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메스의 빛으로](5) 영웅의 조건
입력: 2007년 02월 02일 15:05:38
-목숨 버려 불멸의 명예 얻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1대1 대결(루벤스 작).
나무는 슬프다. 하늘에 닿으려는 열망이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만 하는 운명으로 끝내 좌절되기 때문이다. 무궁무진한 하늘을 바라보며 나무는 땅에 붙박인 몸체를 안타까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는 아름답다. 땅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는 운명에 짓눌려, 하늘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늘이 너무 높아도, 계절이 잎을 무너뜨리고 혹독한 입김으로 헐벗겨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봄으로 살아나 꿋꿋이 하늘에 대한 꿈을 키워나간다. 절망은 없다. 찬란한 신록이 폭죽처럼 터져 하늘에 대한 희망이 계속됨을 천명한다. 나이테로 관록을 늘려갈수록 조금씩 하늘에 다가가며 열매를 맺고 새로운 씨앗을 땅에 뿌리며 꿈을 이어간다.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은 나무가 꾸는 꿈이 피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더 놀라운 것은 하늘을 향한 상승 욕구가 높아 갈수록, 땅속으로 자신을 더 깊이 뿌리박아 가는 나무의 지혜다. 단단한 땅으로 뚝심있게 파고들어 자신을 깊이 묻어가는 한편, 창공을 향해 끊임없이 높이를 더해가는 나무의 생태. 땅으로 깊어 갈수록 하늘로 높아 갈 수 있음을 아는 지혜가 심오하다. 살아서 하늘로 날아오를 수 없는 한 하늘에 대한 희망은 망상일 뿐이라고, 뿌리가 깊어갈수록 하늘로 상승하려는 소망은 더욱 더 실현될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한계를 알면서도 도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절망하지 않기에, 나무는 진정 위대하다.

인간도 나무처럼 슬프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 죽음 이후엔 허무뿐일지도 모르는 존재. 하지만 그 운명에 굴하지 않고 영원을 지향하는 인간은 아름답다. 마치 나무가 땅의 꿈으로 끝나고 말 하늘에 대한 열망을 끝까지 간직하며 하늘로 가지를 뻗어 올리듯, 꼭 그렇게 죽어 없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안고도 영원함을 ‘멋지게’ 열망하던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기원전 8세기경)에서 노래되는 영웅들의 열정은 독특하다. 불로초(不老草)를 구하여 이 땅에서 육체적인 수명을 무한히 연장해 보려했던 진시황의 집념과는 다른 열정. 그것은 이 땅의 삶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피안의 영역에서 영원한 신의 품에 안기려는 기독교의 종교적인 노력과도 다르다. ‘나’를 지움으로 모든 고통과 찰나의 구속을 벗어나려는 해탈의 수행도 아니다. 이 세상의 삶을 값진 것으로 여기면서 죽음을 엄연한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불멸의 명예를 통해 영원하고자 하는 데서 그리스 영웅들의 모습은 고유한 빛을 발한다.

“어머니께서도 나에게 말씀하셨지. 은빛 발을 가지신 여신 테티스께서도/두 가지 운명 중에 하나가 나를 죽음의 종말로 데려간다고./만일 여기 남아 트로이아인들의 도시를 둘러싸고 싸우면/나에게 귀향이란 없어지지만, 명성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만일 내 고향 땅 집으로 돌아간다면/나에게 고귀한 명성은 없어지지만, 나의 수명은 길어질 것이며/나에게 결코 죽음의 끝이 일찍 찾아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트로이아 전쟁(기원전 1200여년경)의 최고 영웅 아킬레우스에겐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었다. 평범하게 살며 장수를 누리는 길과 장렬하게 단명하며 불멸의 전설이 되는 길. 누구나 죽는다. 죽으면 ‘나’는 없어진다. ‘내’가 죽어 없어진 후에도 계속 살아남는 길은 나의 자식과, 나의 자식의 자식들에게 나의 이름이 기억의 대상으로 영원히 남는 것. 나의 명성이 멀리 사방으로 퍼져 나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회자되는 것.

아킬레우스의 선택은 분명했다. “이제 나는 가겠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헥토르를 만나러/죽음의 운명을 나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 언제든/제우스가 또 다른 불사의 신들이 끝내시길 원하시면/헤라클레스의 힘도 죽음의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크로노스의 아들 제우스에게 가장 사랑받는 자였음에도. 운명이, 그리고 헤레의 참기 힘든 분노가 그를 제압했습니다./그처럼 나도, 만일 나에게 똑같은 운명이 정해졌다면/죽어 눕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고귀한 명성을 얻고 싶습니다.”

생각해보라. 아킬레우스는 3200여년 전 죽었으나, 그는 지금 여기 한반도에 사는 우리들에게도 기억되는 이름으로 여전히 살아있지 않는가? 그는 죽었으나 불멸한 영웅의 길을 택하였기에 지금도 살아있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스 영웅에게 최고의 가치는 불후의 명예. 그런데 불멸의 명예를 위해선 하나뿐인 목숨을 걸어야 한다. 불멸하기 위해선 ‘끝내주게’ 죽을 수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죽기를 두려워하며 죽음을 피하려고 할 때, 이 땅 위에서 조금 더 길게 살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불멸의 명예를 얻을 순 없다. ‘멋지게’ 죽지 않는다면, 잊혀진다. 잊혀진다면, 끝장이다. ‘장렬하게 죽을 때 불멸한다’는 비극적인 이율배반-이것이 영웅들의 덕목이다. 트로이아의 전사 사르페돈은 출정하며 이렇게 말한다. “여보게 친구, 만약 우리 둘이 이 전쟁을 피하여/영원히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있을 수 있다면/나 자신이 맨 앞에 서서 싸우진 않을 것이다. /남자를 명예롭게 하는 싸움터로 너를 보내지도 않을 것이다./하지만 지금 헤아릴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버티고 서 있으며/그것들을 인간들은 피할 수도 없고 모면할 수도 없으니/나가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명성을 주던가, 누군가가 우리에게 줄 것인즉!” 죽음이 항상 도사리는 싸움터는 영웅들에게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장소였다. 이곳에서 시시하게 죽어선 안된다. 대충 버티고 살아남거나 비겁의 오명과 모욕으로 남아선 안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거나 더러운 이름으로 기억되는 것. 그것은 영원한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일리아스’에서 인간을 수식하는 전형적인 표현은 “죽을 수밖에 없는(thnethos)”이다. 반면 신에 대해선 “죽지 않는(athanatos)”이라는 표현을 쓴다. ‘죽음’이란 인간과 신을 가르는 결정적인 한계선이다. 그 선 아래에서 인간의 규정은 끝나고, 그 선 위에서 신의 규정은 시작된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을 안고, 불멸의 명성으로 영원을 지향하던 영웅에게 그리스인들은 “신을 닮은(theoeides)”이라는 형용사를 부여한다. 죽음이라는 인간조건의 한계를 안고, 한판뿐인 인생을 걸어 불멸의 명예를 열망하던 영웅은 불멸하는 신을 닮은 존재. 그는 신과 인간의 경계선 위에서 죽음으로 죽지 않는 신비로운 외줄 타기를 하며 보는 이들의 경탄을 자아낸다. “노장 프리아모스가 두 눈으로 맨 먼저 그를 보았다./별처럼 반짝이며 들판 위를 질주하는 그를./그 별은 늦여름에 떠오르니, 그 찬란한 광채는/밤의 심연 속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돋보이나니/그 별을 오리온의 맹견이란 별명으로 부른다./가장 찬란하지만 이것은 불행의 징조니/가련한 인간들에게 수많은 열병을 가져다준다./꼭 그처럼 달리는 그의 가슴 위에서 청동이 빛을 뿜고 있었다.” 헥토르를 향하여 돌진하는 아킬레우스는 천상의 별을 닮은 지상의 별이다. 땅 위에 불멸하는 눈부신 이름이다.

〈김헌|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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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유하기]‘석궁테러’ 그 자율과 관용사이
입력: 2007년 01월 26일 15:12:49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100년쯤 전에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당시의 군부나 사법부의 반유대적 국수주의적 편견에 ‘나는 탄원한다’라는 글로 항의한 바 있지만,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하게 느껴진다. 민주화 20주년이라 정치·제도적 조건이 전보다 나아졌고, 사는 일이나 문화적 향유도 좋아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사건들은 이런 질문에 회의적으로 답하게 한다. 지난 주 보도된 이른바 ‘석궁 테러’는 그런 사건들 중의 하나다.

전직 성균관대 교수인 김명호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해서 한 판사를 석궁으로 쏴 깊이 1.5㎝의 상처를 낸 것이다. 이 사건은 멧돼지를 잡는 데나 쓰는 석궁과 교수란 직함이 빚어내는 불협화음, 그리고 이 불협화음을 강조한 ‘석궁 교수’라는 선정적 제목 아래 늘 그렇듯 경쟁하듯 보도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자 이런 포퓰리즘적 보도가 아니라 일의 전체 맥락을 조명해야 한다는 반성까지 곁들여지면서 잠잠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내게 떠나지 않는다. 자꾸 떠오르며 날 우울하게 한다.

보도에 의하면, 김씨는 세계정상급의 미국수학학회지에 3번이나 논문을 게재했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대학 본고사 문제의 오류를 지적해서다. 그는 문제의 전제조건이 모순되므로 응시생 전부에게 만점을 줘야 된다고 했지만, 학교측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총장에게 서면으로 항의하자 동료 교수들은 학교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그의 ‘징계’를 요구한다. 임용에서 탈락된 그는 한국사회를 떠난다. 뉴질랜드와 미국에서 그는 무보수로 일하며 살고자 발버둥쳤을 것이다. 그렇게 보낸 10년 동안 아이들은 어떻게 학교를 다녔고, 이들 부부는 무얼 먹고 살았을까?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처럼 헌법의 기본권(Grundrecht)에 속한다. ‘기본권’이란 말 그대로 기본-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바탕(Grund)이 되는 권리(Recht)를 규정한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보면, 나는 이 기본권이란 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본다.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실제로 하나 발생한 것뿐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 ‘그럴 만하다’는 것이 한 사람을 자기 땅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못 살도록 방해하고, 나아가 그 삶을 뿌리에서부터 뽑아버린다면, 우리는 이 땅을 ‘조국’이라 부를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왜 늘 우리의 이웃을 떠나가게만 하는가?

나는 김씨의 폭력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판결이, 이런 판결을 수긍하지 못해 속병 든 이가 어디 한 둘인가. 그렇다고 해도 그는 끝까지 납득할 만한 테두리 안에서 탄원해야 했다. 부당한 법도 법질서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드높은 요구지만 포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이나 안 좋아 보인 것은 동정론이 확산되자 ‘긴급 확대회의’후 반박자료를 돌리던 사법부의 반응이었다. 국민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었다면,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투의 판에 박힌 성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위기의식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의식이 아닌가 여겨졌기 때문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정당한’ 주장보다 사회적으로 추방된 한 사람의 10년 고통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제의 모순이다. ‘전제’란 어떤 일이 시작되기 전에 있는 구조적 조건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진위 자체가 아니라, 이 일을 일어나게 한 토대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사건의 줄기를 잡고 끝까지 파 들어가 보면, 늘 이런 전제조건-사건 이전적 토대의 하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뿌리는 하부구조적 조건의 불합리성이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문제보다 더욱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토대의 불합리성 문제는 쉽게 제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투명성에 그 누구도 자기만의 위험을 감수하거나 그의 삶이 희생되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또 언제라도 이런 말 못할 배척과 오해, 이기와 수모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합리성을 줄여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 이성과 법치국가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치사상사 교수인 켄틴 스킨너는 ‘노예성(servitudo)이란 다른 사람의 자의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현대인의 노예적 삶을 비판한 적 있다. 다소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전쟁이나 평화 같은 중요 문제를-그는 영국의 이라크 참전을 언급한다-국민에게 알림 없이 ‘왕의 특권’으로 결정한 영국 의회정치의 제도적 모순을 지적한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삶을 다른 사람의 자의에 맡긴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는 그 나름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단체-집단의 익명성과 모호한 충동에 자신을 맡긴다. 독단과 폭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정당하게 보이는 많은 결정조차 ‘거친 생존의 게임’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 늘 일어나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것을 전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성적 사회는 이같은 모순이 없는 곳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 두는, 두려고 애쓰는 사회다. 법이 참으로 넓은 의미의 공적 이익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 사회의 토대는 허물어진다. 여기에 자유가, 인간 품위가, 문화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공동체가 합리적 시민사회로 되려면, 개인은 자율성을 더 훈련해야 하고 집단은 더 높은 관용성을 구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학문의 자유’나 ‘사법부의 권위’ 같은 말은 그럴 듯하나 허황된 사치로 남을 것이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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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유하기]사고없는 美는 거짓이다
입력: 2007년 01월 19일 14:56:47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의 궁륭(1524년, 플로렌스). 직사각형의 규칙적·기하학적 구조에서 느껴지는 질서, 규칙적 질서의 둥근 배치에서 오는 움직임은 온전하고 완전한 무엇, 미의 어떤 원형을 떠올리게 한다.
벌써 수년 전 일이지만 귀국한 지 얼마 안됐을 때 ‘에스테틱’이라 적힌 간판을 길거리 지나다가 본 적 있다. 미학 강연장인가,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게다가 다들 깨끗하고 화려한 실내를 갖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은 주름을 없애고 코도 높이는 화장과 성형의 장소였다. 이것도 미와 무관하지는 않다.

아름다움의 욕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또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그것은 이전에도 그랬고, 중국이나 일본, 서구에서도 마찬가지다. 미의 이런 광적 추구가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은 스타들의 세계일 것이다. 스포츠나 대중음악 분야도 그렇지만 영화계가 대표적이다.

할리우드에서 미는 흔히 날씬함에 있다고 여겨진다. 살 빠지면 예뻐 보이고 날씬하면 인기가 치솟는다. 그래서 배우는 더욱 살을 빼고, 감독은 이런 배우를 열심히 찾아낸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살을 빼야 한다. 최근의 한 신문은 이것을 ‘할리우드의 굶주림 나선’이라 부르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즐겨 굶고, 먹더라도 음식을 나중에 토해낸다. 그러다보니 음식을 아예 삼킬 수 없는 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거식증(拒食症)이나 음식구토증이 그것이다. 많은 배우의 다리는 나뭇가지처럼 말라있고, 심할 때는 죽기까지 한다. 실제로 적잖은 배우들은 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는다.

여기서 보는 것은 단순히 미의 광적 추구나 취향의 획일주의가 아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이런 피상화에서 야기되는 심미적 보편성의 실종이다. 구치 가방을 들고 폴로 모자를 쓰면 미를 선도하는 듯 자랑하지만, 아무도 이 진짜가 참으로 진짜인지 묻지 않는다. 그래서 가짜는 진짜와 뒤섞인다. 그러나 진선미가 얽혀있는 것이라면, 미의 왜곡은 진과 선의 왜곡이기도 하다. 이런 폐단은 우리의 경우 더 심해 보인다. 미의 역사는 길지 모르지만, ‘미에 대한 논리적 사고의 역사’, 즉 미학적 전통은 우리에게 짧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왜곡이 왜 일어나는지는 간단치 않다. 오늘날의 미는 생활 속에서, 스스로 의식하는 가운데 대개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라이프스타일(life style)’로 나타난다. 그래서 누구나 미를 즐기고 스스로 구현하는 듯한 득의감 또는 착각을 갖고 있다. 기미와 주름을 제거하면 아름다워진 것 같고, 쌍꺼풀 수술을 하고 가슴을 키우면 시대의 미적 기준을 충족한 것처럼 여긴다. 자신이 미를 직접 주도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사회적 낭비를 늘 탓할 수는 없다. 근검함도 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고, 이 사회가 불필요한 수요에 의해 지탱되는 면도 있기 때문이다. 광고나 선전은 이런 가수요를 나서서 부추긴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문화의 추동요인에 낭비적 요소가 있는 까닭이다. ‘장식의 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불필요하게) 꾸미면서 이렇게 꾸민 자신에 의해 (유용하게) 지탱되는 잉여적 측면이 문화에는 분명 있다. 이 나르시시즘은 소비에서 가장 활개를 친다. 우리는 쇼핑할 때 흔한 만족감에 젖지 않는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말하기란 까다롭다. 그것은 미학사를 보면 시대와 지역에 따라 계속 변해왔기 때문이다. 가령 중세 때 미는 신이나 신적 완전성의 표현이었다. 18세기까지 미는 대체로 예쁜 것이었고, 19세기로 오면 추함도 포함된다. 미의 탈신화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현대에 올수록 심해진다. 그만큼 미의식이 소극적·부정적으로 되는 것이다. 현대의 미는 너무 분화돼 심지어 미 없이도 이해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왜 미가 아직도 매력적인가?

아름다움이 중요한 것은, 간단히 말해, 그것이 나의 느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도 느끼는 것-객관적으로 공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나와 대상은 미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칸트는 이것을 ‘주관적 일반성’이라고 불렀지만, 미는 내가 느끼는 것(주관적·감각적)이면서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는, 느낀다고 생각하는(객관적·이성적) 것이다. 따라서 미는 감각과 사고, 개인과 사회를 ‘잇는’ 일이 된다. 이 매개 속에서 바른 미는 현실을 성찰한다.

그러므로 감각만의 미는 반쪽의 미다. 감각이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다면, 그 미는 거짓이다. 참된 아름다움은 나와 타자, 현실과 이념을 잇고, 이 이어짐 속에서 두 세계의 대립을 넘어선다. 미는 이어짐이고 넘어섬이고, 이 넘어섬 속의 균형이다. 그리고 이 균형 속에 행해지는 반성이다. 반성의 능력이야말로 참된 아름다움이다. 왜냐하면 반성으로 하여 대상의 미는 나의 미가 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메디치 예배당’(1524)의 궁륭은 이런 느낌을 준다.

이것은 르네상스 건축예술의 고전적 미를 잘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이 아니더라도 천장의 모습은 어떤 질서와 움직임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질서는 직사각형의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구조에서 올 것이고, 움직임은 이 규칙적 질서의 둥근 배치에서 올 것이다. 그래서 리듬 속에서 상승감을 느끼면서도 온전하고 완전한 무엇을 떠올린다. 현대의 심미적 시각에서 보면 고답적인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럼에도 미의 어떤 원형을 생각케 한다. 심미적 반성으로 나는 나를 넘어선 전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전체란 온전한 것, 그래서 좋은 것이다. 결국 미는, 플라톤이 말했듯 선에 대한 참여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에는 이런 온전성이 빠져있다. 감각은 사고되지 않고, 외양은 내면과 겉돌기 때문이다. 예쁘고 젊고 날씬하고 섹시한 것이 미의 전부라고 여기는 사회는 가련하다. 가는 허리와 쌍꺼풀진 눈만이 미의 표본이라 불린다면, 우리는 이 표본을 누가 만들어내는지 물어봐야 한다. 유행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 현실을 자기 식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다. 미는 내가 대상을 얼마나 제어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것이 이 화장술의 한국사회-무반성적 나르시시즘의 문화에서 내가 갖는 미에 대한 생각이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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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사유하기]들라크루아 ‘단테의 조각배’
입력: 2007년 01월 12일 14:58:29

현실이 어렵고 세계가 불투명하게 보일 때, 마음이 어둡고 패잔감이 쌓여갈 때 떠올리는 그림이 하나 있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가 그린 ‘단테의 조각배’(1822)다. 시인 보들레르가 “르네상스를 잇는 마지막 위대한 화가이자 근대의 첫 화가”라 칭했던 그는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으로 흔히 불린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흠모했고 루벤스를 존경했다. 몸짓과 표정, 자세와 근육을 표현하기 위해 앞선 거장의 작품을, 그림이든 메달이든 조각품이든, 가리지 않고 연습했다. 시스티나성당의 벽화는 한 예다. 그는 호머와 셰익스피어, 코르네이유와 라신 같은 작가도 부지런히 읽는다. 그 가운데 단테와 버질은 선생 중의 선생이었다.

그림을 보자. 중앙에는 두 인물이 서 있다. 왼쪽은 르네상스 이탈리아 시인인 단테이고, 오른쪽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버질(베르길리우스)이다. 등을 보이며 노 젓는 이는 사공 플레기아스다. 이들 주위로 지옥의 저주받은 자들이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몰려들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치듯 하늘은 어둡고 물결은 출렁이며 저 멀리 성벽이 검은 연기 속에 불타고 있다. 단테는 스승 버질의 안내로 지옥을 돌아다닌다. 이 대목은 지옥문을 지나 디스라는 도시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단테는 흰 옷에 수도사의 붉은 두건을 쓰고 있다. 왼팔은 버질에 기댄 채 오른쪽을 보며 구명을 청하듯 손을 흔들고 있다. 버질은 그 옆에서 갈색 망토를 두르고 월계관을 쓴 채 믿기 어려울 정도의 평정을 유지하는 듯하다. 단테를 다독이듯 그는 그 왼손을 잡고 있다. 요동치는 물결에 배는 금세라도 뒤집힐 듯하다. 지옥의 무리들은 뱃전을 잡거나 사람을 밀치거나 서로 싸우고 있다. 배를 드러낸 채 탈진해 있는가 하면, 배 뒷전을 물어뜯는 이도 있다. 단 한 사람, 건너편에서 오른팔을 배에 걸친 이만이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당신네는 누구인가라는 듯.

지옥의 사람들이 배 주위를 에워싼 채 불안과 분노로 흔들리고 있다면, 배 안의 두 사람 단테와 버질은 상대적으로 침착을 유지하는 모습이다. 미술사가 율리우스 마이어 그래페는 이를 두고 “움직이는 수평성과 고요한 수직성”이라 했지만, 이것은 내게 현실에 대면하는 어떤 자세로 보인다.

단테는 당시 민중언어이던 이탈리아어로 ‘신곡’을 썼고, 군인으로 전쟁에 나가거나 외교관으로 정치 활동을 하기도 했지만 거듭되는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결국 추방되는 운명을 맞는다. 그럼에도 그는 정치론과 교육론을 집필하고, 도시와 정파를 중재하기도 한다. ‘신곡’은 그의 이런 삶, 지옥 얘기가 아닌 1200년대 이탈리아에 대한 알레고리다. 그는 고향 플로렌스로 돌아오지 못한 채 56세로 라벤나에서 죽는다. 추방된 자로서 운명을 마친 것이다. 이것은 조형예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려 했으나 거절된, 그리하여 7번의 시도 끝에 회원이 된 들라크루아를 생각나게 한다. 단테가 버질을 스승으로 삼아 지옥기행에 나서듯, 그는 이 두 시인을 정신의 사표로 삼아 예술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혁명과 왕정복고로 점철된 당시 상황에서 그가 택한 나름의 현실 응전법이었다.

‘단테의 조각배’에서 색채는 강렬하고 인물들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다(바로크적이다). 그러면서 극적 효과를 위해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고 양식적으로도 우아하다. 이것은 버질의 태도에서 느낄 수 있다(고전적이다). 역동적·충동적이면서도 합리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상상적·허구적인 이중성은 초기부터 말년까지 들라크루아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고전주의와 근대성 사이에서 그는 균형을 잡고자 했고, 낭만주의는 이런 근대성을 구현한 사조로 여겨졌다. 색채적 강렬성은 이 낭만성을 잘 보여준다.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균형은 이 예술적 긴장의 정치적 변형이었을 것이다. ‘신곡’의 ‘8번째 노래’에서 단테는 이렇게 말한다.

“저 자는 현세에서 참 거만하였지.

남을 만한 선행은 아무 것도 안 했어.

그래서 그 그림자가 저렇게 미쳐 여기 산다네.

왕이라 대단한 듯 자기를 여긴 이들은

끔찍한 악평을 남기며 언젠가

이곳 진흙탕 속에 돼지처럼 나뒹굴 거야.”

밀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서 성난 얼굴로 밀치고 찢고 뜯고 때리는 사람들의 싸움. 분노를 이기지 못하면 늘 불안하다. 이들의 광분과 두 시인 사이의 대조. 어둠과 빛, 광기와 정적, 삶과 죽음의 드라마. 이 모든 것은 선명한 색채 안에 녹아있다. 보들레르가 지적했듯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파괴와 살육, 그리고 화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영원한, 나아질 수 없는 야만을 증거”한다. 나의 시선은 저주받은 자들에게서 항해하는 자, 노 젓는 자에게서 손짓하는 자로 나아가고, 명상하는 자로부터 허우적거리는 자로 다시 돌아온다.

오늘의 우리는 단테처럼, 또 단테를 그린 들라크루아처럼 지옥의 강을 따로 떠올릴 필요가 없다. 지금의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폐허와 죽음, 폭력과 울음은 역사에 항구적이다. 하루에도 수백명이 파산신청을 하고, 똑같은 일을 같은 시간 해도 동일한 돈을 받지 못하는 수백만명이 이곳 반도의 남쪽에 산다. 지구 전체는 살 만한 곳인가. 쉼 없이 떠나고 목숨을 끊는 현실의 유황불은 보이게, 보이지 않게 있다.

영혼도 육체도 고통의 기억 없이, 추방의 경험 없이 살 수는 없을까? 스스로 인간성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수치에 불과하다. 살아 있을 때 선하지 않으면 진흙 속 돼지와 다를 바 없다. 예술의 보편성은 바로 이 점, 당파나 관점을 벗어나 오늘의 지옥을 반성하는 데 있다. 그래서 죽은 자의 영혼 이야기는 산 자의 행동에 대한 얘기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들라크루아의 그림도, 단테의 시도 그르칠 것이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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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 빛으로]② 헤르메스와 피롤로기아의 결혼
입력: 2007년 01월 12일 14:58:19
독일의 귀족 가문 출신인 헤라드 본 란스베르그가 학문의 즐거움을 맛본 뒤 한 화가에게 청탁해 그 희열을 담아 그린 ‘환희의 정원’(1180년 경). ‘일곱 자유교양학문’ 체계가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천상과 지상이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된 우주사적 사건이 한번 벌어진 적이 있다. 400년께에 천상을 대표해서 헤르메스라는 청년과 지상을 대표하는 필로로기아라는 처녀가 주신 제우스를 중심으로 만신들이 회합한 가운데 성대한 혼인을 통해 영원해로(永遠偕老)의 길에 들어선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이 결혼이 성립하기까지는, 여느 연인들의 혼인 과정이 그러하듯이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카르타고 출신의 작가 마르티아누스 카펠라(400년대 활약)는 ‘메르쿠리우스와 필로로기아의 결혼에 대하여’라는 저술에서 밝히고 있다.

어느날 올림포스의 신궁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이 잔치는 모든 신들이 부부 동반으로 모이는 자리였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 부부, 전쟁의 신 아레스 부부, 저 멀리 이집트의 이시스와 오시리스 부부도 초대받았고, 짝이 없는 야누스 신도 두 얼굴을 한 채 잔치에 참여했다. 그런데 부부 동반으로 모인 신들의 다정하고 즐거운 모습에 헤르메스는 그만 노총각의 외로움을 느끼고 말았다. 고민 끝에 헤르메스는 아버지 제우스에게 결혼 결심을 밝힌다. 그러나 어느 아버지가 자식의 혼인을 반대하랴만, 아버지도 아버지 나름의 고민과 걱정이 있었다. 저 성실한 헤르메스가 젊은 여인의 품에 안겨 나태함에 풀어져 버리면 열여섯 구역(천계가 열여섯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는 세계관)으로 나눠진 저 드넓은 우주의 운행과 통치에 큰 차질을 빚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여 헤르메스가 달콤한 사랑에 취해 하루라도 늦잠을 잔다면, 전 우주의 통신체계(?)가 뒤죽박죽 될 것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외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헤르메스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제우스는 남편의 업무를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도와주는 내조의 현명함을 지닌 배우자와 혼인하는 조건으로 아들의 결혼을 승낙한다. 헤르메스의 마음에 맨 처음 떠오른 여신은 지혜롭고 순결하며 성스러운 소피아(지혜)였다. 그러나 소피아는 헤르메스의 누이인 아테네 여신의 자매였고, 아테네 여신과 도무지 떨어지려 하질 않았다. 그러자 헤르메스는 프쉬케(영혼) 여신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모든 신들의 사랑과 귀여움을 독차지하면서 자랐던, 그러나 우주의 법도를 알만큼은 알고 있었던 그녀이었기에 자신의 신부로 딱이라고 헤르메스는 생각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뜻밖의 비보를 접한다. 프쉬케가 천하의 난봉꾼인 쿠피도(욕정)에게 눈멀어 그를 따라 가버렸다는 것이다. 장가가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헤르메스는 아폴로에게 조언을 청한다. 아폴로는 헤르메스에게 차라리 지상 세계에서 짝을 구하라고 권한다. 마침 필로로기아라는 처자가 있는데 한번 보겠냐고 제안한다. 그녀는 비록 지상의 여인이었지만 프쉬케 못지않게 절세미인인 데다 고고한 소피아에게 견줄 만한 지성과 교양을 겸비했으며, 오히려 소피아에게 결여된 인간적인 다정함이 있는 그런 여인이었다. 천상의 세계를 어지럽힐 위험이 없는, 그래서 제우스도 흡족할 만한 그런 여인이었다. 이렇게 해서 노총각 헤르메스도 마침내 장가를 가게 된다.

헤르메스의 청혼을 받게 된 지상의 필로로기아! 그러나 남편과는 면식 한번 제대로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천상으로 시집가는 일이 좋은 일이긴 하지만, 어찌 잘 모르는 이와 하는 결혼에 대해서, 그리고 낯선 천상의 생활에 대해서 두려움을 갖지 않으랴. 그러자 수(數)에 밝은 그녀는 결혼생활이 행복할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헤르메스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을 수로 풀어본다. 먼저 그녀는 이집트인들이 헤르메스를 토오우트라 부르는 사실을 이용해 헤르메스의 이름값을 계산한다. 그 결과 그녀는 헤르메스의 이름이 상징하는 수가 3임을 알게 된다. 이어 자신의 이름 ‘Philologia’를 풀이하는데, 이를 통해 그녀는 4를 얻는다. 3은 시간적으로 시작과 중간과 끝을 포함하고, 공간적으로 모든 모습을 그려낼 수 있는 선(線)으로 표상되는 천상의 수인 반면, 4는 우선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가장 완전수인 10을 만들 수 있고(1+2+3+4=10), 여기에 천상과 지상의 춘하추동(春夏秋冬), 동서남북(東西南北), 지수화풍(地水火風)을 아우르는 지상의 수이다. 이렇게 얻은 3과 4를 합해서 가장 축복받은 만남을 상징하는 7을 얻는다. 숫자 7은 이성과 지성의 완성을 상징(키케로의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하기 때문이다. 7을 얻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결혼이 이성과 지성의 완성을 뜻한다는 것을 깨닫고 희열에 잠기게 된다.

그런데 헤르메스와 필로로기아의 만남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지상의 인간에게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들의 만남을 상징하는 숫자 7은 지상의 인간이 천상의 세계로 승천(昇天·일곱 자유교양학문을 통해 인간은 승천, 구원이 가능하다는 게 카펠라의 입장)할 수 있는 도구와 방법들로, 나중에 중세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제도화된 학문의 수를 상징한다. 오늘날에도 3학 4과로 잘 알려진 자유교양학문들(artes liberales)이다. 3학에는 문(법)학(grammatica), 논리학(logica), 수사학(rhetorica)이 속하고, 4과에는 기하학(geometria), 산수(arithmetica), 천문학(astronomia), 음악(harmonia)이 속한다. 3학은 원래 헤르메스가 관장하는 영역이고, 4과는 필로로기아가 주관하는 영역이다. 천상의 의사소통을 관장하는, 곧 언어 영역(logos)을 총괄하는 신이 헤르메스이고, 자연의 실상과 운동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인간의 이성의 탐구 노력을 주관하는 이가 필로로기아이기 때문이다. 양 영역의 통합적 탐구를 통해서 인간 지성은 그 완성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현대용어로 풀이하면, 이들의 만남은 인문학과 자연학의 결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 인문학의 위기는, 어떤 사연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헤르메스와 필로로기아가 별거 중이어서 생겨난 것은 아닐까? 이들의 별거를 끝내는 방법은 없을까? 한가지 희망은 있는 것 같다. 필로로기아 처녀의 이름이 그것이다. 이것은 ‘말(logos)을 사랑하는(philein) 처녀’를 뜻한다. 필로로기아는 이름 자체에서 헤르메스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을 통해서 지성의 완성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존재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릇 학문(philologein)이란 것은 자체 운명에 의해 규정된 목적(logos)을 향해, 그러니까 지성의 완성을 위해 외적 조건과 ‘관계없이’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안재원|서울대 협동과정 서양고전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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