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 아파도 힘껏 살아가는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이주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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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 이주현은 한겨레신문사 기자다. 흔들림 없는 이성으로 객관적인 기사를 써야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직업 특성상 감정 조절이 어려운 병을 앓는 상태에서 직장 생활이 가능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앞섰다. 그는 무려 24년째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정신병을 터부시하는 생각들이 여전한 가운데 누구나 알만한 일터에 다니는 직장인이 자신의 병을 부러 공개한 이유도 궁금했다.


'조울병'에 대해 막연히 극단의 기쁨과 슬픔을 오간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어떤 기전을 통해 발병되는지 치료과정이나 예후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저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드러내며 '조울병'이라는 병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별한 병적 징후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에 집착하는 면이 있었고 대학생 때 연애 문제로 상처를 받고 나서 가벼운 증상을 보였지만 알아 채기 힘들었다는 것 등이 병의 시작이었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후 병은 본격적으로 발병했고 저자는 "조울의 파도"를 타야했다. 그 사이 두 번에 걸쳐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조울병'이 어떻게 사람의 일상과 주변 관계를 파괴하는지 서술하는 가운데 그의 직장 동료들이 인상에 크게 남았다. 지나치게 일에 몰두해 비정상적으로 바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다 입원해버린 그를 꾸준히 찾아주는 동료가 있었고 일을 계속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부모님의 판단을 만류하는 선배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두게 해야겠다는 부모님에게 선배는 "힘든 상태라 잠시 쉬어야 할 뿐이다. 너무 젊은데 일을 중단하는 건 맞지 않다."며 설득했다. 그 선배가 바로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신 구본준 기자다. 그의 세심한 관찰이 놀랍고 따뜻한 배려가 그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p.45


저자가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 발병했을 때까지는 '회사'라는 집단에 아직 동료애가 존재했기 때문일까 혹은 그가 다닌 직장의 특수한 문화였을까. 치료과정에 일을 제대로 못했음에도 동료들은 그에게 기댈 수 있는 곁이 되어줬다. 동료의 존재는 저자가 완치되지 않는 조울병을 가진채 오랜 시간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다.(그 조직(혹은 동료들)의 문화가 거의 판타지스럽기까지 하다.)


환자와 의사의 관계에 대한 대목도 주의를 기울여볼 만하다. 다른 질환도 그렇겠지만 특히 정신병은 그 특성상 의사와 환자의 거리감을 중요시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의료적 필요보다는 환자를 '타자화'하는 태도가 거리감의 더 큰 원인이 된다. 저자는 취재차 친분이 있던 유명 의사에게 진료를 의뢰한 후 실망스런 반응을 마주한다.


기자로서의 용무인지, 환자로서 문제인지 사전에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던 것은 내 실수였다. 환자로서 찾아왔다고 했더니 바로 반응이 달라졌다. '언론계 종사자'에게 반응했던 호의적인 제스처가 금방 사라졌다. 의사와 환자 사이엔 거리가 필요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p.157


(…) 요즘 정신과 치료에선 정신분석보다 약물치료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환자의 말에 성의 있게 응대하기보다는 증상에 잘 맞는 좋은 약을 주는 편이 환자에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

환자와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의료인의 의무감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환자들은 배려와 윤리에 기반한 거리 조절이 아니라, 자신이 '열등한 대상'으로서 '타자화'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pp.161-162


저자가 조울병과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데는 무엇보다 가족의 조력이 컸다. 가족은 그의 병명을 알게 된 후 관련된 책을 읽으며 병에 대해 공부했다. 피치못해 강제 입원을 결정했을 때 분노하는 저자에게 아버지는 절절한 편지를 써서 그가 혼자가 아님을 알게 했다. 언제 재발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가족들의 의연한 태도는 저자에게 큰 힘이 됐을 게다. 게다가 '완치'라는 끝이 없는 병일때 가족이 지지가 지속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가족은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야 , 혹시 네가 조울병을 앓았고, 또 계속 약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해서 네게 중요한 일을 못 맡기겠다거나 아니면 너와 결혼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애초부터 너와 인연이 아닌 거야. 그렇게 이해가 부족한 사람하고 어떻게 일을 함께하며, 어떻게 결혼해서 함께 살겠냐."

p.199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글로 정리하며 병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막'과도 같은 조울병을 견디도 있는 삶과 그 과정에서 행했던 일들, 산책, 순례길 걷기, 운동 등의 활동을 정리한 책의 원고를 완성한 것은 2013년이었다. 책이 출판된 때는 2020년이다. 7년의 간극이 존재한다. 공개를 선택했다 해도 자신의 병을 드러내는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을 것이다. 개인의 성찰을 위한 글쓰기와 그것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일 사이에는 그만큼의 무게 차이가 있었다.


조울병의 사막을 먼저 건넌 이로서 뒤따른는 다른 이에게 저자는 '의사'를 거듭 권한다. 예전에는 '조울증'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마음먹기에 따른 증상으로 여겼지만 '조울병'은 명칭의 변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분명한 '병'이다.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병이니 의사를 찾으라는 말이다. 그리고 의사는 많고 나에게 맞는 의사가 반드시 있으니 다른 의사 찾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전한다.


아직도 정답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만, 내게 조증을 호소하는 이가 있다면 이렇게 말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술을 마시지 말아라. 사람과의 접촉면을 줄여라. 잘 안 되겠지만 혼자서 빈둥대라. 울증 환자에겐 이런 조언을 할 거다. 의사를 찾아가라. 아깝더라도 업무량을 줄여자. 산책하라. 스스로 먹을 음식을 천천히 준비하라. 조증이든 울증이든 핵심은 이거다. 괴로우면 의사를 찾아가라.

p.150


저자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조울의 사막을 건넜다. 그러나 책의 문체는 그 시간들을 무겁지 않게 기술한다. 쉬이 읽히지만 그가 살아낸 시간은 결코 수월하지 않았을 것임이 느껴진다. 삐삐언니가 건넌 사막 끝에서 오래 머물 오아시스를 만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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