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작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선량한 보통 사람의 무의식에 잠재한 '차별'의 넓고 깊음을 길어올렸던 저자 김지혜가 이번에 '가족'의 공고한 '정상성'을 질문한다. 아직 출간 전이어서 『OO각본』이라는 표제가 붙은 샘플북을 출판사로부터 받아 보았다. 제목에 대한 궁금증은 프롤로그 '가족이라는 각본'에서 바로 풀렸다. 전작에서 누구에게나 해당되(지만 본인은 모를 수 있)는 편견의 실체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국가 소멸을 운운케 하는 저출생 문제의 근본 원인인 가족을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당신의 OO은 '정상'입니까?

차별 없이 평등한 OO을 꿈꾸는 모두에게


가족 제도에 대해 저자의 촉발한 한 문장이 있다. "며느리가 남자라니 웬 말이냐!" 차별금지법이 거론될 때마다 등장하는 외침인 모양이다. 이 "개탄의 구호"를 외치는 쪽은 차별금지법이 동성결혼을 인정하면 도덕이 땅에 떨어지고 문란해지며 결과적으로 출산율이 떨어져서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를 편다. 주장의 불편함은 둘째치고 여러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목소리가 큰 힘을 얻고 있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여전히 요원한 일로 남아있고.



김지혜 저자는 "가족 안에서 우리의 관계와 역할은 왜 성별로 규정되며, 애초에 이 역할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파고든다. 도덕, 윤리, 전통이라고 믿어지는 정상 가족을 상정한 '각본'에 빨간펜을 들이댄다. 그리고 질문한다. "며느리가 여자여야 하는 게 더 문제가 아닌가?", "결혼을 해야 출산하고, 결혼을 하면 출산하는 게 당연"한가?, "동성커플의 등장으로 성별 분업이 해체된 가족은 어떨"까?, "성교육이 가족질서를 유지하는 규율로서 작동하"는가?, "한국사회가 애써 지키는 가족각본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가족각본을 넘어선 가족과 제도"는 어떤 것일까?



샘플북에는 책의 프롤로그와 1장부터 3장까지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미리 공개된 차례를 살펴보면.


프롤로그 가족이라는 각본

1장 왜 며느리가 남자면 안 될까

2장 결혼과 출산의 절대공식

3장 초대받지 않은 탄생, 허락받지 못한 출산

4장 역할은 성별에 따라 평등하게?

5장 가족각본을 배우는 성교육

6장 가족각본은 불평등하다

7장 각본 없는 가족

에필로그 마피아 게임


"출산 기반인 결혼이 해체되면 "사회적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종말적 예언"에 대한 반론 과정이 인상적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로서 출산의 적법성을 가리려는 이유를 따져보면 "남성에게 결혼 밖에서 출생한 자녀에 대해 아무런 의무도 지우지 않음으로써" "부정적인 재정적 결과를 피하면서도 성적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서 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저자는 문제의 원인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한편 "자기 자식을 버"리려는 의식적인 의도라기보다는 "남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어온 역사적 배경에 기인한다"는 (부분)면죄부를 주어 논의를 극단화하지 않는 묘수를 발휘한다.



저출생을 논의하는 대목에서 출생 당사자인 아이를 중심에 놓아보는 시도도 주목할 만하다. 앞선 세대를 부양할 인구가 부족하다던가 나라가 없어질 거라는 정치 경제적 위기의식을 부각시키는 것이 과연 출생에 무슨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태어난 아이를 국가 유지나 경제 부양의 부속품으로 취급하는 사회가 아이를 양육할 자격이 있는 것일까. 당신이 태어날 아이라면 이런 사회에서 나오기로 결심할 것인가.



출생하는 아이의 입장으로 관점을 돌리면, 사람의 탄생을 맞이하는 마음이 어떠해야 할지 다르게 보인다. 국가의 존속과 발전보다는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 존엄하고 평등한 삶을 살 수 있는가. 양육자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도 행복한 시간을 나누며 성장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사람을 그 자체로 존엄하게 여기지 못하고 도구로 취급하는 사회에 기꺼이 태어날 아이가 있을까. 자신이 어떤 삶의 제비를 뽑을지 모르는 불평등한 세상에 나오기로 마음먹는 일이 쉬울까. 어쩌면 지금의 낮은 출생율은, 사람이 어떻게 태어나든 존엄하고 평등한 삶이 보장되는 사회가 될 때까지 세상에 나올 수 없다는 아이들의 절박한 집단행동일지도 모른다.

pp.62-63


결혼을 출산의 전제 조건으로 여기지 않는 (이른바 선진국인) 나라들은 높은 합계출산율을 유지하고 있다. 동성결혼과 혼외출산을 인정하는 이들 나라를 문란하고 비도덕적이라고 손가락질 할 것인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전통의 틀에 급변하는 미래 사회를 우겨넣으려는 시도는 재앙일 뿐이다. 경직된 결혼과 가족 제도를 출산의 기반으로 한정한다면 (상상하는 바로 그) "사회적 재앙"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가족각본에 관한 무수한 의심과 질문을 던질 뿐 해답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며 양해를 구했다. '우리 사회가 이러한 질문이라도 충분히 해볼 수 있는 상황인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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