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을 어루만지면 창비청소년문학 123
박영란 지음 / 창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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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아래 초록 풀밭에 잠긴 집 한 채, 집 옆엔 흔들리는 그네, 2층 테라스 밖을 내다보는 두 사람, 아래쪽 풀 숲 그늘에서 그 집을 바라보는 두 아이. 박영란 장편소설 시공간을 어루만지면의 표지는 집과 풀밭에 나눠선 인물들을 반짝이는 은색 세로선 안에 묶는다. 서로 다른 존재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한 순간을 암시하듯이.

 

박영란 작가는 장편 나의 고독한 두리안 나무(자음과모음, 2011)로 데뷔한 이래 꾸준히 청소년 소설을 써오고 있다. 편의점 가는 기분』 『게스트하우스 Q』 『안의 가방등을 출간하면서 "혼란스러운 성장의 단면을 깊이 있게 조망하는가 하면, 청소년문학의 아름다움을 갱신"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작가는 성인과 아동 사이, 시시각각 두 시기 사이를 오가는가 하면 '청소년기'의 독특함 또한 내재하고 있는 날들에 주목한다.

 

시공간을 어루만지면은 시골에서의 삶을 선택한 아버지와 도시를 떠나지 않으려는 엄마의 결정에 의해 이사하게 된 남매가 등장한다. 고등학생인 화자 나는 아버지의 무책임한 이주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운데 어떻게든 도시에서의 삶을 꾸려보려는 엄마의 노력에 힘을 보내려 한다. 부족한 돈으로 반지하와 원룸 이외에 최선의 선택지는 앞 건물의 그늘에 가려진 외진 2층집. "2년만 살자"는 엄마의 말에 이끌려 좁은 통로를 지나 들어간 그 집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알미늄으로 만든 작은 방울 소리거나 녹슨 철 조각이 조심스럽게 서로 부딪는 소리 같".

 

아버지의 갑작스런 퇴직과 귀향은 나머지 가족들에게 혼란을 안겼다. 중산층의 삶은 한 순간에 쪼개져 이사와 전학이 반복된다. 시골의 남편을 안착하도록 돕과 아이들의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엄마는 하루가 달리 소진돼 간다. 고등학생 누나인 ''는 초등학생 동생 '' 앞에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낼 수 없다. 아버지는 멀게만 느껴지고 엄마에게 힘듦을 더 보탤 수도 없다. 엄마와 나 그리고 준은 각자의 복잡한 시간을 버티고 있다.

 

"이 세상에 속고, 이 도시에 속고, 직장에서 속았다"며 시골 살이를 떠난 남편을 따라 어느 날 갑자리 삶의 터전을 바꿀 수 없었던 엄마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나와 준도 마찬가지. 대출로 지탱되었던 중산층 생활을 정리하자 두 집으로 나뉜 살림은 빠듯했다. 엄마는 다시 일자리를 찾았고 아이들은 바뀐 생활에 적응해야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이루어질 만한 꿈"을 꾸는 사람들이었다. "자라면서 매 시기마다 계획한 범위 안에서 일이 이루어지는 걸 경험한 사람"들로서는 하루 아침에 달라진 삶터를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아버지가 도대체 무엇에 속았다는 것일지 생각할 때가 있다. 아버지 역시 엄마처럼 이루어질 만한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면서 살았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눈앞에 보이는 꿈들을 이뤄 내면서 살아온 아버지가 어째서 속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p.49

 

나와 동생 준이 2층 집의 캄캄한 다락방에서 안정감을 찾을 즈음 아래층에서 수상한 소음이 들려오고 곧 그 집에 사는 사람이 나의 가족만이 아니란 걸 알게 된다. 비어 있다던 아래 층에는 할머니와 아이 둘이 숨어 살고 있었다. 아래층 식구들이 숨어 살게 된 사연을 공유하는 동안 나의 가족이 견디고 있는 시간이 지나간다.

 

딸이 두고 떠난 쌍둥이 자작과 종려를 거두면서 아들이 팔아버린 자기 집에 숨어 살아야 하는 할머니의 상황은 나의 엄마의 다른 모습같다. 할머니를 묵묵히 도우러 오는 손자의 존재는 나의 모습과 중첩되고 험한 상황 속에 녹아들어 적응하는 쌍둥이는 동생 준의 또다른 모습같다. 서로가 서로의 의지가 되는 한 때를 보내고 두 가족은 각자의 새로운 출발선에 선다. 맘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선택'이라고 할머니가 말한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인생에 속수무책으로 쓸려갈 것이냐 혹은 그 때 할 수 있는 선택을 하고 의지에 따른 삶을 살 것이냐. 선택이라는 행위는 나름의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 아닐지. 스스로 의미있는 가치를 부여한 시간은 그것이 혼돈과 절망의 모습을 하고 있다해도 견딜만 한 것이 되지 않을지.

 

그때 할머니는 인생을 두고 너무 아름다운 꿈을 꾸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아름다운 인생이 분명히 있을 테지만,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름다운 인생은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럼 어떤 인생이 아름다운 건데요?"

() 할머니가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맘먹은 대로 되지 않았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달렸지. , 거기에 달렸지."

pp.154-155

작가는 애초 "서백자 할머니와 자작, 종려를 죽은 사람들로 설정"했었다고 한다. 소설 속에서 이들 세 사람과 또 다른 손자 장희의 삶은 시종 모호하다.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설명만으로는 그들의 시간이 선명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설정때문이기도 할테지만 우리가 이웃과 맺는 관계의 방식 역시 그러하다지 싶다. 우리가 주변과 마음을 주고 받을 때 그들의 현재 삶이 구성된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할머니 아들의 욕심으로 동네에서 가장 훤했던 2층 집은 빌딩의 어둠에 잠기게 됐다. 그러나 그 집에 숨어든 할머니와 손녀 그리고 2층에 세를 얻은 나의 가족은 서로가 힘겨운 한 때를 건너도록 돕는다. 각자의 다른 삶이 시작되고 연결은 끊기지만 지나간 "환영 같은 세계"는 그 세계를 통과한 사람들 사이에 남아 그들만의 시공간이 된다.

 

오래된 이곳은 누군가가 살던 자리였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무너진 자리였다. 그 자리에서 다른 누군가는 다시 시작한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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