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지음 / 창비 / 2002년 6월
평점 :
책이 되어버린 당숙
성석제의 단편집에 수록된 [책]은 기묘한 이야기다. 당숙이 기묘한 사람이니 기묘한 사람의 일상을 쓴 내용이 독특한 건 어쩌면 당연할 수 있겠다. 성석제는 삶의 근본과 존재에 대해 늘 관찰하고 탐구하는 글을 쓴다. 그 재주가 뛰어나서 별 생각 없던 독자마저도 평범하기 이를데없는 주인공에게 관심을 쏟는다. [책]에 소개된 당숙만도 그렇다. 얼핏 봐도 이 이야기는 시덥잖은 내용에 그친다. 얼이 빠져 있는 서음書淫의 이삿날에 대한 화자의 기억이니까.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책이 되어버린 당숙에 푹 빠지게 되고 책의 의미까지 생각해보게 되니 이야기의 깊이가 매우 깊다.
당숙은 항렬이 높아 ‘나’에게 반말을 하지만 실상 동갑내기다. 손이 귀한 집에 자란 당숙은 곧잘 아팠는데 누이가 넷이라 양기를 뺏긴 탓이라며 조카인 ‘나’의 집에서 길러졌다. 부모의 손에서 자라야 마땅한 나이에 빼곡히 꽂힌 책에 둘러싸인 방에서 혼자 자랐으니 실상 당숙은 사람의 손에서 길러졌다기보다 책의 손에 길러졌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당숙은 일찍부터 월급을 받는 족족 생활에 쓸 수 있는 적은 돈의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모두 책을 구매하는데 사용했다. 습관이라면 습관인 이 괴벽은 평범한 직장에 눌러 붙을 수 있게 하지는 못해 결국엔 마지못해 사서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다가도 모를 당숙을 사람들은 늘 생각했다. 그의 어떤 매력이 그를 생각하게 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항상 책과 함께였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가 책인지 책이 그인지 모를 만큼 헷갈렸다고 ‘나’는 고백한다.
“결혼하기 전 어느 날 당숙이 고백한 바에 의하면 어린 시절부터 이십대까지 당숙의 가장 친한 친구는 나였다. 그러나 나 역시 당숙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내게 당숙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해서 총 아홉해 동안이나 같은 학교에 다닌 동기동창이지만 쉽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친구였다. 당숙은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어떤 자리에서나 뒷전과 그늘을 택했다. 그래도 조금 알 만해지는가 싶은 어느 순간 당숙은 책을 가지고 간단하고 손쉽게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다. 수업시간에 보는 교과서를 제외하고 어떤 책이든 당숙과 함께 있으면 당숙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면 당숙이 책을 들고 있었는지, 읽고 있었는지, 걸어갔는지, 소리를 냈는지, 책을 베고 잠을 잤는지, 책으로 파리를 잡았는지 도무지 기억할 수 없었다. 책은 당숙을 희미하게 만들고 당숙은 책과 사물의 경계선을 흐렸다. 그러면서도 둘은 섞여서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책]이라는 단편을 다 읽고 나면 한바탕 마당놀이를 본 것 같은 기분은 드는데, 어째 어안이 벙벙하다. ‘내가 당숙을 잘 알고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야기가 한결같이 당숙을 이야기하는데도 알고 있다고 할 만한 근거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가 없어 끝 맛이 개운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숙이 늘 손에 책을 쥐고 있다는 것만 명확할 뿐 좀체 당숙의 성격을 이해할 수가 없다. 책을 쉼 없이 읽는 당숙을 들여다보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읽어 내려갈 때, 곧 책이 되어버린 당숙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명확하게 책의 성질이 이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군가가 내게 ‘왜 책을 읽으세요?’나, ‘왜 책을 좋아하세요?’라고 묻는다면 ‘그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듯이 책과 당숙은 그런 존재다. 당숙은 이미 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보기에 당숙은 어떤 책을 읽어서 내용을 안다기보다는 디자인, 촉감, 냄새, 분량과 무게, 책장을 넘길 때 나는 소리, 거기에 더하여 책에 관한 독특한 육감을 가지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것 같다. (중략) 책을 읽기보다는 느끼려고 한다. 글자 하나하나의 생김과 책에 있는 낙서며 흠, 색깔을 기억한다. 마치 야생의 동물 수컷이 암켯에게 다가가 냄새맡고 살펴보고 노려보고 톡톡 건드리며 시험을 하는 것 같다. 그러고는 서로가 맞는다고 생각하면 존재의 일부를 섞고, 때로는 과감하게 올라타고 할퀴어 피투성이가 된다. 책과 당숙, 두 존재의 혼재를 1+1이라고 하면 그 결과는 2가 아니고 0이거나 –2가 되기 십상이다.”
이미 그는 책이 되었기에 당숙을 ‘나’는 끝까지 이해할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책과 당숙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내려놓고 나는 0이 되었는지 –2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 주위의 상황이 아무것도 변한 건 없으니 0 이하의 것이 된 것은 확실하다. 우리의 삶 곁을 지키고 있는 책에 오늘도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책의 의미를 묻게 한 아주 기묘한 이야기 성석제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