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 (양장)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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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고양이는 밤처럼 검어서 해가 지면 밤과 분간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말하자면 녀석은 세상의 어두운 면을 온전히 볼 수 있지만, 세상은 녀석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고양이는 여유롭고 우아한 재태로 해바라기를 하며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p.6


맛있고 재미있는 냄새가 나는 진짜같은 휴가를 찾아 나선 검은 고양이와 학교 쓰레기장에 쪼그려 앉아 세상의 불공평함에 대해 고뇌하던 중학생 정인이 눈을 맞춘다. 폐지를 주워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와 사는 정인은 일주일에 세 번 수제 버거 가게 '햄버거 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태주가 신경쓰일 때, 갈수록 쇠약해지는 할머니도 걱정될 때마다 정인은 혼자있을 수 있는 쓰레기장 공터를 찾는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신의 고민을 알아주는 듯한 묘한 고양이를 만난 것이다.


왜 박태주는 노력 없이 가진 것들을 난 갖지 못할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데, 받는 입장에선 좀 불공평하게 느껴진다.

p.14


고양이의 이름은 "헬렐 벤 샤하르", 정체는 "악마", "정확히는 "휴가 중인 악마"였다. 고양이는 메이지 37년 나쓰메 소세키의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모델이었으며, '침몰하지 않는 샘(Unsinkable SAM)'이라는 별명을 가진 함재묘로도 살았다. 타는 전함마다 침몰하는 운명을 당했지만 끝까지 살아남았고 60년쯤 후에는 할리우드에 진출해 『테일즈 오브 테러』라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역사상 유명한 고양이는 모두 "헬렐 벤 샤하르"였던 셈.



가정형편 때문에 수학여행을 못가게 된 정인은 일하던 직장에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겨난다. 억울함에 분노가 폭발한 정인은 홧김에 일하던 가게의 유리창을 깨는데 그 순간 할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사면초가에 빠진 아이에게 헬렐이 달콤한 제안을 해온다. '만약에'라는 가정을 붙여 원하는 것을 말하면 다 이뤄주겠다고. 


정인은 할머니와 했던 대화들을 떠올린다. 할머니는 사는 게 지옥이 되는 순간을 아는 사람이었고 손자가 다른 사람의 마음 씀씀이를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했다. 


자꾸 불평하면 안돼. 불평하면 사는 게 지옥이 되니까.

p.15


그리고 막연한 상상으로는 현실을 일굴 수 없음을 가르쳤다. 사람 인(人)자가 두 개의 막대기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이런 상상, 저런 상상, 좋은 상상, 나쁜 상상"을 할 수는 있지만 "상상을 끝낼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상상이 통하지 않는" 일이 있고 그런 상황을 맞닥뜨렸다면 용기를 내 마주해야 한다고 말이다.


할머니가 그랬어요. 세상엔 '만약에'가 안 통하는 것도 있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 나한테 중요한 건 그거예요.

p.108


엄마가 떠난 후 "곱씹어 삼킨 외로움"은 "근사한 고명"이 되어 소년이 "급하게 철들며 포기해야 했을 욕심들"에 풍미를 더했다. 악마는 소년의 욕망과 상상을 이뤄주는 대신 그 작은 영혼을 원했을 것이다. 정인은 원하는 것을 모두 준비한 악마의 판타지 속에서 빠진 것을 찾아낸다. 정인에게 마음을 연 친구 재아는 응달에서 자라는 클로버의 흙을 북돋워주면서 "꼭 꽃을 피"우라며 응원했었다. 해를 좋아하지만 자리를 잘못잡은 클로버는 정인의 다른 모습처럼 보인다. 적절한 환경은 아니지만 잘 자라날 수 있도록 지지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걸 소년은 알았다. 언제 달라질지 모를 상황에 불평을 일삼으며 삶을 지옥으로 만들기 보다는 "오늘을 즐겁게 사는 것도 나중만큼 중요하다"는 정인의 말은 헬렐의 유혹에 대한 답이 된다. 


난 싫어.

잃어버리기 싫어. 내 마음대로 안 풀린다고 걷어차 버리고 싶지 않아. 기억도 삶도, 세상도.

p.225


얼핏 정인의 선택은 가혹해보였지만 복지사 선생님의 활동 덕에 얼마간 마음 놓을 수 있었다. 아이를 도우려는 손길들의 힘은 미약하고 없는 자들을 억누르는 구조적 힘은 크기만 하다. 소설 속 정인의 도덕적 선택을 응원한다. 그러나 바른 길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발밑을 살피지 않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볼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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