작 그는 조선족 조리장에게 살해당한다.
선원들의 익명은 그들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들이 탄 배의 이름이 '피닉스호'라는 것에서, 그들의 운명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은 43년이나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빈 작가의 경험과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귀중한 소설이다. 한국은 삼면이 바다이면서도 올바른 해양정책이나 해양문학이 뿌리 내리지 못한 기형적 형태를 갖고 있는데, 특히 '해양문학'은 저변이 좁고 얕아서 하나의 장르나 범주로 구분하기도 불가능할 정도로 부박하다.

작품은 원양어업, 그것도 대서양이나 북태평양이 아닌, 남극해로 떠나는 원양어업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피닉스호'는 뉴질랜드의 수도 웰링턴을 출발한다. 갑자기 빈 자리가 된 기관장을 부산에 사는 박 기관장을 불러야 했고, 그가 부산에서 뉴질랜드로 오는 길이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웰링턴을 출발한 피닉스호는 남위 60도까지 내려오면서 남극수렴선까지 오는데만 20일이 걸린다. 이 기간동안 배에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박 기관장의 과거 회상이 나오고, 강 사장이 '피닉스호'를 끌고 다시 바다로 나오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급격하게 바뀌는 날씨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배는 큰 문제 없이 남극해로 향하고, 피닉스호는 남태평양에서 대권항해를 하며 '케이프 혼'을 지나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이곳에 킹 조지섬이 있다)를 통과하면서 웨들해로 들어선다.
소설의 중반부터 피닉스호 선원들은 조업을 시작한다. 이들이 잡는 물고기는 '남극이빨고기'로 값이 비싼 물고기다. 그만큼 잡기 어렵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한번 출항에 만선을 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강한 유혹이 있는 어업이기도 하다.
다국적 선원으로 구성된 피닉스호의 선원들과 선주를 비롯한 선장, 기관장 등이 모두 한국인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일종의 '외인부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소설에서 다수의 선원들은 배경으로 처리되고, 박 기관장, 강 사장, 장 선장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점이 조금 아쉽다.
선원들이 서른 명이 넘기 때문에, 이들을 소설에서 모두 소개하거나, 이들의 서사를 나열하는 것이 자칫 지루할 수 있지만, 적어도 대표적인 인물 몇 명의 서사를 풀어 놓으면서, 주인공 세 사람의 서사와 얽히도록 하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설 중반까지는 피닉스호가 출발해서 남극해로 들어서기까지 과정을 그리고 있다. 원양어선에서 일어나는 일은 독자에게 낯설기 때문에, 작가는 친절하게 상황과 내용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결코 지루하지 않다.
허먼 멜빌의 '백경'이 그렇게 두꺼운 소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다를 항해하는 배와 선원에 관한 설명을 가능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 기록이 당대의 선원의 삶과 배에서의 생활, 배의 기능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어 기록으로의 가치가 매우 높다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 알게 된다.
이렇듯, 작가는 구체적인 사건-투승과 양승-이 발생하기 전에 선원들과 배의 운명을 가능한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피닉스호가 웨들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시투(첫번째 시험 투승)를 할 때부터는 팽팽한 긴장을 느낄 수 있는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바뀐다.
끊임없이 떠내려오는 유빙과 싸워야 하고, 심해 1,000미터 아래 살고 있는 남극이빨고기를 낚아 올려야 하는 부담과 압박으로 선주는 물론 선장 이하 모든 선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며 날카로운 남극의 바닷물을 뒤집어 쓰면서 고통스러운 육체노동을 하는 장면은, 원양어업의 고단한 현실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고 있다.

피닉스호 조업을 나선 이후, 네 번의 사고가 발생한다. 출항 초기에 선원 아만의 손가락 부상, 조기장 심근수의 부친상, 조선족 조리장의 살인 그리고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르는 기관실 화재가 그것이다.
이 사건들이 하나의 인과로 묶이지는 않지만, 주인공 박 기관장은 피닉스호에 타는 순간, 자신이 다시는 육지에 발을 디디지 못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을 받는다. 아니, 좀 더 명확히 표현하자면, 육지에 발을 디디고 싶지 않다는 의지인지 모른다.
그는 배의 엔진을 수리하는 기술자로 먹고 살았지만, 자신이 선원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그가 육지에서의 삶이 실패했다고 생각한 것은, 육지-현실-의 삶이 자신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는데, 그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육지가 '현실'이라면, 바다는 '이상'이자 '희망'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 '선연'을 떠난다. 그가 이미 아내와 이혼한 것처럼, 그는 '현실'에 안주할 수 없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는 육지에서 사업하며 사람들과 부대끼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인간의 욕망과 이기, 탐욕에 환멸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뛰어난 기술을 인정받고, 돈도 벌 수 있었음에도, 강 사장이 자기를 부르자, 모든 것을 버리고 - 심지어 사랑하는 어머니마저도 홀로 두고 - 바다로 나온 것이다.

독자는 한국문학에서 낯선 해양문학인 이 작품을 읽으면서 바다, 원양어업, 뱃사람, 남극에 대해 풍부한 상식을 얻을 수 있다. 가능하다면 구글 지도를 펼쳐놓고, 이 작품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보면서 읽으면 훨씬 재미있다. '케이프 혼'을 돌아 '사우스셰틀랜드 제도'로 지나면 곧바로 웨들해가 나오는데, '웨들해'는 실제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섬'까지 빨리 가도 5일이나 걸리는 거리인데, 지도에서 보면 그 거리가 실감난다. 가장 가까운 곳에 '킹 조지 섬'이 있고, 이곳에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과학기지가 있다. 
작가는 현직 선장으로 세계의 모든 바다를 누빈 풍부한 경험으로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바다를 그리고 있어서 작품의 사실성을 핍진하게 채우고 있다. 이런 바다의 묘사들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표현하기 어려운 장면들이라는 점에서, 해양문학은 '르뽀르따주'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피닉스호의 운명은 너무 갑작스럽고 우연하게 결정되는데, 그것이 매우 사실적이라 해도, '소설적 완결성'을 말할 때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선상 반란과 선상 살해사건 등이 언론에서도 보도된 바 있지만, 이 작품에서도 선원(조리장)의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 살인 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은 직접 관련이 없다. 차라리 심각한 살인사건과 피닉스호의 운명을 연결지을 수 있는 새로운 사건을 도입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원들은 모두 익명으로 등장하며, 주인공들과 사건의 배경으로만 보이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선원들의 갈등과 선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피닉스호의 운명을 가름하는 것이었다면 좀 더 드라마틱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앞부분에 선원들 가운데 몇 명이라도 서사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바 있다.

한국 문학에서 해양문학은 퍽 귀한 존재다. 바다를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삶도 보편성을 띄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바다라는 특수한 배경에서 나오는 인간의 행동은 육지에서 살아가는 다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과는 분명 다르며, 그 다름이 특별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해양문학의 저변이 넓어지고, 작품이 깊어지면 바다와 바닷사람, 섬, 어촌, 어업을 바라보는 뭇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질 것이고,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남극해'는 바다와 바닷사람의 삶을 과장하지 않고 보여주며, 뱃사람의 고독, 외로움, 바다와 인간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전역하고, 사회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이 해양 전문 잡지사였다. 1985년 무렵이었는데, 그때는 해양, 어촌, 수산물 등을 다루는 잡지가 한국에 두 개밖에 없었고, 그 가운데 월간 잡지를 발행하는 한 곳이었다. 편집부 직원 두 명과 서무직원 한 명이 근무하는 잡지사는 열악했고, 사장은 잡지에 실을 광고를 가져오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때의 짧은 경험으로, 한국 정부가 바다에 기울이는 정책, 제도, 지원이 형편 없다는 걸 알았고, 한국이 경제, 문화, 산업적으로 시장을 키우려면 반드시 바다와 관련한 정책에 큰 관심과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지금 한국의 대기업 조선소는 세계 1위의 수주율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다와 관련한 산업은 보통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할 뿐 아니라, 경제적 가치도 매우 높고, 규모도 크다. 양식업, 근해조업, 원양어업 등 수산업은 물론이고, 어촌의 현대화, 어촌의 콘텐츠를 살려 소프트웨어 산업으로 육성하며, 수천 개의 섬을 역사, 문화 자원으로 삼아 지역 발전의 밑거름이 되게 만들 수 있는 방안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바다 산업은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해양수산부는 정부 부처에서도 힘이 약한 기관이고, 예산도 많지 않아서 필요한 사업을 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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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에코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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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에코 - 해리보슈 시리즈 1
    
마이클 코넬리의 장편 데뷔작. 이 작품에 대한 상찬은 다른 곳에서도 많으니,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 아쉬운 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로스엔젤레스 경찰국 소속 형사 '해리 보슈'는 불우한 인물이다. 그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엄마는 매춘부로 알려졌는데, 나중에 거리에서 강간살인 사건의 피해자로 죽는다. 이후 해리는 위탁가정에서 지내며 불우한 청소년 시기를 거쳐 베트남 파병 군인이 된다.
베트남에서 살아 돌아와 경찰이 되었고, 그는 형사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면서 언론의 관심을 받고, TV시리즈에 이름을 빌려주어 돈을 벌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으로 경찰청 본부에서 헐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된다. 이 작품은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우연으로 시작한다. 이 작품에서 '우연'은 이야기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연결되며, 사건의 배경이 된다. 살인사건 목격자 샤키가 동굴 입구에 있었다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그가 그 시간에 누군가 사체를 유기하는 장면을 목격하는 것은 과연 필연일까. 그리고 피해자 메도우스 사체가 그 동굴로 유기되는 건 필연이라고 하자. 메도우스와 해리가 베트남에서 같은 부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우였다는 건 어떤가. 이건 너무 기막힌 우연 아닌가.
그리고 하필 왜 이때 메도우스는 살해당했으며, 사금고와 은행을 터는 사건이 발생하는 시기가 이때였으며, 왜 이런 사건이 벌어진 걸까.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있던 FBI의 팀장 루크가 베트남에 있었다는 것, 해리의 베트남 동료들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 등은 모두 우연이다.
처음부터 완벽한 범죄를 기획했다면, 메도우스가 돈이 궁해 금고를 털었을 때 나온 팔찌를 전당포에 파는 일이 없도록 기획자이자 책임자-지금은 루크라고 해두자-가 면밀히 지켜보고, 관리했을 것이다.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큰돈이 될만한 재물을 손에 넣었으면서도 정작 그들은 모두 가난하게 지냈다. 안전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들이 돈이 없어 다시 범죄를 저지르거나, 실수를 해서 범죄 행위가 들통날 것은 예상했다면, 오히려 루크는 자신의 권한을 활용해 이들을 전부 죽이는 것이 더 안전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죽은 메도우스, 해리, 그리고 베트남에서 같은 소대였던 동료들, FBI 팀장 루크까지 모두 베트남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으며, 심지어 FBI 요원이자 해리의 동료인 엘리노어 위시까지도 베트남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 엘리노어의 오빠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으며, 베트남에서는 살아남았지만, 고향인 LA에 돌아와서 살해당한다.
20년 전, 베트남 파병 군인이었던 메도우스의 죽음으로 시작한 사건은 20년 전, 베트남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미국의 패전과 철수, 베트남에서 미군과 월맹군이 뒷거래로 마약을 팔고, 미국으로 밀반입했던 내용이 드러나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베트남에서의 패전으로 쫓기게 된 월맹군 일부가 수백만 달러를 다이아몬드로 바꿔서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이야기로 전개된다.
엘리노어 위시의 오빠가 살해당한 것도 베트남에서 마약을 가지고 들어와서 몫돈을 벌려는 목적 때문에 그런 것이고, 메도우스가 죽은 것도, 이들을 모두 죽게 만든 것도 루크의 탐욕과 함께, 루크를 은밀하게 조종한 엘리노어 위시의 ‘작전’ 때문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 모든 사건의 기획이 엘리노어 위시의 철저한 계획이라는 것인데, 변수는 오로지 해리 보슈이 등장 뿐이었다. 하필 해리 보슈가 헐리우드 경찰서 소속으로 좌천되었고, 하필 그날, 메도우스가 살해당한 날 당직을 섰으며, 하필 그 시간에 동굴 근처에 있던 샤키가 재빠르게 사체가 있다고 전화했을까.
    
이 모든 것들이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좀 불편하다. 사건의 세부적 묘사, 경찰서, 로스엔젤레스의 시가지와 풍경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 주요 인물의 심리와 갈등을 면밀하게 그린 것은 높게 평가하지만, 사건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연’이 작동하는 것은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과 비교하면, 이 작품은 훨씬 ‘말랑말랑’하다. 즉, 하드보일드하지 않다는 뜻이다. 해리 보슈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외롭고 고독한 인물이며, 동료 경찰과도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는 외톨이지만, 그것이 ‘하드보일드’한 인간은 아니다. 해리가 FBI 요원 엘리노어 위시와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걸 보면, 그의 내면이 메말라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리는 다정한 부모, 따뜻한 가정, 사이 좋은 형제, 남매가 있는 가정에서 살아 본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런 환경을 부러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환경으로 들어가는 걸 두려워한다. 행복한 기억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동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내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해리는 금욕적 인간으로, 자신을 잘 통제하지만, 그 자기억제의 내면에는 자신이 언제, 어떻게 마약, 폭력 등에 노출될 수 있을까 두려워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베트남에서 그런 경험을 했고, 베트남에서의 공포와 충격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수많은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전쟁 트라우마(PTSD)로 고향에 돌아와 마약, 알콜중독 등에 시달리다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해리 보슈 역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며, 억세게 운 좋게 살아 남은 경우에 속한다.
해리는 동물적 감각과 탁월한 추리로 사건의 본질을 향해 가지만, 그가 동료 메도우스를 기억하고, 베트남 동료와 베트남에서 벌어진 마약 밀거래, 베트남 군인과 미군의 공모로 수백만 달러의 다이아몬드가 미국으로 들어오게 되는 과정, FBI 요원 루크와 위시의 연결고리 등을 모두 밝혀내는 것은 그가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그와 가까운 동료가 죽은 채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필 그가 근무하는 지역에서, 근무하는 시간에.
    
고전적인 스릴러, 추리, 첩보 소설에서는 주인공(경찰, 사립탐정 등)이 피해자와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않는다. 주인공은 제3자의 입장에서,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을 탐문, 수사하면서 범인을 찾아낸다. 범인은 당연히 피해자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며,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는 인물이거나, 너무 가까워서 범인이라고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인물일 경우가 많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처음부터 우연이 개입하고, 그 우연은 작품 곳곳에서 단서를 제공하며, 결국 마지막까지 우연이 개입한 필연으로 종결된다. 읽기는 재미있게 읽었지만, 마치 잘 닦아 놓은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랄까, 미로를 찾아 헤매는 불안과 호기심이 거의 들지 않았다. 심지어 소설 초반에 루크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고, 그 짐작은 들어맞았다.
이 소설은 분명 재미있지만, 아쉬움도 많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장편 데뷔작이어서 어쩌면 이런 ‘우연’이 옥에 티로 작용한 것일 수 있다. 앞으로 해리 보슈 시리즈를 계속 읽어가다보면 작가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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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로건 럭키 : 스틸북 쿼터슬립 한정판 - 소책자(40p)+엽서세트(10종)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채닝 테이텀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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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럭키 - 스티븐 소더버그

제목이 조금 특이하다 싶었고, 애덤 드라이버 얼굴이 보여서 재미있을 것 같아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왠걸.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니 감독이 스티븐 소더버그였네. 어쩐지, 연출 솜씨가 대단히 훌륭했는데, 혹시 코언 형제의 손길이 닿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아, 이렇게 말하면 소더버그 감독이 기분 나쁘겠구나.
스티븐 소더버그라면, '오션스' 시리즈로 유명하지만, 나는 그의 데뷔작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부터 봤고, 최근에 가장 인상 깊었던 영화는 '사이드 이펙트'였다. '사이드 이펙트'는 몇 번을 봤는데, 볼 때마다 흥미진진한 영화다.
그런 스티븐 소더버그가 만든 영화였으니, 모르고 봤지만 '로스트 인 더스트'와 '친절한 금자씨'의 착한 버전을 결합한 듯한 기분 좋은 영화다. 등장하는 배우만 해도 알고보면 어마어마한데, 의외로 단역으로 나오는 것도 재미있다.
'007' 주인공 다니엘 크레이그와 영화 끝부분에 엄청 멋지게 나오는 힐러리 스웽크가 그렇다. 배우들 연기는 말할 것도 없이 훌륭하고, 시나리오가 뛰어나다. 시나리오는 레베카 블런트인데, 이 이름은 가명이고 '줄스 애스너'가 본명이다. 특이하게도 시나리오는 이 영화 한 편 뿐이고, 영화감독이자 배우가 본업이다. 주로 TV시리즈 쪽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웨스트 버지니아에 사는 주인공 지미 로건(채닝 테이텀)은 성실하게 일하던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그가 다리를 전다는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의자에 앉아 기계를 조작하는 일이라 다리를 저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그의 상관은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해고 사유가 된다고 했다. 더 정확하게는 '보험 고위험군'에 속하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지미는 아내와 이혼하고 따로 살고 있지만, 가까운 곳에 살고 있고, 엄마와 함께 사는 딸 세이디를 만나는 시간이 유일하게 행복한 시간이다. 지미의 아내는 이미 다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지만, 양육권과 공동소유의 주택 문제가 남아 있고, 딸이 중간에 있어 딸을 데리러 갈 때마다 얼굴을 본다.
지미는 학생 때 잘 나가던 미식축구 선수였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졸업하고 평범한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가 갑자기 해고당한 것이다. 지미는 동네 술집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동생 클라이드를 찾아간다. 클라이드는 왼쪽 팔꿈치 아래가 없다. 중동에 파병나갔을 때 부상당했고, 지금은 한쪽 팔로 바텐더 노릇을 하고 있다.
클라이드의 부상에 관해서 나중에 진실이 드러나는데, 원래 클라이드는 뛰어난 투수였다. 그의 실력이면 내셔널리그에서도 가장 유망한 선수가 분명했는데, 형인 지미가 풋볼을 포기하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클라이드가 선수 생활을 포기하고 자원해서 군인이 되어 중동에 나갔다가 부상당한 것이다. 
로건 집안은 징크스가 있는데, 뭔가 하는 일마다 잘 안되고, 악운이 겹친다는 것이다. 1983년 매기 이모가 로또에 당첨되었는데, 복권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바람에 그 엄청난 행운을 날려버린 것이다. 할아버지 다이아몬드 사건, 삼촌 감전 사고, 아버지가 사고를 당해 보험금을 받았는데, 그 직후 엄마는 병이 나서 앓아 누웠다. 지미는 다리를 다쳤고, 클라이드는 팔목을 날려버렸다. 유일하게 아무 일도 없이 건강한 사람은 막내 멜리 뿐이다.

클라이드가 일하는 술집에서 이야기를 하던 지미는 동생을 놀리는 사내들과 한바탕 싸움을 하고, 클라이드에게 '콜리플라워'라고 외치고 떠난다. 다음날 클라이드는 형이 만들어주는 아침을 먹으면서 '콜리플라워'에 대해 말한다. 이미 모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지미는 클라이드와 함께 레이싱 경기장의 금고를 털자고 말한다. 
이 경기장은 매립지 위에 지은 거라서 씽크홀이 발생하는데, 지미는 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일할 때, 지하 통로를 통해 현금이 오가는 파이프를 보았고, 그때부터 계획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지미와 클라이드는 감옥에 있는 조 뱅을 만나러 간다. 조 뱅(다니엘 크레이그)은 폭파전문가로, 지미 형제와 안면이 있다. 지미는 조 뱅을 설득해 함께 일하기로 한다. 조 뱅은 함께 일하되, 자기의 두 동생도 팀원으로 넣어야 한다고 말한다.
클라이드는 편의점을 자동차로 밀고 들어가 체포되고, 징역 90일의 비교적 가벼운 판결을 받고 '먼로 교도소'에 수감된다. 여기에는 앞서 면회한 '조 뱅'이 있었다. 
지미는 딸 세이디를 데리고 막내 멜린이 일하는 미용실에 왔다가 바깥에서 우연히 한 여성을 만나는데, 자선단체에서 일하는 실비아는 같은 학교 후배라고 밝힌다. 하지만 지미는 그가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해고 당한 회사에 짐을 가지러 간 지미는 공사가 일찍 끝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감옥에 있는 동생 클라이드에게 계획을 일주일 앞당기자고 말한다. 
레이싱 경기장의 대형 금고에서 일하는 글리마는 택배로 생일케이크를 받는다. 누가 보냈는지 알 수 없지만, 글리마는 고맙게 생각하며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케이크를 나눠 먹는다. 글리마에게 케이크를 보낸 사람은 미용실에서 일하는 멜리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들의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는다. 어떤 경로든 멜리는 글리마가 레이싱 경기장의 대형 금고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조 뱅의 두 동생은 늦은 밤, 씽크홀 공사장으로 들어가 노출되어 있는 현금수송 파이프를 통해 바퀴벌레를 안으로 들여보낸다. 이 계획은 낮에 글리마에게 케이크를 보낸 것과 연결되는 내용이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한 직원들은 대형 금고 안에서 어제 먹었던 케이크에 바퀴벌레가 잔뜩 붙어 있는 걸 보고 기겁하고, 해충 관리회사 직원을 불러 소독한다. 이때 소독하는 직원이 조 뱅의 두 동생이다. 이들은 작업을 마치고 지미에게 전화해서 '코드 핑크'가 떴다고 말한다. 지미는 멜리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조 뱅은 감옥 동료 네이먼에게 제안을 한다. 

연중 가장 큰 레이스가 펼쳐지는 날, 지미는 계획을 실행한다. 먼저, 감옥에서는 교도소장이 식당 점검을 하러 나오고, 모두 문제 없다고 말하는 상황에서 조 뱅이 갑자기 토하고, 병원으로 실려간다. 교도소 병원에서 조 뱅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클라이드와 만나 탈옥한다. 이들은 교도소를 드나드는 수송트럭 아래쪽에 나무관을 짜서 붙이고, 그 속에 들어가 숨는다.
감옥에서는 네이먼이 동료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킨다. 교도소장은 '코드 레드'를 선언하고, 교도소를 외부로부터 차단한다.
식당에서 간수 몇 명을 포로로 잡고 농성하는 네이먼과 동료들은 요구조건을 내건다. 폭동의 이유가 웃기는데, 교도소 도서관에 '왕좌의 게임' 5권이 없다는 것이었다. 교도소장은 죄수들이 원하는 책을 곧 구입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네이먼은 6권과 7권도 가져오라고 말한다.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을 달라는 것인데, 교도소장이 아무리 설득해도 이들은 믿지 않는다. 오히려 식당의 폐쇄회로를 차단하고, 창문까지 모두 막은 다음 불을 지른다.

지미는 조 뱅의 두 동생을 깨워 레이싱 경기장으로 가라고 독촉한다. 경기장 바깥에 도착한 두 사람은 통신망이 있는 외부 건물에 폭탄을 제조해 터뜨리고, 경기장 상가의 통신망이 차단된다. 카드결제가 안 되면서 현금만 받는 상황이 벌어지고, 현금은 곧바로 파이프를 타고 대형금고로 모인다.
조카 세이디를 학교에 데려다 준 멜리는 이혼한 새언니의 남편 차를 훔쳐 어느 주유소 앞에서 기다린다. 이 주유소는 교도소를 드나드는 수송트럭이 항상 멈추는 장소를 멜리가 미리 확인해 둔 곳이다. 조 뱅과 클라이드는 수송트럭 바닥에서 내려와 멜리의 차로 옮겨탄다. 알고 보니 멜리는 스피드광이었다. 영화 초반에 이미 멜리가 과속했다는 말이 지미의 이혼한 아내의 말로 나왔지만, 멜리는 차에 대해서도 잘 알고, 스피드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조 뱅과 클라이드는 지하 공사장으로 내려가고, 미리 와 있던 지미와 합류한다. 조 뱅은 젤리, 소금, 펜 같은 평범한 물건들을 조합해 폭탄을 만들어 내는데, 이 장면은 '브레이킹 배드'에서 마약을 만들어내는 화학교사 월터 화이트를 뛰어 넘는, 대단한 화학 지식을 보여준다. 조 뱅은 화학식을 벽에 써가며 이 물질들이 결합해서 어떻게 폭발 효과를 내는지 지미와 클라이드에게 설명한다. 그렇게 튜브를 타고 들어간 폭탄이 터지고, 이들은 다시 튜브를 통해 돈을 빨아들이는 방식으로 대형금고에 있는 돈을 빼내기 시작한다.
돈은 쓰레기 봉투에 담아 밖으로 빼내는데, 조 뱅의 두 형제가 맡는다. 이들이 쓰레기차에 돈봉투를 싣고 나가는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 잠깐의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출입문이 열리지 않도록 만든 것도 지미였다.
돈을 다 밖으로 빼낸 이들은 조 뱅과 클라이드가 다시 멜리의 차에 타고 먼로 교도소 근처 소방서에 대기한다. 교도소에서는 네이먼이 식당에 불을 지르고, 화재 신고를 하자 소방차가 출동하고, 조 뱅과 클라이드는 소방차에 숨어 교도소 안으로 들어간다.

멜리는 다시 학교로 돌아와 조카 세이디의 머리를 만져주고, 조 뱅은 교도소 병원 침대에 여전히 누워 있으며, 지미는 세이디의 학교 발표회에 참석한다. 세이디는 원래 부를 노래 대신, 존 댄버의 노래 Take Me Home Country Roads 를 부른다. 이 노래는 영화 전편에 흐르며, 특히 지미가 즐겨 듣는 노래여서 세이디에게도 의미가 있다.
방송에서 경기장 강도 뉴스가 나오고, 경찰과 FBI가 투입된다. FBI 요원 세라(힐러리 스웽크)는 영화 뒷부분에만 나오지만, 영화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멋진 역할을 보여준다. 세라 요원은 교도소장을 만나 감옥에 있던 조 뱅을 면회한 사람이 지미와 그 동생 클라이드라는 사실을 말한다. 이들은 조 뱅을 두 번 면회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이드가 편의점을 차로 들이박고 감옥에 들어온 사실을 밝혀낸다. 하지만 교도소장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말한다.
세라 요원은 지미의 핸드폰과 자동차를 추적하지만, 핸드폰은 요금을 내지 않아 정지 상태였고, 자동차는 구형이라 GPS 수신기가 달려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90일이 지나면 클라이드가 출옥한다-교도소에서 나오는 클라이드를 멜리가 마중한다. 클라이드는 '국가보훈처'가 찍힌 큰 가방을 하나 받는데, 관객은 내용물을 볼 수 없지만, 그게 돈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강도 당한 돈은 트럭에 담겨 발견되었고, 뉴스에서는 이들이 '촌뜨기 강도단'이라고 이름 붙인다. 즉, 갖지도 못한 돈을 털었다는 것이다. 
조 뱅도 형기가 만료되어 교도소에서 나오고, 클라이드가 일하는 술집을 찾아간다. 조 뱅은 지미의 소식을 캐묻지만 클라이드는 지미가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조 뱅도 뉴스에 나오는 소식을 듣고, 빼돌린 돈이 전부 트럭에 실려 있는 걸로 알고 있었다. 
조 뱅의 집에 누군가 삽을 놓고 가는데, 조 뱅은 잠시 생각하더니 마당의 큰나무 밑을 파기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지미와 클라이드가 교도소로 조 뱅을 만나러 갔을 때 나온 이야기와 연결된다.

그 사이 FBI의 수사는 종결되는데, 돈을 도난당한 '스피드웨이'에서는 보험금을 받아서 만족한다고, 더 이상 수사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한다. 결국 피해자가 없는 셈이 된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돈이 어떻게 빼돌려지는가를 보여준다. 단역에 불과했던 멜리가 큰 역할을 한다. 결국 이 모든 계획은 지미에서 시작해 클라이드, 멜리 세 남매가 완벽하게 호흡을 맞춘 것이다.
지미는 자신의 계획에 도움을 준 네이먼, 실비아, 글리마에게 선물을 보낸다. 지미는 엄청난 돈을 숨겨 놓고도 평상의 생활을 그대로 유지한다. 지미는 실비아를 만나고, 멜리는 조 뱅과 데이트를 하며, 클라이드는 술집에 처음 온 세라-바로 그 FBI 요원-를 만난다.

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은, 지미가 왜 '스피드웨이' 회사의 대형 금고를 털 생각을 한 것일까였다. 그가 갑자기 해고를 당했기 때문에 화가 나서? 이혼한 아내와의 법정 싸움에 필요한 변호사 비용을 마련하려고? 술집에서 싸운 건방진 레이싱 회사 사장 때문에? 아니면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서?
사건이 발생하고 6개월이 지나 공식적으로는 사건이 종결되었지만, 세라 요원은 이 사건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세라 요원이 술집에 나타난 것은, 앞으로도 이야기가 계속 진행될 것이며, 지미를 비롯한 동료들이 조금만 실수하면 체포당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영화는 훈훈하게 마무리되지만, 세라 요원을 보여줌으로써, 결말을 열어 둔 것이다.
지미는 대기업이 번 돈을 훔치고, 대기업은 잃어버린 돈을 보험을 통해 더 많은 수익을 얻게 된다. 세라 요원이 스피드웨이 사장에게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잃어버린 돈의 총액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험금을 산정할 수 있는가. 이들은 막대한 자본이 움직이는데 서로의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동한다. 보험사는 보험금을 지급하지만, 그 돈 역시 자기 돈이 아니며, 거액의 보험금이라 해도, 전체로 보면 푼돈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시나리오가 좋은 영화는 많은 제작비를 들이지 않아도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여기에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와 능력 있는 감독의 연출이 결합하면,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가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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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니스 엔드
사울 딥 감독, 샘 클래플린 외 출연 / 알스컴퍼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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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니스 엔드

영화를 보다 보면, 어떤 느낌이 올 때가 있다. 이 영화가 그랬는데, 어느 순간, 이 영화는 매우 '개인적'이고 '연극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아무 정보 없이 보기 시작했는데,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었고, 영국군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만으로 선택했다. 
영화를 다 보고 영화정보를 찾아보니, 내 느낌이 정확하게 맞아서 신기했다. 이 영화는 R. C. 셰리프가 1928년에 쓴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셰리프는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 장교로 참전했으며,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희곡을 썼다.
잘 알려진 것처럼, 1차 세계대전은 재래식 무기로 싸운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전쟁이다. 나중에 2차 세계대전이 이 기록을 깨지만, 불과 20년 사이 무기의 발달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연합군은 4천3백만 명이 참전했고, 사망자와 실종자(사망으로 추정)를 합하면 1천만 명이 넘었다. 즉, 4명 가운데 한 명이 전사한 것이다. 여기에 부상자가 1천2백만 명이었으니 사상자로 보면 4명 가운데 2명은 죽거나 다친 것이다.
동맹국은 2천5백만 명이 참전했는데, 사망자와 실종자가 8백만 명이고, 부상자도 8백만 명 정도다. 사상자가 1천6백만 명이니 통계로 보면 동맹국 군인의 피해가 더 컸다.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 수는 당연히 2차 세계대전이 훨씬 많지만, 2차 세계대전의 무기는 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파괴적이었다. 1차 세계대전은 '참호전'이라는 특징으로 말할 수 있다. 전선을 따라 참호를 길게 파고, 진지를 구축한 다음, 적과 대치한다.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상대 참호를 점령해야 하고, 그렇게 병사들의 몸뚱이를 갈아넣으면서 전쟁은 끝없는 소모전으로 변해갔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문학작품이 많다. 가장 유명한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비롯해 최근에 개봉한 영화 '1917' 그래픽노블 '1914-1918' 등이 있다. 1차 세계대전을 다룬 책 가운데 존 엘리스가 쓴 '참호에 갇힌 1차 세계대전'을 보면, 이 전쟁이 '참호전'이라는 특징을 얻게 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참전 군인 대부분은 참호에서 생활한다. 전선을 따라 길고 복잡하게 만든 참호는 아군의 기지 역할을 하고, 안전한 방어진지이면서, 적을 공격할 때도 빠르게 기습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적과 아군의 참호 거리는 불과 50미터여서, 상대방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며, 상대방에게 심리전 - 음악, 방송 등 - 을 펼칠 수 있고, 심지어 적군이어도 임시 휴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참호는 안전하지만 매우 비좁고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 발이 빠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여기에 쥐가 들끓고, 미쳐 거두지 못한 아군 병사의 시신을 참호 바깥쪽에 땅을 파서 메워 벽을 만들기도 했다. 
영화는 참호 생활의 어려움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개인적'이고 '연극적'이라고 느끼게 되는 부분은 두 가지였는데, 그 하나가 참호생활의 묘사였고, 다른 하나는 군인들 - 장교와 사병 - 특히 장교들의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롤리 소위는 이제 막 장교 훈련을 마치고 임관한 앳된 소위다. 그는 전방 연대로 전입 인사를 하러 왔다가 사단장을 찾는다. 사단장은 롤리 소위의 삼촌(외삼촌)이다. 이 정도 빽이면 좋은 보직을 받아 안전하게 군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롤리 소위는 최전방 대대로 배속해달라고 요청한다. 스탠호프 대위가 대대장으로 있는 그 대대로 꼭 배속을 해달라는 롤리 소위의 부탁에, 사단장도 어쩔 수 없다며 수긍한다.
롤리 소위와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 전에 함께 살던 사이였다. 롤리 소위의 집안은 명문가로 부유한 - 아마 귀족일 수도 있다 - 집안이었고, 그런 롤리의 저택에서 관리인으로 일하던 사람이 스탠호프였다. 스탠호프는 전쟁이 발발하면서 입대해 지금은 대위가 되었고, 사단에서 유명한 전설적인 대대장이 되었다.
반면 롤리 소위는 학군장교였다가 최근 8주 훈련을 마치고 이제 막 전방부대로 배속받은 신참이었다. 롤리 소위의 기억으로 스탠호프는 자신보다 나이는 많지만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롤리, 롤리의 누나와 함께 셋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이 있었다.
프랑스 최전선에서 독일군과 대치하고 있는 대대는 이제 막 직전 부대와 임무 교대를 하고, 앞으로 6일 동안 참호에서 대기하며 독일군의 움직임을 살피고, 방어 임무를 맡았다. 전선은 벌써 몇달 째 교착상태에 있었고, 소문으로는 독일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거라고 하지만, 그런 소문 속에서 이미 몇 달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롤리 소위는 전쟁 전의 스탠호프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참호에서 본 대대장 스탠호프는 롤리 소위의 기억에 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전입인사를 하러 온 롤리를 바라보는 스탠호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친동생 같은 롤리였지만, 최전선에서 만나는 롤리를 보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정이 그의 내부에서 뒤섞이며 심한 내적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눈동자의 흔들림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스탠호프 대위는 전쟁이 발발한 이후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전설적인 군인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탁월한 지휘관으로,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그가 지휘관으로 누구보다 병사 한 명, 한 명에 대한 애정이 깊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승리하지만, 그만큼 많은 병사를 잃은 스탠호프 대위는, 부하 병사들 한 명, 한 명이 똑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동료가 그렇게 허무하게 주검으로 변하는 장면을 보면서 비통한 감정과 그 감정을 누르고 전투를 치러야 하는 지휘관으로의 냉정함을 유지해야 하는 이성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킨다.
결국 스탠호프 대위는 견디기 힘든 감정을 억누르려 술을 마시게 되고, 거의 알콜중독에 이르게 된다. 롤리 소위가 스탠호프 대위를 만난 이후, 이야기는 스탠호프 대위를 둘러싸고 측근인 부하 장교들과 연대장의 대화, 갈등을 깊이 있게 보여주고 있다. 
영국군은 첩보를 통해 3월 21일, 독일군이 공격할 거라는 정보를 얻지만, 확실한 정보를 알기 위해 스탠호프 대대에 독일군을 생포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스탠호프 대위는 더 어두워진 다음 공격하자고 주장하지만, 연대장은 상급부대에 보고해야 한다며 오후5시에 공격하라고 다그친다. 이는 분명 병사들이 더 많이 죽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스탠호프 대위는 연대장에게 반발하지만,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부닥친다.
두 명의 장교와 여덟 명의 병사로 침투조를 짜는데, 지휘장교로 스탠호프 대위와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가장 친하게 지낸 오스본 중위가 차출되고, 롤리 소위는 자원한다. 그렇게 독일군 생포작전이 시작되고, 열 명의 군인이 독일군 참호로 뛰어들어 독일군 한 명을 생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살아돌아온 군인은 롤리 소위와 네 명의 병사였다.
전쟁에서 군인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전투에서 이기는 방법은, 수많은 젊은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적군을 더 많이 죽이는 방법이 유일했던 전쟁이 1차 세계대전이었다. 그런 잔혹한 전술 앞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스탠호프 대위의 심정은 갈갈이 찢겨나간다.
참호 안에서 일어나는 장교들의 갈등, 장교와 사병의 갈등은 연극적 요소가 강하다. 스탠호프 대위는 마치 햄릿처럼 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의 이익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전쟁에 끌려들어온 '개인'이며, 명분이라고는 오로지 '국가의 이익'인데, '국가'는 개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단지 '애국심'만으로 명분을 찾기에는 이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개인에게 깊은 내면의 상처를 입히고 있다.

스탠호프 대위의 대대가 참호로 들어간 지 나흘째 되는 날, 독일군의 총공격이 시작된다. 나중에 알려지지만, 이날의 공격은 독일군의 '춘계 대공습'으로 기록되었고, 단 사흘의 전투로 양쪽에서 무려 7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왔다.
독일군의 포격으로 롤리 소위는 등에 부상을 입고 스탠호프 대위가 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스탠호프 대위는 포탄이 어지럽게 터지는 참호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바라보며 망연자실한다. 그렇게 참호에 있던 영국군 대대는 전멸한다. 포연이 그치고, 전멸한 영국군 사이를 걷는 독일군은 방독면을 쓰고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가스를 썼다는 주장은 사실로 확인되었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쳐가듯 잠깐 독일군이 방독면을 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참혹성을 알리고 있다.
전투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극한 상황이라 결코 낭만적이지도, 인간적이지도 않다. 죽음과 삶의 경계가 없고, 어떤 예측도 할 수 없는 불안정한 상황이기 때문에, 군인은 거의 본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런 대규모 살상전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고 우연이라면, 전사한 병사 역시 그의 죽음은 우연일 뿐이다. 문제는, 인간의 존재가 이런 불분명한 명분 때문에 도구로, 소모품으로 소모되고 있다는 딜레마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병사 개개인은 전쟁의 거대한 구조를 깨뜨리지 못한다. 결국 구조의 틀에 갇힌 개인은 자신의 삶, 생명을 지키지 못하고, 죽음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며, 이런 모순과 갈등이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인 것이다.
이 영화는 1차 세계대전이 배경이지만, 인간의 존재와 극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갈등, 내면의 심리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어 보편적 공감을 끌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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