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올더스 헉슬리 지음, 안정효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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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는 위험을 내포하는 자유와 안정이 전부인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했다가도 위험 앞에서 나약하게 안주하려 하는 존재인 동시에 규격화된 안정속에서 성장한 후에라도 본능이 분출하는 개별성을 드러내는 존재다. 자유 또는 안정, 둘 중 어느 한쪽으로만 구성된 행복은 불가능한 일. 그렇다면 그 둘이 이룰 수 있는 최상의 행복 비율은 어느 정도인 걸까. 똑같아야 할까. 어느 쪽의 비율이 더 높아야 할까. 개별 인간의 개성에 따라 서로 다른 비율이어야 하는 걸까. 『멋진 신세계』는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책이다.


기분을 통제하는 약 소마가 규칙적으로 지급되고, 인공수정으로 아이가 만들어지고 계급에 따라 세뇌시며 양육하는, 모든 오락이 장려되지만 문학과 철학 등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학문은 제한되는 『멋진 신세계』의 설정은 잘 알려져 있다. 헉슬리 이후 발표된 디스토피아물에서 이런 설정들이 종종 활용되다 보니 원조격인 『멋진 신세계』가 클리셰로 느껴졌다. 계속 '이 책이 원조다, 1932년에 출간된 생각이다'를 되뇌이며 책의 의미를 되새겼다.


인위적인 안정을 추구하는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주인공 버나드의 친구 헬름홀츠가 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 세계에는 실용과 거리가 먼 책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헬름홀츠는 글의 힘을 깨닫지만 세뇌된 사회 구조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휘들이란 X선이나 마찬가지여서 제대로 사용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무엇이라도 뚫고 들어갑니다. 글을 읽는 사람이 거기에 찔리는 셈이죠. 무언가를 뚫고 들어가는 글을 어떻게 쓰느냐, 바로 그것을 난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싶어요.

p.124


버나드는 행복을 보장하는 약, 소마를 끊는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행복을 '느끼기만' 하는 일을 멈추고 싶었다. 진보적인 생각이지만 소설이 진행될 수록 그 진심이 의심스러워진다. 그는 소속된 계급과 걸맞지 않게 능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한 열등감에서 남과 다른 선택을 하고 싶었을 뿐 어려움이 닥치자 바로 최선의 안온함을 추구한다.


"난 차라리 나 자신 그대로 남아 있고 싶어요." 그가 말했다. "불쾌하더라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겁더라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p.149


버나드가 '신세계'로 데려온 '야만인' 존은 소마에 취해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어머니 린다를 보고 의사에게 항의한다. 의사는 소마의 위험성을 인정한 후 환각으로 얻을 수 있는 '영원성'을 강조한다.


"소마는 시간적으로 몇 년쯤 상실하게 만들기는 합니다." 의사가 얘기를 계속했따. "하지만 그것이 시간을 벗어나서 인간이 측정할 수 없는 다른 존속성의 기간을 얼마나 무한하게 누리도록 도와주는지 생각해보세요. 모든 소마 휴식은 우리 조상들이 예전에 영원성이라고 부르던 그런 개념의 한 조각입니다."

p.240


존은 어머니가 소마의 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길 바랬다. 그는 현실이 끔찍하다는 걸 알지만 그 때문에 '숭고하고, 고귀하고,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다시금 현실로, 소름 끼치고 끔찍한 현실로 돌아오도록, 두려움을 느끼게 만드는 절박함이 있기 때문에 더욱 숭고하고, 고귀하고, 한없이 소중한 세계로(…) 

p.312


'멋진 신세계'의 권력자 무스타파 몬드 총통은 자신이 통제하는 세계의 본질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 사고하고 성찰하는 이상 행복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책을 금고 속에 넣고 사람들에겐 소마를 쥐어준다.


"(…) 신은 기계와 과학적인 의학과 보편적 행복과는 병립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 문명은 기계와 의약품과 행복을 선택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 책들을 금고 안에 넣고 잠가둬야 합니다. 이런것들은 음란하니까요. 사람들이 충격을 받을 테니……."

p.354


존은 '인간적'인 삶의 조건을 원했다. 고뇌하고 상상하고 두려워하는 그러면서 최고의 가치를 찾고 추구하고 싶어 했다. 무스타파는 존에게 '불행해질 권리'를 허락한다. 존이 찾고 싶었던 '인간다움'의 모습은 수도사의 생활에 가까웠다. 쾌락을 죄악시하는 그의 태도 또한 보편적인 '인간다움'과는 거리가 있다. '신세계'의 삶에서도 존의 선택에서도 행복의 필요충분 조건은 충족되지 못한다.


"하지만 난 안락함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을 원하고, 시를 원하고, 참된 위험을 원하고, 자유를 원하고, 그리고 선을 원합니다. 나는 죄악을 원합니다."

"사실상 당신은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셈이군요."

p.362


인간 삶에 한 방향으로 향한 정답은 없다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을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병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의미는 영영 알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행복에 관해 생각할 필요가 없'을 때 인생을 재미있게 살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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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읽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를 읽었다. 아쉽게도 기대했던 작품 해설과는 거리가 있었다. 『멋진 신세계』 (1932)출판 후 26년이 지난 1958년 당시에 자신이 예언이 얼마나 현실화됐는지를 서술하는 책이었다. 『멋진 신세계』 앞에 붙은 서문에서도 작가는 작품에 대해 이랬었다면 저랬었다면 하는 생각을 적었었다. 헉슬리는 이 작품이 애착이 많았던가보다. 다시 쓰지도 못하겠고 그냥 두자니 자꾸 첨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보였달까.


『다시 찾아본 멋진 신세계』는 일간지 「뉴스데이Newsday」에 '사고방식을 장악하는 폭력Tyranny Over the Mind'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기사를 모은 것이다. 글들은 사고방식 뿐 아니라 "인구 과잉과 조직 비대화 그리고 선전 기술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 직면한 자유의 문제"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자신의 과거 저작과 비교해가면서.


군중 속의 개인이 어떻게 집단 심리에 휘둘리는지에 대해 서술한 대목이다. 헉슬리는 세뇌, 암시 등으로 사람의 심리를 조종해 독재자의 의도대로 군중을 움직이게 하는 일을 특히 경계했다.


군중 속으로 섞여들면 민중은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힘과 도덕적인 선택을 하는 능력을 상실한다. 암시에 쉽게 휩쓸리는 성향으로 인해서 군중은 그들 자신의 의지나 판단력이 사라지는 수준까지 현혹당한다.(…) 간단히 얘기하자면, 군중 속의 한 사람은 마치 어떤 강력한 마취제를 대량으로 삼킨 듯한 행동 양식을 보인다.

p.105


예술과 정치, 신학의 관계에 대한 헉슬리는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역사적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유적들이 결국은 통치자, 성직자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평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정말 그런가 싶다. 역사적인 예술품이라 불릴만 한 것들 중에 미술가가 자발적으로 만들었거나 민중이 자신들을 위해 만든 것이 있던가.


정치와 신학 차원에서는 폭군의 전제 정치나 터무니없는 말장난과 아름다움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대단히 다행한 일이어서, 폭정과 황당함이 아름다움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더라면 세상에는 고귀한 예술이 거의 존재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 조각, 건축의 걸작품들은 정치적 혹은 종교적인 선전을 위해, 신이나 통치자나 성직자의 보다 위대한 영광을 위해 제작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왕들과 성직자들은 독재적이고, 모든 종교는 미신과 뒤죽박죽이 되었다. 천재성은 폭군의 종노릇을 했고 미술은 지역 신앙의 장점들을 광고했다.

pp.120-121


자유로운 삶을 위해 저자가 내놓은 해답은 '소규모 시골 공동체'다. 현대적인 도시의 삶을 떠나 소박한 생활로 돌아가야한다는 권고가 수용가능한 것일까. 미디어에서 최고의 삶처럼 표현되는 도시 생활을 부정할 방법은 무엇인가. 소수의 사람들이 시골 공동체를 꾸린다 해도 적은 수에 그칠 뿐 대다수를 소박한 삶으로 이끌기는 어렵지 싶다. 지금의 구조에서 득을 보는 소수는 자신의 돈줄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고 지금껏 삶의 이상적인 모델을 도시의 삶으로 여긴 사람들도 생각을 바꾸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도시 안에서도 소규모 시골 공동체와 같은 형태의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인간적인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저자의 답이 너무 '멋지'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따라서 전체 사회와 개인의 정신적인 황폐화를 피하고 싶다면, 대도시를 떠나 소규모 시골 공동체를 부활시키거나, 기계적인 대도시 조직의 망상網狀 구조 내에서 소규모 시골 공동체와 똑같은 도시형 모형을 이룩하여, 전문적인 특수 기능을 단순히 구현한 개체가 아니라 완전한 인격으로서 개인들이 만나고 협동하는 사회를 이룩함으로써 대도시를 인간화시켜야 한다.

p.209


책머리에 크리스토퍼 히친스(평론가, 작가)가 2003년에 쓴 '올더스 헉슬리의 예언'이 붙어 있다. 헉슬리에 대한 평인 동시에 『멋진 신세계』에 대한 해설로 볼만한 글이다. 본문에는 조지 오웰의 『1984』를 언급하며 비교하는 대목들이 있어 흥미로웠다. 『멋진 신세계』보다 후에 출판된 책의 내용을 자신의 것에 견주어보는 일은 대범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헉슬리 이전에 출판되어 『멋진 신세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의 『우리들』에도 관심이 간다.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출판됐으나 번역 소개된 시기는 가장 늦은 자마찐의 『우리들』, 이 책을 읽고 나면 반유토피아 세계에 대한 밑그림이 머리 속에 그려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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