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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365] 독자여, 당신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입력: 2006년 12월 31일 17:39:47
 
미국 일리노이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 바락 오바마는 차세대 대통령 감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떠오르는 별로 알려지고 있는 사람이다. 마흔 다섯 살의 초선 의원이 정계 진출 3년 만에 이처럼 빠르게 부상한 것은 존 F 케네디 이후 처음이라고 한다. 이런 오바마 현상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정치에 실망하고 정치판에 덧정 떨어진 국민들에게 그가 신선한 희망으로 비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희망’을 말하기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 근년 한·미 두 나라 정치판은 기이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국민은 극단적인 분열과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풍비박산 쪼개져 있으나 정치는 이 분열을 치유할 힘이 없다. 정치 자체가 분열의 조장자이자 분열을 먹고 사는 독버섯 같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판은 진지한 토론과 숙고 대신 막말, 욕설, 비방, 험담으로 날 새는 저열하고 잔인한 정쟁의 지옥이 되어 있다.

-희망의 원천은 시민의 자질-

대립과 싸움은 정치의 숙명이다. 민주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대립이고 싸움이냐에 따라 정치의 품질과 수준은 한참 달라진다. 국민을 위한 봉사보다는 오로지 권력잡기가 목표일 때 정치는 사회악이 되고, 국가적 현안과 국민생활의 문제를 풀기 위해서보다는 당략과 점수따기를 위한 진흙던지기가 될 때 정쟁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싸움질로 전락한다.

인권변호사, 공동체 운동가, 시카고 법대 강사의 경력을 가진 오바마가 정치에 투신한 이유는 미국의 ‘깨진 정치과정을 수리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분열보다는 공통의 희망과 꿈으로 국민을 한데 묶어주는 일이 더 위대하고 시급하다는 것이 그가 최근 저서 ‘대담한 희망’ 등에서 말하는 희망의 정치 기조다. 당리당략과 이데올로기를 넘어 건강한 양식과 상식의 힘으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나가자는 주장도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정치 방법론이다.

-‘사회적 독서’를 시작해 보자-

금년은 우리에게 대선의 해다. 우리에게도 공동체를 위한 새로운 정치문화가 필요하고 정치과정의 대대적인 수리가 필요하다. 희망의 메시지도 그립다. 그러나 새로운 정치를 가능하게 할 궁극적인 힘은 ‘시민’에게서 나오므로 그 시민의 판단력과 자질이 또다시 요긴해지고 있다.

시민적 자질을 강화하는 첩경 중의 첩경은 누가 뭐래도 책 읽기이고 독서를 통한 숙고의 능력 키우기다.

무슨 책? 독자여, 나는 당신에게 어떤 책도 권할 생각이 없다. 나는 오히려 당신이 뽑아주는 책, 당신이 만드는 책들의 목록을 보고 싶다. 그 목록으로 우리가 사회적 독서를 시작하고, 이슈를 가리고 문제를 토론해 보는 것이 금년에 우리가 해야 할 소중한 일의 하나다.

경향신문이 새해 벽두부터 책읽기 문화의 확산을 위한 연중시리즈 ‘책읽기 365’를 시작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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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365] 한국의 문화유산-아리송한…불확실성의 美
입력: 2007년 01월 01일 18:12:39
 
한국 매스컴학의 대가인 최정호 교수는 극히 세련된 유럽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분이 한국 전통문화의 알짬들을, 그것도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이 세계화시대의 날카로운 요구에 대응하여 심오하면서도 간결하게 해석,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문화유산’이 그 책이다.

경제에 있어서의 산업화, 정치에 있어서의 민주화 이후, 문화에 있어서의 선진화를 생각하는 분들에게 유익한, 이른바 ‘한류’에는 안성맞춤인 책이 될 것이다.

포스트 한류의 과제이기도 한 콘텐츠와 미학의 문제가 15세기 세종대와 18세기 영·정조대, 그리고 이어서 21세기 한국 르네상스의 내용과 방향으로 뚜렷이 부각돼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문화철학의 핵심개념을 ‘생명성’으로 파악한 점 또한 예사롭지 않다. 19세기 생명예술의 시작인 ‘아르·누보’이후 현대유럽의 녹색예술이 그 깊은 아키타입을 제시하지 못함에 비추어 한국의 예술문화가 세계차원에서 오히려 그 계승자로 등장할 가능성에 대한 암시가 그것이다.

서구예술에 결여돼있는 역동적 혼돈성으로서의 한국적 생명의 멋에 대한 지적은 참으로 웅숭깊다. 일본 나라의 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을 ‘아리송한 불확실성(표渺)의 아름다움’ 또는 ‘꿈결같은 분위기’로 규정하거나 백제금동화로를 ‘혼돈적인 것’으로,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관통하는 미학을 ‘약동하는 청춘의 혼란한 아름다움’으로 인식하는 과정은 야나기 무네요시와 고유섭 이후 한국미의 숨은 중심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전북의 ‘판소리’ 이야기는 그 기이한 민중적 예술성이 전편을 압도하면서 일본이나 중국과는 비교도 되지않는 새로운 아시아적 콘텐츠를 한류의 앞날에 크게 열어놓고 있다.

〈김지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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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빛으로]헤브라이즘+헬레니즘… 기독교는 두 사상 ‘퓨전’
헤라신전
기독교(基督敎)란 크리스트(Christ=기독)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성립한 종교다. 크리스트의 정신(Christianism)은 구약성서를 바탕으로 하는 유대교의 헤브라이즘에서 출발하지만, 그 안에 머물지 않았다. 유대교는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자기 민족만을 선택하였다는 폐쇄성을 갖는 반면, 기독교는 유대교의 폐쇄성을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지향하는 보편적 지평에서 성립했다.

기독교의 창시자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고 난 후에,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의 울타리 안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 바깥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바울의 노력으로 예수의 가르침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레니즘의 세계와 라틴어를 사용하는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기독교의 지리적 확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 세계로 들어온 기독교는 헤브라이즘적인 색채와 성격을 잃어가며 점점 헬레니즘적인, 그래서 유럽적이고 서구적인 종교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헤브라이즘의 헬레니즘화(化), 아니면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퓨전 - 이것이 기독교의 운명이었다.

신(神)이 없는 종교라고 할 수 있는 불교와 유교의 사유방식을 알아야 동양의 문화와 사상을 깊이 이해할 수 있듯이, 신으로 충만한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퓨전이라 할 수 있는 기독교에 대한 깊은 이해는 서구 사유의 본질에 접근해 가는 중요한 지름길이 된다.

나아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서구화되어 버린 우리의 현재 모습과 정체성을 환히 밝혀낼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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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유하기]인문학을 깨우자 오늘날 시는 더 이상 낭독되지 않는다. 문학이 말해진다면 영화화된 작품이고, 예술은 ‘예술의 경영’과 등치되며, 문화는 ‘콘텐츠’없이 생각하기 어렵다. 휴대폰, 클릭, 블로그, 댓글…. 이것은 필요하다. 무엇보다 현실적 변화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지배적으로 된다면, 그것은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목록은 점차 늘어나고 있고, 속도도 더 빨라지고 있다. 수년 전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 Bourdieu)는 작가 귄터 그라스(G. Grass)와의 대담에서 유럽의 계몽정신은 오늘날 좌초한 듯 사라져버렸다고, 그래서 몽매주의에 빠진 이 나라(프랑스)에서 참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다고 말한 적 있다. 그는 에른스트 융거 같은 극우 작가에게 프랑스 대통령이 훈장을 수여하는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지만, 이것은 일반적 관점에서 봐도 타당해 보인다. 비판적 이성정신의 쇠퇴는 유럽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에서도 해당되고, 우리에겐 그런 전통이 부재했기에, 그 폐해는 더 심각해 보인다. 보수적 혁명의 거대한 물결이 오늘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면, 이 물결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시대정신은 최대수익을 겨냥하면서 기존의 세계관 전체를 뒤엎고 있다. 시장의 힘은 이제 경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적 정신적 문화적 분야에서도 위력을 발휘한다. 이윤과 효용을, 그것도 즉각적으로 내보이지 않는다면, 이젠 아무 것도 고려되지 않는다. 그래서 시를 말하고 예술과 문화를 언급하는 것은 한참 뒤떨어져 보인다. 빌려온 관념 앞에서, 그리고 이 관념의 언어 앞에서 논리를 존중하기보다는 감성에 휩쓸리며, 투명한 절차보다는 일탈과 비약을 선호하는 이 땅에서 우리는,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공론장이 형성되기에는 아직 멀었고, 시민성이 체화되기엔 여전히 이른 시각. 사람들은 명함과 이력을 다투어 내보이고, 사회는 실적과 성과를 어디서나 요구한다. 이것은 역으로 믿을 수 있는 언어가 그만큼 적고, 신뢰할 수 있는 태도가 드물어서일 것이다. 많은 것이 거짓 위로가 되고, 적잖은 언어가 사실을 떠난 이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적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광기에 대항하는 운동’…. 이런 말이 허황되게 느껴진다. 그보다 작은 일, 더 생생한 것은 무엇일까? 이럴 때면 중얼거리던 시 한 구절이 있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敵)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아픈 몸이’(1961) 중에서 김수영(金洙暎)은 이 시를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은 다음 썼다. 역사의 좌절과 이 좌절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시작해야 하는 어떤 다짐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것이 아니더라도 여러 관점에서 또 오늘의 시점에서도 이 작품은 읽힐 수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폭력성은 온존하고, 세계의 불합리는 지속되는 까닭이다. 삶의 적은 현실에도 있고 내 안에도 있다. 국내에 있듯이 국외에도 있다. 도처에서 나는 적을 만난다. 무수한 적들을 한 사람의 적으로 나는 만나는 것이다. 그렇듯이 이들은 예술의 밖에도 있고 학교 안에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이 편재한 적의 박멸이 아니다. 적은 그렇게 쉽게 소멸될 수도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스럽지도 않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는 이미 이 적에 감염되어 있는 까닭이다. 단순한 대립은 또다른 상처를 낳을 수 있다. 그렇다고 수긍될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늘의 관점에서 다시 검토되고, 더 나은 삶 안으로 포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보다 열린 감각으로 느끼고자 한다. 그리고 이 느낌을 사고의 변화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이때 택한 방식은 예술적·철학적·인문적 대응이다. 인문학은 마라톤이다. 그것은 경험의 운용이 아니라 그 성찰이라는 점에서 간접적이고, 효용이라기보다는 이 효용의 효용성을 묻는다는 점에서 반성적이다. 그리고 이 반성은 다시 경험의 조직에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문운동은 이처럼 여러 우회로를 지나간다. 그 점에서 비효율적이고 무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도처에서, 점점이, 물이 스미듯, 천천히 스며들며 작동한다. 그래서 전체에 영향을 끼친다. 무담보 소액신용대출(micro credit)처럼 예술의 방식은 작고 미세하지만 강력한 대응방법이다. 그것은 감각과 경험의 바닥에서 일어나는 미시적 반성활동(micro-reflection)이다. 사람이 사람과 이어져 있듯, 한 무리는 다른 무리에, 사회는 또 다른 사회에, 국가는 또 다른 국가에 얽혀 있다. 하나의 정체성은, 그것이 사회적이든 국가적이든, 고착될 때 추상화된다. 경직된 정체성은 현실이 아니라 허구다. 우리의 삶은 자신의 성격과 인성 그리고 성향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살아간다는 것의 참 의미다. 변화의 잠재력을 구현하지 못한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사회는 사회가 아니다. 개인이나 국가가 자신을 달리 형성시키고자 하고, 그렇게 형성시킬 준비를 갖추는 것은 이 점에서 정치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자본주의의 시민화’는 그 다음에야 말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적들과 함께, 적의 적들과 더불어, 무한한 연습을 하며, 우리 같이 가자.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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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빛으로](1) 신화의 변주-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구의 사상과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선 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신과의 관계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 했던 헬레니즘과 ‘신본주의’ 의 헤브라이즘을 아는 게 필수적이다. 사진은 헬레니즘의 본산지인 그리스 아테네 전경. 서해를 건너자. 광활한 중국대륙을 지나, 인도 문명이 태어난 갠지스강과 인더스강을 넘어, 페르시아 제국의 옛 영토를 가로질러가자.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고도(古都)를 지나리라. 그 땅이 끝나는 지점에 서자. 일렁이는 옥빛의 지중해 - 그 왼쪽으로는 나일강 문명의 본산이 자리 잡고 있으며, 오른쪽으로는 그리스와 이탈리아가 있어 구라파 대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피어난 서구 사상을 하나의 거대한 건물에 비유한다면, 이를 받치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바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이다. ‘헬레니즘(Hellenism)’이란 ‘헬라스(Hellas)’ 사람들의 문화와 사상을 가리킨다. ‘헬라스’란 영어로는 ‘그리스(Greece)’며, 한자로는 ‘희랍(希臘)’이다. 따라서 헬레니즘이란 고대 그리스(희랍) 사람들의 사상과 문화 전체를 가리킨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의 역사.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 기하학을 정리한 유클리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유레카(알아냈다)!”를 외치며 알몸으로 목욕탕을 박차고 나왔다는 아르키메데스. 문(文)·사(史)·철(哲)의 인문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과학의 영역에서도 고대 그리스인들이 쌓아올린 성과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이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 서구인들은 자신들의 현재 모습을 만들어냈다. 한편 ‘헤브라이즘(Hebraism)’이란 ‘헤브라이(유대)’ 민족의 사상과 문화, 종교를 가리킨다. 이는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을 중심으로 체계화되었고, 예수가 유대교 율법을 사랑의 원리로 완성시킨 기독교의 바탕이 되었다. 기독교는 당시 서구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로마를 지배하며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1000년 이상 중세를 지배하는 막강한 파워를 과시하였다. 근세의 종교개혁 이후 현대까지도 기독교는 여전히 서구 사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이며, 이런 까닭에 헤브라이즘을 빼고는 서구를 이해할 수 없다. 구약성서에 근거한 헤브라이즘의 세계 속엔 여호와라는 유일신이 중심에 있다. 인간은 유일신의 피조물이며, 오로지 창조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고, 그 영광의 후광을 입어야 진정 행복할 수 있는 존재다. 따라서 헤브라이즘은 이른바 ‘신본주의(神本主義)’라 불린다. 반면 헬레니즘은 인간이 중심이 된 ‘인본주의(人本主義)’라고 한다. 기독교가 중세 내내 위세를 떨칠 때, 이에 도전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던 인문주의자들이 “고전으로, 원전으로”를 외치며 헬레니즘의 ‘재생(Renaissance)’을 기도하였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과연 헬레니즘은 인간을 중심에 놓는 진정한 인본주의로서 신본주의와 맞서고 있는가? 적잖이 의심쩍다. 왜냐하면 헬레니즘을 단순히 인본주의라고 말하기엔 그 안에 너무나도 많은 신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독자들은 헬레니즘의 중심지였던 ‘그리스’에 제일 먼저 ‘신화(神話)’라는 단어를 연결시킬 것이다. 몇해 전부터 ‘그리스 신화’는 교양인의 필독서가 되었고, 관련된 책들이 쏟아져 나와 날개 돋친듯 팔려나갔다. 헬레니즘의 문학 속에는 온통 신들의 이야기가 메아리친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는 신들이 역동한다. 그리스 비극에는 인간과 신들 사이의 함수관계가 플롯의 궤적을 이끈다. 사포의 서정시에는 신들의 입김이 아련하게 후끈거린다. 문학뿐만이 아니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말한다. “신은 우주의 정신”이며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플라톤은 철학적 대화편 속에서 신에 대한 믿음과 경건함을 강조하며, 종종 논리적인 변증을 보류하고 신화적 설명에 의존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진실을 열망하고 탐구하는 철학의 최고 정점에는 모든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 중의 존재가 있다고 한다. 그 이름이 바로 신이다. 따라서 철학(philosophia) 가운데 으뜸 철학이란 ‘신에 대한 탐구’, 곧 ‘신학(theologia)’이 된다. 도대체 헬레니즘을 형성하고 주도하던 사람들 가운데 신을 이야기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어쩌면 신으로 충만한 세계를 가진 헬레니즘은 신을 향한 열정의 표현이며, 헤브라이즘과는 다른 방식의 신본주의일지도 모른다. 헬레니즘이란 신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고,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려는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헬레니즘의 원초적이고 핵심적인 패러다임을 ‘뮈토스(muthos)’라 할 수 있다. 이를 ‘신화(神話)’라 번역한다. 신화란, 말 그대로 풀어본다면 ‘신(神)’에 관한 ‘이야기(話)’다. 가장 넓고 소박한 의미에서 신화란 신이 등장하는 이야기, 신이 빠지면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다. 이런 규정 속에서 우리가 픽션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는 물론, 진지한 종교적 경전 역시 신화의 범주 안에 들어올 수 있다. 과연 신화는 픽션이고, 종교적 경전은 진리를 표현한다고 둘 사이에 경계선을 그을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우리들이 재미있게 읽고 있는 그리스 신화도 그것이 성립하고 유행하던 당시에는 픽션이 아니라 진실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제우스나 아폴론, 아테네 등과 같이 그들이 숭배하던 신들을 믿지 않는 불경스러운 인물이라고 사형을 언도하였다. 기독교의 이론적 초석을 닦았던 바울이 그리스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며 이적을 베풀었을 때, 그곳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취급하였다. “바나바와 사울이 발을 쓰지 못하는 지체 장애인을 낫게 하자, 사람들이 바나바를 제우스라, 사울을 헤르메스라 칭하고…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성문 앞에 가지고 와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다(사도행전 14장 8~20절).” 성경 속에 기술된 이 사건은 환하게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신화의 신들이 실존하며, 만물의 온갖 현상을 일으킨다고 믿었으며, 경건한 찬양과 제사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우리 시대의 종교적 경전은 머나먼 미래엔 흥미로운 ‘신화’가 될지도 모른다. 된장국에 된장만 있는 것이 아니듯, 신화엔 신만 등장하지 않는다. 거기엔 자연과 우주, 그리고 인간이 움직인다. 신화는 말 그대로는 신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결국 인간의 이야기이다. 헬레니즘의 문화 속에서 신화란 신을 통해 인간 세계의 역사와 자연과 우주를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고 유통되던 인식의 도구였음에 틀림없다. 이런 점에서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은 중요한 공통분모를 갖는다. 이로써 서구 정신의 건물 전체엔 신을 향한 인간의 지향성이 변주되며 깊게 울린다. 어찌 보면 서구인들은 신 없이는 제대로 사유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신화는 신화로 끝나지 않고 탈신화적 사유 속으로도 깊이 배어들어 갔다. 서구인들의 ‘신 중심적(theocentric)’ 사유의 경향성은 세계의 중심에서 ‘신(神)’의 이름을 지우더라도, 그 이름의 빈자리엔 다시 ‘신적(神的)’인 무엇인가를 놓고야마는 행태 속에서 이성이 신이 되고, 자본이 신이 되며, 과학이 신이 되고, 물질과 허무조차 신이 되는 사유의 틀 속에서 오롯이 도드라진다. 신이나 신적인 존재를 중심에 두고 모든 존재를 유기적인 통합체 속에서 설명하려는 사유의 방식, 그것이 서구 사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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