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의 일 (양장)
이현 지음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의 이름을 알지 못한 채 읽었다. 열일곱 호정의 이야기를 그려내는 문장은 십대 청소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는 가운데 감정의 흔들림 또한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었다. 책을 다 읽고 알게 된 작가는 『푸른 사자 와니니』의 이현이었다.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에서도 빛났던 서정적인 묘사는 십대의 사계절을 담아낸 책에 잘 어우러졌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은 시절의 불안함과 홀로 떨어진 듯한 고립감,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막막함을 그리는 작가의 문장은 주인공 호정을 잘 형상화해냈다.



소설인 열일곱 고등학생 호정이 가족과 보내는 일상으로 시작한다. 터울이 많이 지는 동생 진주화 함께 호수가 있는 공원에 놀러간 장면은 "행복한 가정"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러나 호정은 부모와 여동생이 만드는 '행복한' 그림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호정의 모습은 얼핏 사춘기라 불리는 모습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될 수록 풀기 쉽지 않은 응어리가 드러난다.



초반의 서술은 가족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장면과 호정이 의사와 나누는 대화가 섞여 있어 서사를 따라 잡기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차츰 이런 서술 방식 자체가 스스로의 상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호정의 심리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정은 어린 시절 사업 실패를 겪은 부모와 떨어져 살면서 겪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의 상태를 알지 못한 채 학교 안의 문제에 휩쓸린다.



호정은 전학생 은기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 선뜻 마음을 열지 못했던 은기지만 일상을 나누며 조금씩 가까워진다. 호정은 은기가 스스로를 편안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걸 이해한다. 사람이 그럴 수도 있다는 걸, 보이고 싶지 않고 보여줄 수도 없는 것이 있더라도 마음을 나눌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알아 버린 애들이라는 것을.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다른 사람의 눈길만으로 아파지는 것들이 있다. 돌이킬 수 없으면서 사라지지도 않는 것들이 있다. 사라진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p.131


은기의 서사에 담긴 가정폭력 문제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다. 가정 안의 문제로만 치부하며 덮어두려하는 동안 일어나는 피해와 피치못한 결말에 대해 또 불가피한 가해자를 대하는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오히려 덮어두어야 할 일들을 인간은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한다.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괴롭힘의 방식은 교묘했다. 물리적인 폭력이나 증거를 남기지 않으면서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무너지게 했다. 소문을 만들고 뒤에서 속삭였다. 이런 일들은 너무도 빈번했다. 호정과 은기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다른 면모를 보이는 아이들은 쉽게 괴롭힘의 대상이 됐다. 가해자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금방 잊고 다른 소문을 찾아가지만 피해자들의 상처는 쉬이 나아질 수 없었다.


숙덕거리고 낄낄거렸다. 눈알을 이리저리 굴려 대면서.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애들의 눈초리만으로 충분했다.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돋운 한두 마디도 있었다. 그 애들은 나를 멋대로 상상 속의 진창에 굴리고 있었다.

p.212


법적으로 저촉되는 선만 안넘으면 죄가 되지 않는가. "법적인 처벌과 도덕적 단죄", "사회적 시선과 개인의 사정이 다를 수 있"다는 담임선생님의 말에 이해의 가능성이 담겨 있지만 선생님의 말을 귀담아 듣는 아이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게는 모든 게 더더욱 모호하죠. 법적인 처벌과 도덕적인 단죄가 다를 수 있고, 사회적인 시선과 개인의 사정이 다를 수 있고. 여러분도 이제 그런 모순을 알 만한 나이죠.

p.257


아이들의 시선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은기는 학교를 떠나고 은기 문제의 원인이 자신이었다고 자책하던 호정은 위태로운 정신 상태에 이른다. 소설 속 호정은 상담을 통해 문제를 직시하게 된다. 자기 안의 '아픈 나'를 인정하고 "엄마 아빠는 기억도 못할 사소한 이야기"지만 자신에겐 트라우마가 됐던 기억들을 소환하게 됐다. 그렇게 호정 안의 "몹시 안전했"던 "얼어붙은 호수"에 "봄"이 오기 시작한다. 호정은 그것이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아이는 그일을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것 같다. 따뜻한 바람이 불고 딱딱했던 호수의 표면이 녹으면서 다른 마음을 적실 수 있는 그런 봄을 호정은 두려워하면서도 바랐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