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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의 자화상’ (1648) | 옛날 초상화의 인물들은 날 불편하게 한다. 그들은 신이나 왕, 귀족과 같은 이른바 ‘고귀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이미지는 대체로 무뚝뚝하고 고상하며 근엄해 보인다. 마치 인형극 속의 꼭두각시처럼, 아니면 공식 석상의 인물들처럼 입은 꽉 닫혀있고, 눈빛은 주변을 경계하는 듯하다. 표정은 가면처럼 굳어있고, 친밀감을 느끼기 어렵다. 자세나 몸짓, 동작과 행위는 의례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들 주인공은 곧 상인 같은 신흥자본가들로 채워진다.
역사적으로 보면 초상화의 인물들은 대개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 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 삶을 상징하는 여러 소품들-비단이나 털모자, 귀고리나 반지 같은 금은 세공품 등-이 늘 주위에 배치돼 있다. 그러나 이같은 대상은 차츰 변한다. 돈과 힘과 권위를 가진 인물들로부터 화가의 가족이나 친구, 일반 서민으로 모델이 옮겨지면서 초상화는 지난날의 이상화된 형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좀더 현실에 밀착한다고나 할까. 무엇을 과시하거나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 자체, 인물의 성격과 고민과 세계관이 표현되는 것이다. 자기를 그린 초상화, 자화상에서는 개인의 복잡다단한 내면이 특히 잘 나타난다.
렘브란트(1606~69)의 자화상은 회화사에서도 유일무이하다는 평을 받는다. 남아있는 유화는 거의 쉰 개, 에칭판화는 서른 개, 소묘는 열 개 정도 된다. 라이덴에서 화가로 활동하기 시작하던 스무살 무렵부터 암스테르담에서 죽을 때까지 그는 거의 매년, 때로는 1년에 여러번 자신을 그렸다. 동시대의 루벤스가 네 개, 푸생은 두 개, 벨라스케스는 단 한개의 자화상을 그린 것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난다. 그 많은 자화상 가운데 내가 즐겨 보는 에칭판화가 하나 있다. ‘창가의 자화상’(1648)이다.
이 판화에서 렘브란트는 작업 중이다. 열린 창가로 빛이 들어오고, 그는 무엇인가 그리고 있다. 그리다가 잠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쳐다본다. 여기에는 젊은 날의 화려함이나 야심이 없어 보인다. 입은 옷은 낡은 작업복이고, 모자도 흔히 쓰는 멋들어진 화가의 것이 아니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평범한 모자. 길게 늘어뜨린 머리나 멋 부린 이전의 턱수염 대신 코밑수염이 나 있다. 그는 더 이상 외모에 무신경한 듯하다. 나이 마흔 둘. 나는 오로지 나를, 세상을 기록할 것이니. 응시하는 눈빛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대상에게 무언가 기대하기보다는 이 대상을 투시하려 하고, 이 투시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꿈꾸는 듯하다. 주위에 있으나 속하지 않은 그러나 속하고 싶은 어떤 세계를 그는 떠올리는 것인가.
‘창가의 자화상’은 9년전에 그린 ‘돌 벽에 기댄 자화상’(1639년)과 자주 비교된다. 챙 없는 모자를 비껴 쓴 채 그는 정면을 주시한다. 입을 꽉 다문 채 왼쪽 어깨를 내밀고 있다. 눈빛은 이때도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옷은 화려하고 모자도 한껏 멋을 풍긴다. 장갑의 무늬나 목걸이의 십자가도 보인다. 팔이 기댄 벽은 허물어지고 금 가 있지만 어떤 결의가 느껴진다. 존경하던 티치안이나 라파엘을 거울삼아 그는 이 그림에서도 모자의 형태나 위치, 몸의 자세를 바꿔 묘사한다. 대가의 이상을 배우고 따름으로써, 그러나 다르게 표현함으로써 이들처럼 독자적 길을 가겠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겐 마흔 둘 때의 작업복 모습이 더 맘에 든다. 그래서 방에 걸어놓고 시간 날 때마다, 지나칠 때마다 쳐다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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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벽에 기댄 자화상’ (1639) | 이전의 화가와는 달리 렘브란트는 교회나 왕실, 귀족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가 기댄 사람들은 막 태동하기 시작하던 미술시장의 고객들이었다. 그 점에서 그는 자본주의적 시장원리를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원리에 종속된 화가는 아니다. 예술의 상품시장화 속에서도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창출했기 때문이다. 미술학자 존 몰리뉴는 그를 “반자본주의적 화가”라 말했지만, 사실 16세기에 유화가 번성한 것은 점증하는 자본의 구매력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거래와 교역, 유통과 무역의 발전이 유화의 시장적 구매를 지탱한 조건이 된 것이다. 이는 르네상스 시기 플로렌스와 베네치아의 회화 발전이 무역상을 통한 엄청난 부의 축적으로 가능했던 것과 같다. 그림은 동시대 지배계급의 소유욕과 이데올로기적 관심-자신의 정치경제적 힘을 확대코자 하는-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지만 그러나 하나의 관점이다. 우리는 경제적 조건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다. 예술의 표현은 무엇보다 물질적 필요와 이념적 갈구 사이의 줄다리기 아닌가. 그러면서 이런 갈구에는 쉽게 말하기 어려운 충동과 내적 의지도 작용한다. 그러니 지난날의 렘브란트 해석이 흔히 그러했듯이, ‘자기탐구’나 ‘영혼’ ‘개인성’의 의미만을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예술가와 작품, 그리고 시대조건의 상관관계를 함께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의 작품과 이를 둘러싼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듯, 모티브와 양식 그리고 역사적 조건과 문화적 정신도 동시에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당시에 널리 퍼져있던 전통적 회화규범을 무조건 추종하지 않았다. 인물이 아름다울 때도 있지만 추한 모습도 여지없이 드러내고, 구성은 정제돼 있지만 그렇다고 일률적이지 않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것을 적극 받아들였지만, 이런 수용은 ‘현실에 충실하는 한도 안에서만’ 허락됐다. 그 외의 것은? 모두 자기 원칙으로 대신한다. 현실에 기반한 창조적 변형의 능력이 독자적 세계를 일군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관찰 속에 사람들의 일반적 고찰내용을 모두 녹여버린다.
나는 그리며 산다. 나는 숨쉬며 그린다. 나는 그리며 견디고 웃으며 그린다. 이렇게 그리며 판화 속 렘브란트는 내게 말한다. 지금은 일할 때, 네 세계를 구축할 때라고.
〈문광훈|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독문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