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마틴 래디 지음, 박수철 옮김 / 까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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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낭독 모임의 진도가 중세를 통과하고 있다. 그리스, 로마까지는 비교적 단선적인 역사가 진행된 반면 서로마 멸망 후의 역사는 하나의 맥락으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중세를 다룬 책들을 몇몇 들여다보며 읽기의 중심을 잡아보려하지만 유럽사의 일부를 이루는 나라 혹은 가문들이 늘어나다보니 뇌용량의 한계를 경험한다. 그중 가장 문제적인 나라가 바로 신성로마제국이다. 영국은 영국대로 브리튼 섬 주변의 사건들을 둘러보면 될테고 프랑스는 또 나름대로 틀을 갖춘 왕조사가 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출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다 보니 넓디 넓은 땅 이곳저곳의 제후들이 시대와 힘의 강약에 따라 명멸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실 계보를 거칠게 정리해보면 오토(작센)왕조, 잘리어 왕조,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거쳐 합스부르크 왕조로 이어진다. 왕조 사이사이에 벨프 가문, 룩셈브루크 가문 등이 배출한 황제가 한 둘씩 등장하다 보니 질서 정연한 계보가 기억 속에 새겨지길 기대하긴 어렵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페인부터 헝가리까지 유럽 전역에 걸쳐 퍼져있었고 역사도 길기 때문에 기록을 남긴 인물도 많다. 세계사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 몇 명으로 대략 갈무리해야하나 싶었을 때 눈에 들어온 책이 마틴 래디의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다.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슬라브 동유럽학 대학의 교수인 마틴 래디는 합스부르크 가문을 ""취약", "시대착오적", "돌발적"같은 용어로 판단할 수 없다고 썼다. 그는 이 가문이 "가톨릭 교회의 수호자이자 평화의 보증인, 학문의 후원자임을 자부했고, 세계를 통치할 운명이라는 신념을 굳건히 간직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10세기 말엽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미한 시작부터 20세기 마지막 황태자까지의 역사를 다루면서 "그들의 제국, 그들의 상상력과 우리가 그들을 상상한 방식, 그들의 의도, 계획, 실패 등을 설명"한다.



책을 펼치자마자 다섯 페이지에 걸친 가계도를 마주했다.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듯한 자손들은 이름 없이 '아들 3명과 딸 2명'처럼 표시했음에도 무려 다섯 페이지. 10세기부터 20세기까지, 천 년의 시간 동안 가계도이니 자손의 수가 많은 건 당연하겠지만 책에 언급될 인물이 이렇게나 많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수만 많은 게 아니라 이름들의 변별력이 떨어진다는 것 또한 읽기의 방해 요소다. 아버지 '페르디난드'의 아들도 '페르디난드', 손자도 '페르디난드'다. 이쯤 되면 정말 집중해서 읽지 않고는 문맥을 이탈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역사는 잘못이 없다. 읽는 사람의 지력이 문제일 뿐. 책을 얼마간이라도 읽어보면 시대별, 지역별로 나뉜 가계도의 존재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 말엽에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분인 슈바벤 공작령에 속한 지역에서 시작했다. 칸첼린이라는 이름의 조상에서 출발한 가문은 초창기만해도 "약탈자이자 도적"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가문의 소유지 이름에서 유래한 '합스부르크'라는 이름도 18세기에 이르러서 보편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은 조상의 뿌리를 기억하는 일이 유행하던 18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나타났고, 실러의 유명한 역사 담시譚詩 「합스부르크 백작」1803에 힘입어 널리 통용되었다. p.37


저자는 14세기 경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부 역사학자들의 상상과 달리" "결코 "가난한 백작들"이 아니었다"며 가문의 부상 요인이 우연에 기대고 있다고 말한다. 남다른 생산력을 바탕으로 유력 가문과 혼인관계를 맺었고 "경쟁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공백을 틈타" 상속 재산과 칭호를 얻어 가문을 확대했다는 것이다.


처음에 합스부르크 가문은 스위스 아르가우 지방의 여러 귀족 가문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정치적 요인 때문에 부상했다고 본다. (…)

그러나 합스부르크 가문이 부상한 데에는 이른바 "포틴브라스 효과"의 영향이 더 컸다. (…) 포틴브라스처럼 합스부르크 가문도 경쟁자들이 모두 죽은 뒤의 공백을 틈타서 득세했다. pp.41-42


초창기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승리를 이끌었던 혈통의 지속성은 18세기 카를 6세의 시기에 어려움을 맞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생산력 덕에 다시 이어졌다.


책은 큰 테두리에서 시간 순서를 따르면서 각 시기의 주요 인물과 사건들을 주제별로 묶어 다룬다. 예를 들어 '제18장 무역상과 식물학자, 그리고 프리메이슨'에서는 마리아 테리지아 부부와 아들 요제프 2세 시대를 다룬다. 작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과 신대륙 식민지를 잃고 축소된 상황을 마리아가 쇤부르 궁전을 꾸미는 장면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리고 요제프 2세가 무역을 통해 해외 식물을 들여오는 과정이 이어진다. 요제프 통치 시기에 비록 영토는 축소됐지만 황제는 무역을 통해 다른 세계에 끊임없이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는 돈벌이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지식의 수집과 보급"을 위해 교역을 했다. 자연사 수집품에 대한 관심은 요제프의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에게서 이어졌다. 그는 자연사 박물관에 진열할 수집품을 사들였을 뿐 아니라 박물관 사업을 위한 재원을 조달하고 운영에 시간을 투자했다. 슈테판의 과학적 노력은 프리메이슨 사상과도 연결점이 있었고 후에 "보편적인 형제애"를 기본 사상으로 여기는 이 단체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저자는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 사람들의 활동을 들여다보면서 그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서술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크 예술을 합스부르크 가문과 연결시킨 대목도 눈여겨 볼 만하다. 저자는 바로크를 "레오폴트 1세와 그의 두 아들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의 치세와 연관된 예술 형태"로 정의한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바로크'라는 용어를 전 세계에 퍼뜨렸다며 바로크 양식이 건축, 그림, 교회 행사, 종교극, 음악 등에 적용된 사례를 설명한다. 저자는 음악을 다룬 대목 끝부분에서 레오폴트 1세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다. 책의 곳곳에는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잘못된 판단이나 인식을 짚어주는 부분들이 있다. 합스부르크의 역사를 쇠락이 아닌 통치자로서의 운명에 대한 신념으로 해석하고자 한 저자의 의중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다.


레오폴트 1세는 흔히 오페라에 돈을 너무 많이 쓰고 건축에는 너무 적게 썼다는 비판을 받지만, 이는 부당한 지적이다. 빈이 오스만 제국으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건축 공사가 성벽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건축의 기회가 제한되었고 빈의 거리는 비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p.278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성들은 '정치'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 시대의 여성들이 보통 "번식 기계"나 "신심의 본보기"로 여겨질 때 합스부르크 가의 여성들에겐 죽은 남편 대신 통치권이 주어졌고 섭정으로 지명됐으며 재산분할 과정에서 상속자로 받아들여졌다. 심지어 저지대 국가들을 다스릴 적출 남자 상속자가 부족할 경우에는 여성들이 총독의 자리에 올랐다. "남성적인 공적 세계로 넘어가는 여대공들과 부인들, 과부들"의 존재가 "기존 질서나 정상적으로 형성된 권력의 위계질서를 뒤엎은 행동"으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저자의 주장은 믿기 어렵지만 믿어야 할 역사적 사실의 발견이었다.


하지만 대체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자들에게는 도덕적, 육체적 타락을 둘러싼 그런 상상이 결코 따라다니지 않았다. 그들 중 일부가, 특히 마리아 테레지아가 누린 권력도 정상 상태의 부자연스러운 역전 현상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여자들의 입장에서, 권력과 권력의 정통성은 그들이 속한 왕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고, 그 왕가의 위대함은 생물학적 차이를 초월했다. p.347


마틴 래디 교수는 결론에서 오스트리아ㅡ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1918년 이후의 역사를 그리며 합스부르크의 의미를 되짚는다.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피난처도 없"어지자 분열된 신생국가들은 독립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다시 주변 제국에 점령됐다. 저자는 일부 역사가들과 작가들이 합스부르크 통치자들을 "극악무도한 간수"로 치부한다고 지적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이 "민족 정체성을 초월"한 "보편성"을 담고 있다고 보았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은 "개별 영토와 개별 민족의 통치자인 것처럼 군림"하면서 "다양한 민족과 다양한 인종"을 "단일화된 통치권"아래 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옛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나라들 가운데 오스트리아만이 민주주의적 성격을 유지했고, 경쟁 세력권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소련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밖의 모든 곳에서는 결국 1989년에 잇달아 일어난 민중 혁명으로 붕괴할 때까지 공산주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

하지만 중앙 유럽의 정치 상황이 계속 악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앞에서 언급한 헝가리의 역사학자가 내놓은 전망이 옳았다는 결론을 피하기는 힘들다. 다시 말해, 합스부르크 가문 통치자였다면 더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pp.515-516


책 앞부분의 가계도와 사이사이 합스부르크의 지배 영역을 표시한 지도, 두 부분에 걸쳐 첨부한 상당 분량의 칼라 도판을 오고가며 본문 내용을 읽어가다보면 멀미기를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천 년 세월을 압축해서 지난다고 생각하면 어지러움은 당연하지 않을지. 다 읽었다고 생각한 순간 수많은 이름들의 잔상만 머리 속에 남았다.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는 한 번 읽고 책장에 꽂을 책이 아니다. 10세기 이후의 유럽사를 읽을 때면 틈틈이 들여다 봐야할 참고서로 여겨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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