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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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 출판사가 '지식공동체 그믐'에서 진행한 윤고은 작가의 신작 『불타는 작품』 북클럽에 참여했다. 『불타는 작품』은 앞서 발표한 작가의 단편  「불타는 작품」과 「Q」를 모티브로 격월간 소설잡지 <Axt 악스트>에 일 년 넘게 연재됐던 소설이다. 단편 「불타는 작품」에서는 후원하는 작품을 불태워야 한다는 설정을 가져오고 「Q」에서는 도시이름과 이미지를 가져왔다. 두 단편에 동시에 등장하는 '개' 역시 장편이 된 『불타는 작품』의 주요 등장인물(동물?)이다.


소설을 읽기에 앞서 윤고은 작가 인터뷰를 팟캐스트 <책읽아웃>에서 들었다. 배경 설정 파격적인데다 미리 알면 안될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다니 본 내용을 읽기 전 궁금증이 폭발했다. 작가의 목소리는 발랄명쾌했다. 책에서 배어나오던 음울함은 당췌 느낄 수 없는 하이톤이었다. 작가는 해외독자들이 『밤의 여행자들』을 유머러스하게 받아들이더고 전하며 블랙유머를 작품의 한 요소로 소개했다. 『불타는 작품』 속 블랙유머는 어떤 모습이려나 싶었다.


소설은 기본 설정부터 범상치 않다. 조작할 수 있는 카메라만 보면 사진 그것도 탁월한 구도의 작품 사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찍어내는 개가 등장하고 실종 끝에 국립공원에서 연인과 함께 고립돼 죽은 채 발견된 재벌집 외동딸의 미스터리 거기에 생업에 종사하느라 예술혼에 회의를 느끼는 라이더에게 어느 날 도착한 막대한 후원제의까지. 상식(이라고 여기는 무엇)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상처럼 늘어서 있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할 거라면 이쯤에서 책을 덮으라는 듯이 말이다.


초반에 몰아치는 상상력의 파고를 넘고 나면 화가 안이지가 겪는 창작의 고통과 작품이 갖는 고유의 가치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들어선다.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것처럼 당도한 후원의 기회에 고마워 하는 시간은 잠시이고 혜택 수령을 위한 험난함이 길고 지리하게 이어진다. 공항에 픽업은 실종, 담당자 연락 두절, 숙소 포화, 간신히 연결된 재단의 부실한 대응, 예정없이 길어지는 대기 기간 그리고 시시각각 가까워오는 산불이라는 재연재해. 과연 이것은 수혜인가 그것을 가장한 고난인가. 


우여곡절 끝에 도달한 '로버트'라는 개이름을 딴 후원 재단에서는 또다른 모습의 시련이 기다린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야 하는 강박을 시설 전체가 고수하고 있었으며 통역을 건너 개의 언어는 우아한 모멸감을 자아낸다. 재단과 결연을 맺고 작가의 예술적 모티브가 된 도시 Q의 압박이 만만치 않은 가운데 작품 전시 기간은 시시각각 닥쳐온다. 


로버트는 예술이 현실의 이면, 꿈을 넘어가서 계속 되는 빛나는 이야기라고 정의한다. 개는 색맹으로 알려 있는데도 불구 산불 지역의 위성 사진을 보며 붉은 빛의 아름다움을 논하고 작가가 입은 의상의 색상 배치를 칭찬한다. 특별한 심이안을 발휘하는 개 로버트가 선택하는 작품은 그것이 무엇이든 훌륭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로버트에게 인정받은 작가는 이후 탄탄대로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작품만 희생한다면.


나는 예술이 그런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막다른 골목이지만, 꿈으로 넘어가서 계속 얘기하자고 말해주는 마음. 그게 예술가가 우리에게 심어주는 빛이죠. 안이지 작가님, 당신의 전시가 끝난 후에도 나는 한동안 당신 작품 속에서 살고 있을 겁니다.

p.148


재단이 자비로운 후원 대신 안이지에게 제시한 조건은 후원을 받는 기간 동안 생산한 작품 중 재단 주인 로버트가 정하는 단 하나를 불태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안이지는 불태울 용도를 가정하고 작품을 만든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가운데 떠오른 영감이 작품이 된다. 그리고 로버트는 소각로에 들어갈 단 하나를 선택하는데, 안이지가 목표로 한 그것이었다. 그런데 개의 선택 이후 안이지의 마음이 묘하게 변화한다. 불태울 것을 감안해 버려지는 것이 당연한 재료까지 활용한 작품에 애정이 샘솟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가 사랑하는 작품을 로버트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로버트가 선택한 작품을 작가가 사랑하게 되는 구조겠죠. 어떤 경우에든 작가는 사랑하는 걸 불태울 운명을 피할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당신은 결국 그것과 사랑에 빠질 겁니다.

p.186


소설은 안이지가 불태워질 작품에 쏟는 집착과 그 작품이 갖는 실제 작품성의 의미를 은밀히 묻는다. 작가가 부여하는 의미, 감상자가 부여하는 의미, 작품 주변인이 의도적으로 생산한 의미 등. 어떤 의미로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인가, 만일 한 가지 의미가 의도적으로 비대해져 가치가 상향된 작품이라면 그것은 진실로 가치있는 작품일 것인가. 어떻게 생산된 의미이든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수요자가 많은 작품은 가치있는 작품일까.


로버트 재단의 소각식 퍼포먼스는 작품의 소멸과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을 연료로 예술 수요자의 주의를 끈다. 재단이 설립되기까지 거친 화제성과 소각에 얽힌 스토리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재단의 권위에 힘을 실어준다. 재단은 에술의 가치를 좌우할 수 있는 권위자로서 지위를 누린다. 


어떻게 트리밍 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표정을 갖게 된다. 빌의 경우에도 그랬다. 소각식을 의심한 적은 없었으나 유령 같은 작품으로 인해 그는 상하좌우, 프레임 밖의 세상을 더듬어보게 된 것이다. 빌의 말은 결국 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로버트가 소각한 작품들이 어디로 가는가? 소각식 이후에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닌가.

p.295


화려하게 예고된 화형식의 제물이 될 작품을 구출하기로 마음먹은 안이지가 뛰어든 문 안쪽에는 정교한 로버트 스토리의 '이후'가 있었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기괴한 사건이 가뭄 끝의 폭우 속에 펼쳐진다. 붉게 타오르던 화재를 덮어버린 폭우, 폭우에 멈출 수밖에 없었던 소각식. 재단으로 향할 때 일어난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던 화재를 멈추게 한 폭우는 소각식의 가능성을 떠내려 보냈다. 화형식을 치르지 못한 작품 그리고 작가는 이 폭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폭우에 의해 휩쓸려간 또다른 무엇이 있지 않을까. 안이지는 작품의 구조와 희생 중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진 않을까.


주인공의 이름 '안이지', 배달 앱 '빨리', 대체 가능한 복제품을 연상시키는 개의 이름 로버트(로봇?) 등, 윤고은 작가는 작명에 남다른 특기가 있다. 작명이 별 고민 없이 순식간에 이뤄진다는 점은 더 놀랄 거리다. 개의 심미안에서 비롯한 '로버트 월드'는 그 이면을 드러낸 후 "프레임 밖"을 떠올리는 '안이지 월드'로 탈바꿈한다. 『불타는 작품』을 넘은 이후에 예술을 대할 때 '작품에 대한 사랑'의 근원을 질문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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