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레이] 고잉 인 스타일
잭 브라프 감독, 앨런 아킨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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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잉 인 스타일


세 명의 노인이 은행을 턴다는 이야기로, 코미디 영화다. 가볍게 볼 수 있고, 해피엔딩이어서 보는 내내 즐겁고 마음이 편하지만, 이 영화는 겉으로 드러난 코미디 서사의 이면에 무시무시한 미국 사회의 공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조, 윌리, 앨 세 노인은 오랜 친구다. 이들은 철강공장에서 40년을 노동자로 함께 일하며 우정을 쌓았고, 퇴직한 지금도 이웃에 살며 날마다 만나서 어울린다. 이들은 가족이 없거나(앨), 멀리 떨어져 있거나(윌리) 이혼한 딸과 손녀를 돌보며 살아야 하는(조) 노인이다.

사건의 발단은 조의 집과 관련한 모기지 대출 이자의 급등이다. 저금리 대출이자의 만기가 끝나자 곧바로 고금리 대출이자 상품으로 연동되면서 조의 모기지 대출 이자가 몇 배로 뛰자 조는 졸지에 앉아서 집을 빼앗길 처지가 되고 만다. 이 상황은 미국에서 2007년 발생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 정부는 2000년 초부터 금융 이자를 낮게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가라앉은 경기를 띄우기 위한 것이 목표였고, 저금리 정책으로 중산층 이하 서민의 주택 구입이 늘어나면서 주택 가격이 올라갔다. 금융권에서는 여기에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할 수 있는 상품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주택을 보유한 사람이라면 주택 담보로 집값의 100%까지도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는 집값이 더 오를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고, 실제 한동안 부동산 시장은 오름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2004년 이후 미국 정부는 저금리 정책을 포기하고 금리를 올렸는데, 바로 이 금리의 인상이 이 영화의 앞부분에서 조가 은행의 대출담당 직원과 나누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은행직원은 모기지 대출을 해주면서 대출 이자가 높아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건 고객을 우롱하는 짓이었다.

조는 대출 이자를 내지 못하면 집을 뺐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고, 분노가 끓어오르는 상황에서 갑자기 은행에 강도들이 난입해 총을 난사하고 불과 2분만에 은행의 돈을 털어 사라지는 걸 보게 된다.


집을 뺐기게 된 조가 두 친구에게 은행을 털자고 말하지만, 윌리와 앨은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며 거절한다. 당연하게도 세 명의 노인은 모두 일흔 살이 넘은 늙은이고 몸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처지에 은행강도라는 건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은행을 털자고 합의하게 되는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그건 바로 그들이 40년 동안 다니던 공장에서 더 이상 연금을 지급하지 않겠다는 결정이었다. 세 명의 노인은 40년 - 사실상 한 사람의 평생이나 다름 없는 시간 -을 철강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이들은 뼈빠지게 일했고, 그렇게 열심히 살아서 퇴직을 하고 이제 연금을 받으며 살 수 있다고 기대했는데, 회사에서는 연금을 중단한 것이다.

그 이유가 더 기막히다. 철강회사는 다른 회사와 합병을 할 것이고, 합병하면서 기존의 채무를 노동자들의 연금으로 갚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세 노인은 분노가 폭발한다. 그리고 세 노인은 남아 있는 생애에 연금 금액을 곱해서 거래 은행에서 가지고 나와야 할 돈을 계산한다.

하지만 마음만 청춘일 뿐, 평생 노동자로만 살아왔던 노인들이라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행동도 꿈떠서 은행은 커녕 동네 마트에서 연습삼아 한 도둑질도 들켜 마트 매니저에게 훈계만 듣고 풀려난다. 예행 연습에서 실패한 뒤, 조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딸과 이혼해 혼자 살고 있는 사위를 찾아간다. 사위는 대마초 사업 - 캘리포니아에서는 합법이다 -을 하고 있는데, 전문가를 소개해 달라고 말한다.

그렇게 만난 전문가와 함께 세 노인은 은행을 털기 위한 사전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 이쯤에서 영화는 '노인 재활 특별 프로그램'으로 보일 정도로 세 노인은 운동도 열심히 하고, 마치 '오션스 일레븐'의 주인공처럼 은행을 사전 답사해 폐쇄회로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하고, 출입부터 내부 동선을 점검하며, 범행에 필요한 2분의 시간을 맞추기 위해 꾸준히 연습한다.


디데이. 세 노인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축제 장소에서 자신들이 각자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고, 정해진 시간에 은행을 턴다. 이들은 2백만 달러의 현금을 가지고 사라졌으며, 작전은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세 노인은 FBI에게 체포된다. 예행 연습을 했던 마트의 매니저가 앨의 움직임이 은행강도와 똑같다고 제보했고, 그것을 단서로 세 명 모두 체포된 것이다.

하지만 물증은 없고, 세 노인의 알리바이를 초 단위로 추적하기 시작하지만, 세 노인의 알리바이는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면서 FBI와 경찰은 범인을 지목하지 못한다. 영화에서 백미는 세 노인의 알리바이가 톱니바퀴처럼 매끄럽게 맞아들어가는 장면이다. FBI와 경찰은 세 노인이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물증이 없어 석방할 수밖에 없고, 세 노인은 자유로운 몸이 된다.

자기들의 연금만큼의 돈을 제외하고, 세 노인은 남은 돈을 노인단체에 기부한다. 그리고 항상 다니는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 마지에게도 한 묶음의 돈을 몰래 건넨다. 앨은 윌리에게 신장을 기증하고, 앤과 결혼한다. 세 사람은 건강한 모습으로 앨의 결혼식에서 샴페인을 부딪치며 건배한다.


이 영화는 같은 제목으로 1979년에 발표한 것을 리메이크한 영화인데, 1979년판이 세 명의 노인 모두 백인이었다면, 2017년판은 흑인(모건 프리먼)이 있다는 것이 다르다. 미국 사회에서 노인들이 은행강도를 해야 할 정도로 보편적 복지 수준이 열악하다는 사실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건 심각한 사회문제이면서, 그걸 또한 코미디로, 해피엔딩으로 끝내야 하는 것 역시 조금만 다르게 생각하면 비극적이다.

한국영화에도 이와 비슷한 영화가 있다. '육혈포 강도단'은 세 명의 할머니가 은행을 털기로 작정하고, 역시 전문가(임창정)의 도움을 받는다는 점에서 '고잉 인 스타일'의 기본 모티프를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고잉 인 스타일'이 미국 서민의 복지 문제를 건드려 사회 비판적 시각을 내재하고 있다면, '육혈포 강도단'은 세 노인이 하와이로 여행할 비용을 뺐긴 것에 대한 복수로 은행강도를 실행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일탈로 그려지고 있다.

노인도 작정하면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고, 노인들이 은행을 털어 큰 돈을 가져가는 것은 서민의 돈이 아닌, 자본가와 부르주아의 돈이어서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여기에 세 노인은 은행에서 뺐은 돈으로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이 머무는 양로원에 기부하는 것으로 이들이 서양의 홍길동인 '로빗훗'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로빈훗'은 정의로운 인물이고, 부자의 돈을 빼앗는 건 범죄가 아닌, 정의의 실천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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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피아니스트 : 풀슬립 일반판
로만 폴란스키 감독, 토마스 크레츠만 외 출연 / 노바미디어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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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작품. 폴란드 유대인 슈필만의 생존기를 다룬 영화이면서 독일군이 유대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학살했는가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 있던 유대인의 수난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혹독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들 가운데 수십만 명이 독일군이 운영하는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사건 또한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는 자는 지금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일본의 이익을 위해 거짓 논문을 써내는 램지어 같은 인간과 같은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유럽에서 유대인 학살 문제는 매우 신중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역사적 사건으로, 비유대인 유럽인들은 독일의 만행에 대한 공분과 함께 비유대인으로서의 도의적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를 보인다. 즉, 자기들(독일인이 아닌 비유대인 유럽인)은 유대인 학살에 직접 책임은 없으나 유대인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있기 때문이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이후, 히틀러와 독일사회민주당과 결별하면서 독일의 역사적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하고 피해자인 유대인에게 사죄한 바 있다. 또한 앞으로 히틀러의 나찌즘이 발생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어 극우 정당의 출현, 극우 집단의 발호를 근본에서 막는 장치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유대인 학살'을 다룬 영화는 물론 다큐멘터리, 자서전 등 다양한 형태의 기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헐리우드의 영화자본을 쥐고 흔드는 유대인 집단은 헐리우드에서 유대인이 박해당하는 내용의 영화를 주기적으로 생산하도록 힘을 실어주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박해받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고 곧바로 '이스라엘'을 건립했고, 미국의 지원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지역을 폭력으로 차지하고, 자기들이 당한 것 이상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탄압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과 과거 유대인 박해를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건 옳지 않다. 유대인 박해 사건은 그 자체로 심각한 전쟁범죄이며, 보편적 인류의 자유, 평등, 존중의 정신을 말살한 최악의 사태였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현재 '이스라엘'은 그렇게 박해당한 경험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유대인의 의지로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독일이 저지른 것보다 더 잔인한 행위라는 걸 알아야 한다.

독일군에 의한 유대인 박해, 집단 살해 사건을 상업영화로 만들거나 다큐멘터리, 자서전, 역사책 등으로 만들어 꾸준히 알리는 것은 유대인의 권리다. 하지만 그 권리를 남용하면서 마구 휘두르면 그건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폭력이 된다.
우리(한국인)는 유대인을 바라볼 때, 양가 감정을 갖는다. 유대인과 한국인은 역사적 피해자라는 사실에서는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하지만 유대인은 가해자인 독일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공식적, 역사적으로 사죄했으며,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만들었다.
반면 한국인을 가해한 일본은 전쟁에서 패한 이후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코스프레를 하며 피해국과 그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헌법을 바꿔 침략전쟁을 할 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는데, 일본은 패전 이후 지금까지 극우집단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며, 피해국에 사죄도, 배상도 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나라이기도 하다.
유대인은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국가'가 없었지만, 전쟁 끝나고 '국가'를 세웠다. 유럽과 다른 대륙을 떠돌던 유대인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물적 공간을 마련한 것이니 그들로서는 전쟁과 박해가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끔찍한 경험을 한 유대인들이 가까이 사는 다른 민족을 야만적으로 학살, 학대하기 시작한 걸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들이 2차 세계대전에서 당한 박해와 학살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이어나가고 있으니, 세계 사람들은 유대인을 보면서 인지부조화 상태에 놓이게 된다. 유대인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유대인 '개인'이 당한 경험과 서사는 비극이다. 하지만 집단으로써의 유대인이 저지르는 팔레스타인 사람에 대한 학살은 피해자 '개인'으로의 유대인까지 혐오하게 만드는 범죄이자 만행이다. 유대인 가운데도 노엄 촘스키처럼 시오니즘에 반대하는 비판적, 합리적 유대인도 많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주거지를 침략하며, 원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던 땅을 빼앗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서서히 말려죽이는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 지역에서 패권 국가로 행세하고 있다. 그들은 기고만장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살하면서 즐거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마치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어 자원을 수탈하고, 한국인을 학대하며, 농락했던 것과 똑같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학대하고, 농락하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이런 만행과 오만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 폭력으로 흥한 자는 폭력으로 망한다는 진리도 있듯이, 이스라엘은 폭력을 기반으로 서 있는 국가이고, 폭력을 휘두르면서 쾌락을 느끼고 있다. 그런 행동이 정신분석에서 '가해자와 동일시' 현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중동 인근 국가들을 모두 적대적 관계로 만들고, 멀리 떨어진 미국과 유럽의 몇 나라들-그들이 지금은 가장 폭력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겠지만-을 등에 업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마치 어린아이가 칼을 쥐고 휘두르는 것처럼 위험한 행동이다.

이 영화에서도 유대인들이 독일군의 폭력으로 서서히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몹시 안타까웠다. 독일군의 만행은 끔찍하고, 말할 수 없이 잔인하며, 악랄했다. 유대인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스실로 끌려가야 했고, 강제수용소에서 노동을 하며,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데, 그런 유대인의 비참함에 감정이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까닭은, 현재의 유대인 '이스라엘'이 어떤 짓을 하는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유대인 슈필만을 팔레스타인으로 바꾸고, 독일군을 이스라엘군으로 바꾸면 완벽하게 똑같은 그림이 나온다.
이미 너무 많은 '피해자 유대인'을 그린 영화가 나왔고, 앞으로도 나오겠지만, 이제 '피해자 유대인'을 다룬 영화는 더 이상 관심을 끌기 어려울 것이다. '피해자 유대인'은 이미 과거의 역사가 되었고, 지금은 '가해자 유대인'의 이미지가 뚜렷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게 그동안 저지른 학살과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하고, 배상하고, 팔레스타인의 회복을 돕지 않는 이상, 유대인은 전쟁 때의 '독일군'과 같은 이미지로 오래도록 남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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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에린 브로코비치 - 아웃케이스 없음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 줄리아 로버츠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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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 브로코비치

몇 번을 본 영화지만, 볼 때마다 새로운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에는 주인공인 에린 브로코비치의 삶과 개인적 매력을 발견하는 데 집중하다가 차츰 주변의 인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에린은 '미스 위치타' 출신으로 큰 키에 날씬한 몸매의 미인이다. 그는 자신의 미모를 돋보이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몸매가 잘 드러나는 옷을 입고 다닌다.
애기를 돌봐야 하는 젊은 엄마로서 힘들지만 꿋꿋하게 일자리를 찾고,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할 줄 아는 자의식 강하고 똑똑한 여성이다. 그와 살던 남자는 떠났는데, 떠난 이유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난한 여성 혼자 아이를 키우면서 살기에는 환경과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고, 더 이상 추락할 수 없을 정도로 밑바닥 삶을 살고 있었다.
그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변호사를 만난다. 승소가 확실한 재판에서 지고, 보상금 한푼 받지 못하게 되자 에린은 변호사를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말한다. 이런 태도를 보면 에린이 강한 성격이라고 보이지만, 궁지에 몰린 가난한 여성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애원이라고 생각하면, 에린이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삶을 이어가는 바탕에는 강한 모성애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힘이 있음을 알게 된다.

에린이 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보면, 그가 우연히 발견한 소송 서류에서 수질오염으로 고생하는 주민들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그들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 가식이 아닌, 진정한 공감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에린은 스스로 말하듯, 똑똑하고 일도 빨리 배우는 여성이다. 거기에 책임감도 강하고 사람들과의 친화력도 매우 뛰어나다. 에린은 대기업(PG&E)이 일으킨 수질오염으로 각종 질병과 암으로 고생하는 마을 주민들을 찾아가 진심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처지에 공감한다. 에린과 그의 변호사가 마침내 미국 뿐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기록을 세운 것은 에린이 보여준 '공감'에서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변호사 사무실에서, 공공상수도관리소에서, 대기업이 배출하는 폐수를 몰래 담으면서 남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하는 에린은 처음부터 억세거나 강한 이미지의 여성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에린이 옆집으로 이사 온 할리 데이비슨을 타는 남자, 조지를 만난 이후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지는 자유로운 남성으로, 먹고 살 만큼의 일을 하고는 한동안 쉬고, 오토바이를 타고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남자였지만, 에린을 만나고는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렇다고 에린에게 질척대거나 마초처럼 굴지 않고, 오히려 아이들의 아빠 노릇을 살뜰하게 하는 것으로 에린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눈에 들어온 인물이 바로 '조지'다. 조지는 독신 또는 미혼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에린을 만난 이후 자연스럽게 에린의 두 아이를 돌보면서 에린을 돕기 시작한다. 두 아이는 조지의 다정하고 따뜻한 모습을 좋아하고, 아버지처럼 따른다. 조지는 에린을 사랑하고, 아이들도 사랑하는 마음이 따뜻하고 자상한 남성이다.
하지만 에린은 그런 조지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그건 에린이 이미 두 번의 이혼을 경험했고, 그가 만난 남성들은 에린이라는 '인간'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에린의 성적 매력만 좋아했다가 싫증나면 떠나버린 인간들이었다.
에린은 조지도 그런 덜 떨어지고 되먹지 못한 남자일 수도 있다고 경계해서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다. 조지 덕분에 에린은 자유롭게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수질오염으로 피해를 당한 마을 주민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을 듣고, 증거를 수집할 수 있었다.
조지는 에린에게 청혼하려고 반지까지 준비하지만, 에린은 조지를 그저 '베이비 시터' 정도로 취급하는 태도에 화가 나서 에린을 떠난다. 조지가 떠나고 나서야 에린은 조지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에린은 후회하지만 그렇다고 감상적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후회하거나 자기연민에 빠지는 순간, 세상은 더 잔인하게 자신을 해친다는 사실을 에린은 이미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에 자기 방어 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조지가 돌아왔을 때, 에린은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로서는 진심과 최선을 다한 사과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조지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조지는 무심한 듯,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준다. 아이들은 조지가 있어 행복하고, 에린도 조지의 존재가 더 없이 고맙다.
조지가 보여주는 부성애와 외조의 모습은 미국에서도 특이할 정도로 훌륭한 귀감이 되는 남성의 모습이다. 조지는 따뜻한 심성을 가진 남성으로, 혼자 살면서도 좋아하는 여성을 찾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외롭다고 사랑하지 않는 여성과 만나서 살기는 싫고, 그러느니 차라리 혼자 즐겁게 사는 삶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에린을 만나게 되고, 에린에게 두 아이가 있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있어서 에린과의 사이가 자연스럽게 가까워지고, 가족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조지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때 진심을 다해 사랑할 줄 아는 멋진 남성이다.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술, 담배를 하지 않으며, 유머가 있고, 다정다감한 남성이라면 최고의 신랑감이자 아버지 아니겠는가.
에린은 소송이 승리하고, 피해주민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러 가는 길에 조지와 함께 가기를 희망한다. 자기가 그동안 고생해서 얻은 결과를 조지에게 보여주고,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마음에서다. 에린과 가까워진 주민에게 손해배상 금액으로 2백만 달러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때, 암으로 고생하던 여성 주민의 눈물은 상식과 정의가 승리하는 장면이어서 감동이다. 
조지도 이 모습을 보면서 흐믓한 웃음을 짓는다. 에린이 그렇게 고생한 것에 보람이 있어서 기쁘고, 어려움에 놓인 사람을 돕는다는 멋진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기쁨도 있었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 좋은 일을 하고, 정의롭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을 사랑하는 건 행복하다. 에린이 볼 때 조지가 그런 사람이고, 조지 역시 에린의 본 모습을 한눈에 알아본 탁월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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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시대 - 신의 죽음 이후 우리는 어떤 삶을 추구해왔는가
피터 왓슨 지음, 정지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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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의 시대

제목이 '무신론자의 시대'인데, 원문 제목은 The Age of Nothing: How We Have Sought To Live Since The Death of God 이다. '무의 시대 : 신의 죽음 이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작가는 '신의 죽음'을 니체의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기준으로 삼는다.
즉,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19세기 이후의 세계는 신이 없는 사회, 신의 존재가 무의미한 사회를 어떻게 살아왔을까 살펴본다. 니체가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발표한 이후, 그가 제시한 '초인'의 개념은 서양에서 수천 년 이어져 온 '신', '하나님'의 개념을 대체할만한 놀라운 개념이었다. 과거 종교가 지배하던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 체제가 자리 잡으면서, 종교는 자본의 힘에 밀려나 절대적 권위를 잃게 된다. 종교는 자본에 기생하거나, 자본의 비위를 맞추며 생존하는 방법을 찾는데, 이는 '종교의 세속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종교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종교에서 영혼의 구원을 받고자 교회나 성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빈곤과 생존의 불안을 벗어나기 위해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타난다. 다만, 미국의 상황과 다른 나라는 사뭇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미국에서는 종교(기독교, 개신교)를 갖고, 종교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반해, 다른 나라에서는 종교(기독교,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 조금 더 나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니체의 주장은 당시(19세기)의 사회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 시기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필두로 수많은 과학적 발견, 발명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우주론, 천문학, 물리학 등 정교한 과학 이론의 등장으로 인간의 사고 영역과 지적 확장이 다른 어느 시기보다 빠르게 넓어지던 때였다.
따라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것은 그동안 인류가 살아오면서 가졌던 관념과 무지를 벗어나 이성의 시대로 진입하는 선언이었으며, 종교(와 종교지도자)가 억압하고 있었던 종교 이외의 다양한 삶 - 쾌락, 예술, 문화, 오락, 과학 등 - 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는 프로이트와 융이 정신분석학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세우면서 인간의 정신과 심리가 과학적으로 분석되기 시작한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류의 무지와 몽매에서 탄생한 종교는 점차 설 자리를 잃게 되지만, 새로운 개념으로 바뀌는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서양에서 두 번의 전쟁 - 1차, 2차 세계전쟁 - 은 서양(유럽)의 기존 관념과 질서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세계를 재조직, 재구축하는 시기에 해당한다. 전쟁을 겪은 유럽인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신이 없는 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전후 '실존주의 철학'이 등장하고, 기존의 '신'은 부정된다.

이 책은 '종교' 또는 '신'이 하나의 절대적 믿음으로의 신앙 체계이자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이었던 과거와 달리 근현대의 유럽과 미국에서 '신'이 사라지게 된 원인과 계기를 밝히고, '신'이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신'과 '종교'를 이해하고 새롭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지성사의 흐름을 말하고 있다.
여기 기록된 담론은 '거대 서사'를 이루며, 근현대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이론과 현상을 근거로 한다.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예술(미술, 음악, 건축),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 정치학, 인류학, 마약 등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지식과 자료가 언급되고 있어서 유럽과 미국의 지성사의 흐름이나 담론을 이해하기에 꼭 필요한 책이기도 하다.
이렇게 방대한 서사는 '종교'와 '신'의 존재가 무의미해진 사회에서 그것을 대체하거나 새롭게 해석하거나, 무의미하지만 여전히 살아남은 '종교'와 '신'이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책은 '무신론'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다만 '종교' 또는 '신'의 존재가 과거와는 다르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근현대사의 유럽에서 그것(종교, 신)을 대체하는 이론과 다양한 분야의 활동이 곧 '현대'를 구성하는 것이다.
과학은 진화론 이후 우주의 탄생(빅뱅)과 지구의 생성, 생명의 탄생, 초기 박테리아에서 진화를 거듭해 현생 인류의 등장까지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논리를 갖추게 되고, 자본주의 이후 그것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인 공산주의의 등장은 '무신론'을 더욱 강화화고 확장했다. 
과거의 '종교' 또는 '신'이 인간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통제했다면, 종교가 권위와 힘을 잃은 근현대에서 개인의 성장과 '개인성'의 등장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근대 이전까지 '개인'은 물리적으로 존재했으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의식되지 않는' 존재였다. 
'개인'이 역사적 존재로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종교' 또는 '신'의 존재는 더욱 초라해지기 시작했다. 종교(신)를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예전에는 아무런 혼동 없이 뒤섞여 있었다면, 세계 전쟁 이후 마치 원심분리가 되는 것처럼 뚜렷하게 사회 속에서 구분되기 시작했다. 종교나 신의 존재 없이 스스로의 존재만으로 살아가는 '개인'이 대부분이지만, 종교 또는 신을 믿는 사람들은 다시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종교와 신을 내걸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 - 종교사업자 - 과 빈곤 또는 무지에서 오는 불안으로 종교를 찾거나 신을 믿는 사람들이다. 빈곤과 무지, 불안으로 종교를 찾거나 신을 믿는 사람들은 종교사업자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 그들의 숙주가 된다. 종교사업자들은 고대에 탄생한 종교와 신을 내걸고 그들의 대리자로 자처한다. 이들은 신도들의 헌금을 모아 큰 규모의 집회장 - 교회, 성당, 사찰, 사원 등 -을 짓고, 더 많은 숙주를 끌어모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는 '자본'의 논리와 똑같이 작동한다. 자본가는 생산수단(토지, 공장, 원료)을 갖고 노동자를 고용해 '상품'을 만든다. 이때 노동자의 잉여노동(자신의 임금만큼 노동한 것 이외의 노동시간)으로 생산한 상품을 판매해 이윤을 가져간다.
종교사업자는 생산수단(교회, 성당, 사찰, 사원 등)을 보유하고 신도를 끌어모은다. 종교사업자 - 목사, 신부, 중, 랍비 등 -는 신도들에게 신의 대리자로 '신의 말씀'을 들려주는 서비스(상품)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헌금을 받는다.
근대 이후 200년은 자본주의 시대였다. 따라서 이 책에서 논의하는 기본 전제는 신의 존재가 과학에 의해 합리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에서도 자본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는 걸 바탕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중세 뿐아니라 근현대에도 종교로 인한 전쟁과 학살은 하루도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 종교 원리주의자, 근본주의자들이 벌이는 살육이 인류 전쟁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고, 차별과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종교(신)가 힘을 잃으면 윤리적, 도덕적으로 문제가 발생할 거라는 종교주의자들의 주장은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아니라 악의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진화론을 비롯한 생물학, 우주학 등 실험, 관측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면 무지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획득하고, 합리적 이성은 합리적 도덕과 윤리관을 갖추게 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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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죄 많은 소녀
김의석 감독, 전여빈 외 출연 / SM LDG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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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많은 소녀

충격적인 영화다. 주제, 배우의 연기, 감독의 연출 모두 예사롭지 않을 뿐 아니라 탁월하다. 저예산 독립영화의 작품 수준이 이 정도라면, 한국영화는 가능성과 희망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해도 좋겠다.
여자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한 여학생의 자살 사건을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은, '기성세대가 새로운 세대를 어떻게 살해하는가'에 관한 핍진한 관찰 기록이다. 감독은 의도적으로 관객의 심리를 건드린다. 그것은 배우들의 연기 뿐 아니라 음악, 음향, 인물들이 놓여 있는 극단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관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심리적 동요를 일으키도록 한다.
경민이 실종되고, 담임 선생과 형사들은 전날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영희를 불러 경민의 실종에 관해 묻는다. 학교에 오지 않은 경민의 부재를 보면서, 영희도 마음 속에 한가닥 불안함이 꿈틀거리는데, 담임과 형사는 경민의 실종에 영희가 책임이 있다는 의미로 질문한다.
영희는 억울하다. 형사는 영희와 친하게 지내는 한솔을 불러 영희와 대질 심문을 한다. 한솔은 영희가 경민에게 '죽을 용기도 없는 게...'라는 말을 했다고 말하면서 영희의 말이 경민의 실종 또는 자살을 부추기는 말을 했을 거라는 의미로 말한다.
영희는 사실을 말하지만, 이때까지 관객은 영희와 한솔의 진술 가운데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영희의 태도는 자칫 도도하고 건방져 보이기도 하고, 담임을 비롯한 학교의 선생과 경민의 부모는 경민이 아무 이유없이 실종되거나 자살할 아이가 아니라고 믿고,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가장 만만한 아이가 영희였다. 실종 전날 밤 늦게까지 함께 있었고, 경민의 가방과 신발이 발견된 장소 부근에 있는 CCTV를 모두 조사한 결과, 경민이 다른 누군가에게 해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밝혀졌다. 그렇다면 경민과 마지막까지 있었던 영희가 대체 무슨 말을 했기에 경민이 실종 또는 자살한 것일까를 선생들과 형사들은 구체적으로 알아야만 했다.

영화에서 경민은 자살한 것이 확실하다. 다만, 경민이 왜 자살했는가에 관한 이유나 암시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중에 경민의 시신이 발견되고, 모든 사람들 - 선생들, 형사들, 심지어 같은 반의 친구들도 - 이 영희를 의심과 비난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면서, 영희도 억울함을 벗어나려고 자살을 기도한다.
영희가 병실에서 겨우 회복하던 어느 날, 같은 반 친구가 찾아와 경민의 집에서 유서를 발견했다고 알려준다. 즉, 경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유서를 쓰고 자살한 것이며, 영희가 함께 있었던 날은 우연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선생들과 같은 반 친구들은 - 그들 가운데는 영희의 집으로 쳐들어가 영희를 린치한 몇 명의 같은 반 친구들도 있었다 - 경민이 영희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고, 상황이 분명해지는 순간 모두 태도를 바꾼다. 영희를 의심하고 비난하던 친구들이 다정한 태도로 영희의 건강을 걱정하고, 병문안을 오며, 기꺼이 어려운 일을 돕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같은 세대의 갈등은 봉합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경민의 자살에 영희보다 더 책임이 있는 사람은 '한솔'이었다. 영희와 가까운 친구였지만, 영희가 경민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질투를 느끼고, 영희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것이다. 한솔은 영희가 병원에 있을 때 찾아가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한다. 영희도 한솔을 안아주고 입맞춤을 하는데, 이 영화에서 동성애 코드를 넣은 것이 적절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희와 한솔은 화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영희를 괴롭히는 또 한 사람은 경민의 엄마다. 경민이 자살한 직접적 원인은 알고 보면 그의 부모에게 있다. 경민의 부모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원인과 책임을 외부에서 찾으려 한다. 그래서 경민의 유서가 발견되었음에도 영희의 병실을 찾아와 영희를 괴롭힌다.

처음부터 영희의 말을 믿지 않았던 선생들과 형사들, 경민의 엄마는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경민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물으려 하고, 없는 죄를 덮어 씌우려 했던 기성세대에게 영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는 '자신의 죽음'이다. 그래서 영희는 표백제를 먹고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실패한 죽음 이후에도 영희는 끝없이 자살을 궁리한다. 이때 두번째 자살은 명백한 의도와 목적을 갖는다.
영희가 경민에게도 말했듯, 지금과 같은 의미 없는 삶이라면 사는 것과 죽는 것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고등학생은 가장 고통스러운 세대다. 이미 유치원,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서는 암기식 수업을 해야 하고, 여러 개의 학원을 다니며 밤낮 없이 공부, 공부, 공부만 하는 지겹고 역겨운 나날이 무려 12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여기에 부모의 무관심(경민), 가난(영희)과 같은 외부적 환경까지 겹치면서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들은 우울하고 괴로운 심리상태가 된다. 청소년들을 이렇게 망가뜨리고, 질식시킨 건 기성세대인데, 정작 그 기성세대는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 한다.
영희는 그런 기성세대를 보면서 환멸과 증오의 감정이 차갑고도 날카롭게 솟아나는 걸 느낀다. 영희는 한솔과 함께 경민의 엄마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한다. 자기(영희)는 경민이 왜 죽었는지 너무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경민이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자기 뿐이라고 생각한다. 내일이면 내(영희)가 왜 죽었는지 사람들이 당신(경민 엄마)에게 물어볼 거다. 그때 내 죽음에 대한 이유나 잘 대답하길 바란다.
즉, 영희는 경민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추악한 책임전가를 그대로 경민 엄마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앞부분에서 경민의 죽음을 두고 선생들, 형사들, 경민 엄마는 영희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한솔은 그 장면을 보면서 침묵한다.
이제, 영희가 죽게 되면,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은 경민 엄마가 되고, 그 옆에 한솔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 드러난다. 형사와 사람들은 영희의 죽음에 대해 경민 엄마에게 물을 것이고, 한솔은 역시 침묵할 것이다. 경민 엄마는 당연히 영희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이유를 댈 수 없을 것이며, 한솔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도 사과할 대상이 사라지고, 죄책감은 무겁게 그의 삶을 짓누를 것이다.

처음부터 경민의 죽음은 기성세대가 만든 원죄의 결과이며, 기성세대가 저지른 타살이다. 하지만 기성세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같은 세대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워 책임을 전가한다. 새로운 세대는 자신들이 당하는 고통과 억울함이 기성세대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되고, 기성세대에 대한 복수는 자기 자신을 죽임으로써 완성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김의석 감독은 이 작품이 장편 데뷔작인데, 나홍진 감독의 '곡성'에서 연출부로 일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이 영화의 주인공 대부분이 여성이어서 여성의 심리, 세부적인 생활 모습을 보면서 여성 감독인 줄 알았는데, 남성 감독이어서 놀라웠다. 
영희가 형사에게 추궁당하고, 마치 범인인양 낙인 찍히고 나와서 화장실에 앉아 생리대를 보는 장면은 영희의 심리와 이 영화의 주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영희는 죽을 만큼 억울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것은 하혈인 것처럼 보이는 다량의 생리혈을 보여줌으로써, 영희가 피를 토하는 심정이라는 걸 관객이 느끼게 한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다리를 향해 걸어가는 영희는 중간에 잠깐 멈추고, 뒤를 돌아볼 듯 하다 다시 걷는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굴다리 안쪽을 향해. 영희는 무언가 말하고 싶었던 게 있었을까. 성대를 다쳐 말을 하지 못하는 신세대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뱉어내지 못한다. 그의 침묵은 죽음보다 무겁다. 

배우 전여빈의 연기는 마치 '곡성'에서 어린이 배우 '김환희'의 연기와 비교할 수 있다. 그만큼 처절하고 극적이다. '영희'는 자존감도 있고, 자기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청소년이지만, 그 모습이 기성세대에게는 건방지고 불편하게 보인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신세대를 길들이려는 기성세대의 어리석은 모습은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억울한 심정을 꾹꾹 눌러 참으며, 자신을 죽임으로써 기성세대에 복수하겠다는 영희의 태도는, 죽을지언정 기성세대에 굴복하거나 길들여지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기성세대가 저지른 죄를 자신의 죽음으로 고발하겠다는 자기파괴적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여도 그같은 방법 밖에는 가지지 못한 약자의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영희'는 기성세대가 키운 훌륭한 신세대지만, 결국 기성세대가 죽인 신세대이기도 하다. 아니, '영희'는 기성세대가 키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 큰 신세대였고, 그를 죽인 기성세대는 오만하고 건방지며, 비겁하고, 야비한 존재였음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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