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사유하기]‘석궁테러’ 그 자율과 관용사이
입력: 2007년 01월 26일 15:12:49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100년쯤 전에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에서 당시의 군부나 사법부의 반유대적 국수주의적 편견에 ‘나는 탄원한다’라는 글로 항의한 바 있지만,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공허하게 느껴진다. 민주화 20주년이라 정치·제도적 조건이 전보다 나아졌고, 사는 일이나 문화적 향유도 좋아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간헐적이지만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사건들은 이런 질문에 회의적으로 답하게 한다. 지난 주 보도된 이른바 ‘석궁 테러’는 그런 사건들 중의 하나다.

전직 성균관대 교수인 김명호씨가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해서 한 판사를 석궁으로 쏴 깊이 1.5㎝의 상처를 낸 것이다. 이 사건은 멧돼지를 잡는 데나 쓰는 석궁과 교수란 직함이 빚어내는 불협화음, 그리고 이 불협화음을 강조한 ‘석궁 교수’라는 선정적 제목 아래 늘 그렇듯 경쟁하듯 보도되었다. 그러다가 며칠 지나자 이런 포퓰리즘적 보도가 아니라 일의 전체 맥락을 조명해야 한다는 반성까지 곁들여지면서 잠잠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은 내게 떠나지 않는다. 자꾸 떠오르며 날 우울하게 한다.

보도에 의하면, 김씨는 세계정상급의 미국수학학회지에 3번이나 논문을 게재했다고 한다. 사건의 발단은 그가 대학 본고사 문제의 오류를 지적해서다. 그는 문제의 전제조건이 모순되므로 응시생 전부에게 만점을 줘야 된다고 했지만, 학교측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총장에게 서면으로 항의하자 동료 교수들은 학교명예를 실추시켰다며 그의 ‘징계’를 요구한다. 임용에서 탈락된 그는 한국사회를 떠난다. 뉴질랜드와 미국에서 그는 무보수로 일하며 살고자 발버둥쳤을 것이다. 그렇게 보낸 10년 동안 아이들은 어떻게 학교를 다녔고, 이들 부부는 무얼 먹고 살았을까?

학문과 사상의 자유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처럼 헌법의 기본권(Grundrecht)에 속한다. ‘기본권’이란 말 그대로 기본-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바탕(Grund)이 되는 권리(Recht)를 규정한 것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다. 우리 현실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사건들을 보면, 나는 이 기본권이란 말에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본다. 어처구니없는 것들이 실제로 하나 발생한 것뿐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 ‘그럴 만하다’는 것이 한 사람을 자기 땅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못 살도록 방해하고, 나아가 그 삶을 뿌리에서부터 뽑아버린다면, 우리는 이 땅을 ‘조국’이라 부를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이곳은 왜 늘 우리의 이웃을 떠나가게만 하는가?

나는 김씨의 폭력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당한 판결이, 이런 판결을 수긍하지 못해 속병 든 이가 어디 한 둘인가. 그렇다고 해도 그는 끝까지 납득할 만한 테두리 안에서 탄원해야 했다. 부당한 법도 법질서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이것은 드높은 요구지만 포기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큼이나 안 좋아 보인 것은 동정론이 확산되자 ‘긴급 확대회의’후 반박자료를 돌리던 사법부의 반응이었다. 국민에 대한 신뢰가 쌓여 있었다면, ‘사법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했다’는 투의 판에 박힌 성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 위기의식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단의식이 아닌가 여겨졌기 때문이다. 힘 있는 사람들의 ‘정당한’ 주장보다 사회적으로 추방된 한 사람의 10년 고통이 먼저 떠올랐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제의 모순이다. ‘전제’란 어떤 일이 시작되기 전에 있는 구조적 조건이다. 그것은 어떤 일의 진위 자체가 아니라, 이 일을 일어나게 한 토대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사건의 줄기를 잡고 끝까지 파 들어가 보면, 늘 이런 전제조건-사건 이전적 토대의 하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뿌리는 하부구조적 조건의 불합리성이다. 이것은 사건 자체의 문제보다 더욱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토대의 불합리성 문제는 쉽게 제거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투명성에 그 누구도 자기만의 위험을 감수하거나 그의 삶이 희생되도록 내버려둬선 안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중 누구라도 또 언제라도 이런 말 못할 배척과 오해, 이기와 수모의 피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불합리성을 줄여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권과 민주주의, 이성과 법치국가의 이름을 말할 수 없다.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치사상사 교수인 켄틴 스킨너는 ‘노예성(servitudo)이란 다른 사람의 자의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현대인의 노예적 삶을 비판한 적 있다. 다소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전쟁이나 평화 같은 중요 문제를-그는 영국의 이라크 참전을 언급한다-국민에게 알림 없이 ‘왕의 특권’으로 결정한 영국 의회정치의 제도적 모순을 지적한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현실을 비추는 데도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삶을 다른 사람의 자의에 맡긴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는 그 나름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단체-집단의 익명성과 모호한 충동에 자신을 맡긴다. 독단과 폭력은 여기에서 나온다. 정당하게 보이는 많은 결정조차 ‘거친 생존의 게임’ 이상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현실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이 늘 일어나고,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것을 전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성적 사회는 이같은 모순이 없는 곳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 두는, 두려고 애쓰는 사회다. 법이 참으로 넓은 의미의 공적 이익을 헤아리지 못한다면, 그 사회의 토대는 허물어진다. 여기에 자유가, 인간 품위가, 문화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공동체가 합리적 시민사회로 되려면, 개인은 자율성을 더 훈련해야 하고 집단은 더 높은 관용성을 구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까지 ‘학문의 자유’나 ‘사법부의 권위’ 같은 말은 그럴 듯하나 허황된 사치로 남을 것이다.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