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
나타샤 패런트 지음, 리디아 코리 그림, 김지은 옮김 / 사계절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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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 먼 옛날, 머나먼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나라에서 있었던 일이다. 왕과 왕비가 딸을 낳고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마법사를 불러 이 아기의 대모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법사는 무척 기뻐하면서 아기가 훌륭한 공주로 자라나게 돕겠다고 약속했다.(p.7)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이렇게 시작한다. 시작은 옛날 공주 이야기와 비슷하지만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 같이 왕자나 기다리는, 에덴동산의 이브만큼이나 식상한 이야기는 아니다. 대모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마법사는 다른 동화에서 같은 부탁을 받았던 마법사나 요정이나 마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훌륭한 공주라……. 이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마법사는 고민 끝에 다른 공주들을 연구해 보기로 하고 마법 거울에게 넓은 세상에 나가 훌륭한 공주에 대해 알아내도록 부탁한다. 마법 거울은 마법사에게 돌아와 어떤 답을 해줄까?『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마법 거울이 서로 다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여덟 명의 공주를 만나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 매무새를 좀 단정히 해야 할 것 같아.”

“신경 쓰지 마.”

“모두 언니를 만난 것만으로도 기뻐할 거야.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지금까지도 그런 적이 없었고.” (p.86~p.87)


“이젠 내가 뭘 할 수 없다고는 정말정말 그만 말했으면 좋겠어. 나를 도와줄래, 아니면 그냥 나 혼자 할까? 왜냐하면 나는 부딪혀 보지 않고 포기부터 하지는 않을 거거든!” (p.236)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을 쓴 나타샤 패런트 작가는 ‘처음 스스로 책장을 넘기며 책을 읽은 날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치 시공간이 다른 어느 신비한 나라의 궁전 정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을 읽는 독자들도 시공간이 다른 여덟 공주의 신비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나타나는 알록달록 색색가지로 칠해진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책이다. 채도와 명도를 달리하여 깊이 있는 색감이 아름다운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의 그림은 리디아 코리 작가가 그렸다. 리디아 코리 작가는 로열 예술대학에서 회화를 배웠고, 현재는 영국 헤이스팅스에 거주하며,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린다. 잘 만든 영화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듯 리디아 코리 작가의 그림은 이야기마다 주요 색조를 달리하며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의 이야기에 분위기를 만든다. 엘로이즈의 초록색 숲, 레일라의 핑크빛 일출, 엘렌의 진파랑 바다, 아베요미의 주황색과 에메랄드빛 폭포 등 공주들은 각자의 색을 가지며 리듬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리젤 왕비는 레인 왕국의 사람이 아니라 헤인 왕국 사람이었다. 거기는 규칙이 달라서 자녀들이 노를 저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해지면 망설임 없이 물가로 내보냈다. 왕비는 결혼과 동시에 항해를 포기해야 했을 때 무척 속상했다. 딸인 엘렌이 자신이 누렸던 즐거움을 똑같이 누릴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카트리오나, 아일사, 이세베일 공주의 열두 번째 생일이 지날 때마다, 딸들이 먼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기 때문에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엘렌 공주가 슬퍼하는 걸 직접 보고서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p.98)


비록 자신이 가장 아끼는 딸을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리젤 왕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꿈을 가진 사람에게 희망을 안겨 주면 그 꿈은 점점 커질 것이고, 모험심이 가득한 아이에게 배를 주면 그 아이는 곧 배를 타고 떠날 거라는 것을 언제나 알고 있었다. (p.117)


“우리는 로즈가 바뀌기를 원하지 않는걸요.” 엄마가 속삭였다.

“우리는 로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요.” (p.164)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여덟 소녀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린이와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어른들의 모습도 이야기해준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어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은지 생각해 보았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어른으로 어린이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을까?


공주에게는 왕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뜻을 펼치고 바꾸어 나갈 넓은 세상이 필요하다. (p.257 옮긴이의 말)


김지은 번역가가 옮긴이의 말에서 ‘공주에게 필요한 것은 넓은 세상’이라고 한 말에 적극 공감한다. ‘자신의 뜻을 펼치고 바꾸어 나갈 넓은 세상’은 공주를 포함한 모든 소녀에게 필요하다. 나타샤 패런트 작가는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며 ‘훌륭한 공주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물었는데,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니 ‘훌륭한 사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답을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이 한국말로 번역된 첫 작품이라니, 나타샤 패런트 작가의 다른 작품도 한국말로 번역 출간되어 읽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을 처음 손에 들었을 때 아기자기한 그림과 빨간 리본에 금박으로 제목이 새겨진 표지가 예뻐서 책의 안쪽이 궁금하면서도 선뜻 책장이 열리지 않았다. ‘공주’라는 단어가 품은 계급적 차별의 의미가 못내 거슬려서다. ‘공주’라는 단어는 ‘어린 여자아이를 귀엽게 이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정실 왕비가 낳은 임금의 딸’을 칭하지 않는가. 혈통으로 사람의 존엄과 귀함을 따지는 임금의 딸이 주인공인 이야기보다는 그냥 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더 궁금하다.


『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공주라는 계급적 이미지를 덜어내고 여덟 소녀의 이야기로 읽어도 아주 재미있다. ‘공주’를 소녀로 바꾸면 이야기의 폭이 넓어지겠지만, ‘여덟 소녀와 마법 거울’이라는 제목은 작가에게도 출판사에서도 아직은 부족하게 느꼈을 것 같다. 쥘 베른의 소설 ‘15소년 표류기’가 ‘15왕자 표류기’가 아니어도 충분한 것처럼 ‘소녀’도 ‘공주’가 아닌 ‘소녀’ 그 자체로 충분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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