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심채경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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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서른 두 살의 천문학자 지연이 서울을 떠나 천문대가 있는 희령으로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빛이 없는 어두운 산골을 배경으로 하려다보니 천문대를 떠올렸고 지연에게 천문학자라는 직업을 부여하게 됐다고 했다. 밝음을 멀리한 산을 올라 새카만 하늘을 끝없이 바라보는 일은 마음이 외로운 사람은 하기 어려울 듯 하다. 마음 속 심연에 더해 눈 앞에도 암흑이 펼쳐진다면 외로움은 치유되기 힘들테니. 그래서일까. 우주를 연구하는 현실의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는 유난히도 밝은 사람이다.


천문학의 매력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으며 깨닫게 됐다. 우주적 신비를 설명하는데 온갖 인문 고전이 인용돼 있는 걸 보고 놀랐고 그런 비유를 통해 머리 위 하늘 넘어 어딘가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었다. 그러나 관심은 거기까지. 칼 세이건에 비견될 만큼의 문학적 필력이나 쉬운 서술을 만나지 못했다. 본격적인 천문학 연구보다는 좀 쉬운 대중서를 보고 싶었지만 마땅히 눈에 띄는 책을 찾지 못하고 번역서의 부피나 난이도는 지레 겁을 먹게 하기 충분했다.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는 순수 국내파 천문학자 심채경 박사의 에세이다. 저자가 천문학자이라는 희귀한(?) 직업을 갖게 된 과정과 우주에 대한 애정, 천문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동안 있었던 일 등을 적은 글들이 모여 있다. 물론 지구과학 공부를 제대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저자가 쉽게 서술했을 '3부, 아주 짧은 천문학 수업'의 내용 일부는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책은 '천문학'이라는 세계와 그 안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는데는 충분했다.


책을 읽기 전에 저자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온라인으로 연결해 두 시간 가량 이어진 강연에서 심채경 저자는 시종일관 밝고 맑은 얼굴로 자신의 책에 대해, 우주에 대해, 그것을 연구하는 일에 대해 즐겁데 이야기했다. 일견 어렵게 느껴지는 분야의 연구를 하는 사람이 저렇게나 경쾌 발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천문학쯤 하는 사람이라면 피곤에 찌든 얼굴에 우울한 낯빛을 하고 있으리라는 편견이 있었던 모양이다.(하긴 칼 세이건도 내 편견에선 한참 멀긴 하다. 편견은 편견일 뿐이다)


저자는 뭘 해도 열심히, 푹 빠져서 하는 사람이었다. 천문학 연구도 그렇지만 독서에도 마찬가지 열정을 발휘하고 있었다. 책 읽는 방법으로 "딴 생각을 많이 하는 독서"를 권한 저자는 자신이 했던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 읽기를 사례로 보여줬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소재로 한 미국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외계를 포함한 시공간이 뒤섞인 여행을 하는 구성을 하고 있다. 심채경 저자는 『제5도살장』을 '시간 순으로 재조합하기', '배경만 골라 읽기', '시야를 바꾸어 읽기', '등장인물 찾기', '개인적 경험과 연결시키기' 등의 방법으로 여러 번 읽었다고 한다. 특히 '시야를 바꾸어 읽기' 방법에는 '공상과학(SF)'으로, '반전(反戰) 소설'로, '정신착란자의 관찰'로 읽어보고 '인생의 모든 순간을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도 읽었다. 한 권의 소설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딴 생각'을 보여주는 독서다.


책을 보면서 저자의 문장력을 눈여겨 보게 됐다. '연구자'의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문장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쉽고 잘 읽히는 일상적인 글을 쓰면서도 콕 찌르는 위트를 잊지 않았다. 문장력의 바탕은 '일기 쓰기'였다. 저자는 5살때 그림일기로 시작해 20대까지 일기를 써왔다고 했다. 아쉽게도 그것들을 20대 어느 시절 읽어보고는 전부 폐기했다고. 그리고는 읽기는 다시 보지 않기로 했다는데 조금 더 시간이 흐를 때까지 보존했으면 다른 판단을 하지않았을까 싶었다. 현재는 메모지, 회의록 구석, 블로그 등 그때그때 손닿는 대로 쓰는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랫동안 쓰기 연습이 충분히 돼 있는 사람이었고 지금도 쓰기가 생활화돼 있는 사람이었다. 저자의 문장에는 이유가 있었다.


남기고 싶은 대목들 중 우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묘사 부분이다. 


그런 사람들이 좋았다. 남들이 보기엔 저게 대체 뭘까 싶은 것에 즐겁게 몰두하는 사람들.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 싸움을 만들어내지도 않을, 대단한 명예나 부가 따라오는 것도 아니요,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처럼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바꿔놓을 영향력을 지닌 것도 아닌 그런 일에 열정을 바치는 사람들. 신호가 도달하는 데만 수백 년 걸릴 곳에 하염없이 전파를 흘려보내며 온 우주에 과연 '우리뿐인가'를 생각하는 무해한 사람들.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늘을, 자연을, 우주를 함께 동경한다.

p.13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에서 읽은 '재능'에 대한 부분과 상통하는 대목도 반가웠다. 정세랑 작가는 '질리지 않는 것이 대단한 재능"이라고 썼는데 심채경 저자의 경우도 '즐거운 지루함'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일을 묘사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직업은 정해진 '시간'을 성실히 채우는 일이고, 또다른 사람의 직업은 어떤 '분량'을 정해진 만큼 혹은 그에 넘치게 해내는 것이라면, 나의 직업은 어떤 주제에 골몰하는 일이다. (…) 그러다보니 한 단계 전진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아주 즐거운 시간이다. 그리고 그 즐거운 지루함이 자연의 ㅎ나조각을 발견하는 것을 이어진다면 금상첨화다.

pp.78-79


천문학자의 관측과정을 서술한 대목에서는 저자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느낄 수 있다. 어떤 일에 몰입한 사람 특유의 아우라가 담긴 대목이다. 누군가 이런 문장을 읽고 관측하는 일을 꿈꾸게 되지 않을까. 다소 길지만 남겨두고 싶다.


오후 느지막이 올라가서 하늘 플랫을 찍어놓고, 어두워지길 기다리는 동안 멍하니 노을을 보다가 어둠이 찾아오면 기계처럼 오직 관측에만 집중하는 시간. 망원경 시야에 타깃이 들어오도록 맞추고, 초점 조절하고, 노출 주고, 로그 적고…… 그러다 보름달이 가까이 오면, 달빛이 너무 밝아서 내 타깃이 안 보인다며 불평도 하고 달이 너무 예뻐서 감탄도 하며, 의자에 푹 파묻혀 초코파이를 우적우적. 그러다 달이 지면 오기 전까지 다시 모니터 속으로 빠져든다. 허락된 짧은 밤이 다 지나면 아쉬운 마음으로 박명을 맞으며 다시 플랫을 찍는다. 벌게진 눈으로 돔을 닫고 망원경을 제자리에 파킹한다. 유독 밤새 빈틈없이 관측한 날은 파킹하는 그 순간이 가슴 끝까지 뿌듯하다. 너무 졸려서 미각이 거의 마비된 상태로 밥을 국에 말아 후루룩 한 그릇 비우고는, 관측자 숙소의 암막 커튼이 주는 그  따뜻한 어둠 속에서 죽음처럼 잠들고 싶은, 관측하기 딱 좋은 날.

pp.13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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