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팅 클럽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2
강영숙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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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살 때" 낳은 딸 "인생에 도통 관심이 없는" 엄마, "도무지 사회성이라고는 없는 철부지", "저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 김 작가가 있다. 딸은 "늘 차가운 강물 한 줄기가" "몸을 가로질러" 흐르는 것을 느끼고 "세상에는 꼭 알지 않아도 되는 일도 있"다는 진리를 터득한 "덩치 크고 과묵한 아이였다." 살림에 무능한 엄마를 '김 작가'라 부르며 딸 영인은 "학비를 대 주는 조건으로 고용된 가정부"처럼 집안 일을 하며 역시 글을 쓴다. 엄마가 연 글쓰기 교실에는 수 많은 남자가 스쳐가고 영인은 줄기차게 글을 쓴다.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소설을 쓴다. 


딸의 눈에 이해하기 어려운 엄마 김 작가의 모습은 어른이라는 호칭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지만 영인이 자신의 삶을 굳게 헤쳐가는 모습을 보면 엄마의 태도가 틀리지는 않았다 싶다. 김 작가는 자신의 감정에(만) 솔직했고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거나 강요를 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삶을 '엄마'라는 한 가지 시선으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글쓰기를 놓지않는 '진짜' 작가였다.


소설은 영인이 글쓰는 사람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이야기를 머리 속에 무수히 만들어오던 끝에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지경에 이른다. 자신은 생각이 문장으로 떠오르는데 누구나 다 그렇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된 후 글을 쓰게 됐다는 어느 작가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었다. 글쓰기에 빠지는 어떤 한 순간을 겪은 사람이 작가가 되는 걸까 혹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오랜 단련 끝에 작가적 정체성을 깨닫게 되는 시점이 오는 걸까.


그때, 할머니네 집 마루에서 뜨거운 보리차에 혀를 데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하나의 문장이 저절로 떠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 (…)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떨림에 몸을 맡긴 채 거듭 다짐했다. 글을 쓰리라! 글을 쓰리라! 죽어도 쓰리라. 그 문장이 좋은 문장인지 나쁜 문장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글이 저절로 떠오르는 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한 기쁨은 매우 컸다.

p.59


그리고 튜터는 덧붙였다. "생활과 글쓰기의 관계도 그래요. 18세기 영국에서 소설 독자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봐도, 그래도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계층은 글을 읽을 불빛이 있고 여가가 있었던 입주 하인 계급들이었어요. 글을 쓰려면 글을 쓰는 일과 더불어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해야죠. 너무 가난해도 너무 부자여도 글을 쓰기 힘듭니다."

그럼 이제 와서 결론을 말해 볼까. 생활과 글쓰기는 절대로 병행할 수 없다. 왜 그런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늘 한쪽이 부서지고 깨졌다.

p.162


글을 쓰겠다는 열망을 품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환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 일 외에 다른 일에서 정신줄을 놓아 버리는 것이다. 임신 초기의 울렁증처럼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거기서 정도가 심해지면 바보가 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저 병을 앓는다.

pp.214-215


물도 채우지 않은 튜브 속에 수시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책도 읽고 글도 썼다. 전에는 뭘 쓰려고 해도 생각만 있고 쓸 수가 없어서 힘이 들었지만 글도 술술 풀려 힘도 들지 않았고 재미도 있었다. 우울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우울해서 글을 쓰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건 사실이었다. (…) "한번 써 봐. 인생이 얼마나 깊어지는데." (…)

하지만 내가 쓴 글들이 정말 소설답다거나 문학적으로 뛰어나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건 그냥 그렇고 그런 글일 뿐이었다. 그러나 왠지 일거수일투족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내가 느끼는 걸 표현하지 않으면 중요한 걸 다 놓쳐 버릴 것 같았다. 째깍거리는 움직임도 기록해 두어야 할 것 같고 그 순간만큼은 충만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p.255


김 작가는 '글쓰기를 사랑하는 계동 여성들의 모임'(혹은 '종이컵을 든 동네 아줌마들의 결연한 수다방')에서 삶을 나눌 이웃들을 얻고 영인은 '해컨색의 라이팅 클럽'에서 글쓰기의 열망을 나누려 했다. 김 작가의 발병으로 미국에 있던 영인은 급히 귀국하고 마치 딸을 부르려고 아팠던 것처럼 엄마의 병은 사라진다. 둘은 다시 공동의 삶을 이어간다. 그들이 삶을 터를 일군 곳에서 둘의 라이팅 클럽이 다시 시작된다. 모임의 이름은 "계동 라이팅 클럽".


강영숙 작가가 글쓰는 과정이 소설에 반영된 것처럼 읽혔다. 이 작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글쓰는 사람이 됐구나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생활의 틈틈이 책을 계속 읽고 그 속의 문장들을 삶에 대입하고 생각을 굴렸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고 생각은 문장이 됐다. 책에는 여러 소설과 영화가 등장한다. 이런 책과 영화들이 작가를 만들었다 싶어 제목들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책 속의 문장을 읽고 생각을 하는 작가만의 방법을 어깨너머로 배우는 기분이 들었다. 신산한 삶 속에서 영인이 읽었거나 떠올린 책은 잉게보르크 바흐만의 『삼십 세』,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시몬 베유의 『노동 일기』, 앙리 포시용의 『형태의 삶』, 마렉 플라스코의 『제8요일』,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에이드리언 리치의 『더 이상 어머니는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 세르반테스의 『돈키오테』, 이사벨 아옌데의 『파울라』 등이다.


잭 런던의 『강철 군화』는 영인이 동거했던 B와의 첫 만남에 매개가 됐던 소설이다. B와 지내는 동안에 영인은 작품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른 후 묵은 짐 속에서 책을 꺼내 읽은 작가를 납득하게 된다.


알레스카 체험을 위주로 쓴 일명 북극 소설들, 문명에 길들여진 개가 다시 야성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가 재미있을까. 문학성은 뛰어난데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텍스트의 예술성보다는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뛰어났다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어느 시기에 꼭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바로 『강철 군화』가 그랬고 그 책이 B와 나를 연결해 주는 끈이었다.

pp.154-155


시몬 드 보부아르의 『인간은 모두가 죽는다』는 영원히 사는 인간을 소재로 한 점이 특별했다. 영인은 "영원히 산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소설 속 등장인물 포스카의 답을 자신의 것으로 여긴다. "나는 어지간히 나이를 먹었지요. 앞으로 만년이 지난다 해도 난 잘못을 저지를 테지요. 사람은 결국 진보를 못 하는 법이지요."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시간에 관한 소설이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제한된 시간을 길게 늘여 놓은 뒤, 존재의 비밀을 탐구하고 존재의 한계를 극복해 보려는 시도였다.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 제한 없이 늘어난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걸까. 그럼 포스카는 특별히 구원받았던 걸까. 구원이고 뭐고 주어진 시간도 거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죽어버리는 인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나는 무한히 살고 싶은 인간의 욕망도 존중하지만 중간에 빨리 끝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욕망도 존중한다.

pp.213-214


인간의 진보를 부정하는 글에 매혹되면서도 영인은 김 작가가 이끄는 글쓰기 모임의 연대 의식을 (비웃으면서도) 눈여겼다. 뜬금없었던 미국 생활을 접고 돌아온 그녀가 '계동 라이팅 클럽'을 지지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김 작가가 "너무나 글이 쓰고 싶어서 죽을 수 없었"다면 영인은 (미우나 고우나) 엄마라는 존재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대단할 것 없는 사람들이 꾸린 별난 '라이팅 클럽' 이야기는 한 사람이 작가로 등단하고 한 사람은 생계에 매인 채로 끝난다. 영인은 "소설을 쓰지 못"했지만 다시 시몬 베유의 『노동 일기』를 읽는다. 이십 대의 시간을 통과하며 김 작가가 글쓰는 마음을 영인도 알게 됐다. 쓰레기들이 가득해 보였던 엄마의 세계를 지지할 수 있게 된 영인에게 "네일 아티스트 출신 유명 작가"는 너무 먼 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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