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은유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삶이 내 살 같지 않을 때

존재에 대한 의심을 거두고

한없이 투명해지려면

계속 말해야 한다.

싸움이 불가피하더라도.


은유 저자의 에세이 글을 읽을 때마다 삶에 밀착돼 있어서 좋기도 하고 이렇게 맨살을 그대로 드러내도 되나 싶어지기도 한다. 개인사 전시류의 글을 좋아하지 않음에도 은유 저자의 글을 읽는건 전시가 전시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상을 의미화하는데 능하다고나 할까. 내 생활 주변에서 들리는 일상의 언어로 직조한 촌철살인의 문장을 읽다보면 알 수 없는 시원함을 느끼곤 한다.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였어"라는 깨달음. 


예를 들면 남성들의 무(관)심함에 대해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안 보이는 거다"라고 쓴다. 사회학, 뇌과학, 행동심리학 등 다양한 도구로 해석해 볼 수 있는 이 '증후'에 대해 저자는 더할 나위 없이 명쾌하게 정의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p.58


저자의 출간 도서 목록을 훑어보니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첫 책 『올드걸의 시집』에 이어 두 번째로 낸 산문집이다. 첫 책이 절판된 후 그 책에서 일부를 추리고 여러 매체에 연재했던 칼럼들을 모았다. "생에 울컥한 순간 일상을 추스르며 적어간 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의 기록"은 때론 폭소를 때론 폭풍 공감을 자아낸다. 저자는 "여자라는 본분, 존재라는 물은, 사랑이라는 의미, 일이라는 가치"를 두고 치열하게 싸우고 쉬지않고 썼다. "엄마의 돌연한 죽음으로 삶의 일회성을 자각"하고 "생의 본질이 아닌 것에 한눈 팔지 않게 됐다"고 말한 저자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지금도 글쓰고 강의하고 엄마로서의 삶도 충실히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강연과 강의에서 "밥에 올인하지 않으련다"고 들리는 말을 하셨지만 부지런한 천성이 어디가나 싶다.)


저자의 삶에서 놀라웠던 건 '시'를 읽는다는 대목이었다.(개인적으로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늦은 귀가 후 난장판에 된 집에 들어서서 아무 것에도 손댈 수 없을 때 그는 놀랍게도 '시'를 읽었다. 그러고 나면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한 시들은 저자의 말대로 피로 직진해 마음으로 흡수됐던 모양이다. 은유 저자의 글은 단순 명료하면서도 종종 시적인 뉘앙스를 풍긴다. 시 자체에 대한 앎도 풍부해 삶과 이어지는 글을 쓰고 시를 붙여 책 한 권을 써냈다. 인터뷰와 르포에서 보이는 작가만의 감수성 또한 시 읽기에 상당 부분 빚지지 않았나 생각한다.


생활에서 찾은 소재로 쓴 글을 읽고 나니 저자가 일할 때와 집에서의 모습이 그려진다. 조근조근한 목소리까지 떠올리니 가까운 친분 관계인 듯 여겨지기도 한다. 곰살맞은 저자의 성격을 느꼈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지역 학습관 글쓰기 강의 마지막 날이었다. 각자 가져온 간식을 나눠 먹고 있었는데 은유 '강사님'이 주섬주섬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수강 인원에 맞춰 사온 덧신이었다. 전원 여성 수강생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아이템이었다. 그 덧신을 오래도록 신었고 신을 때마다 '강사'님이 떠올랐다. 은유는 따뜻한 성품으로 꿋꿋한 글을 쓰는 저자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딜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 행복은 아니었다.

p.1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