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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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공개강연을 들었었다. 『82년생 김지영』이 한참 화제가 됐을 때였고 작가는 그 작품을 쓴 과정에 대해 들려줬다. 오랫동안 시사·교양 프로그램 방송 작가를 했다는 말, 특히 PD수첩을 담당했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구나 싶었다. 『82년생 김지영』이 가진 독특한 현실감이 이해됐다. 작가는 철저하게 사실적인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기묘하게도 상식에 반하는 지점을 짚어내고 있었다. 너무도 보편적인 경험이 글자로 씌이고 자료로 제시되니 낯설어졌다. 이 작가는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호기심에 기다렸던 『사하맨션』은 전작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핍진한 현실이 실제 경험과 유리된 듯한 것이 『82년생 김지영』이라면 『사하맨션』은 가상의 서사가 현실을 되비추는 느낌이었다. 두 개의 장편에서 작가가 이야기 할 수 있는 폭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쓴 것』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발표됐던 단편 중 여덟 개를 모은 책이다. 수록작은 「매화나무 아래」, 「오기」, 「가출」, 「미스 김은 알고 있다」, 「현남 오빠에게」, 「오로라의 밤」, 「여자아이는 자라서」, 「첫사랑 2020」이다. 주요 화자가 모두 여성, 손녀가 있는 할머니부터 (곧 5학년이 되는) 초등 4학년까지의 연령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언니 문병을 다니기도 하고 집 나간 아버지 걱정을 하기도 하고 직장 생활에 눌리거나, 퇴직을 앞둔 인물도 있다. 서로 다른 세대가 자신만의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흘러간다. 책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계속 되울리는 느낌이다. 그 목소리는 작가의 목소리이면서 이 시대 여성의 목소리인 동시에 바로 우리의 목소리로 여겨졌다.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소리내지 못하고 묻어둔 마음 속 목소리 말이다.

 

「매화나무 아래」는 치매 요양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언니를 문병하는 동생의 이야기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 손자와 아들이 헷갈리고 바로 아래 동생의 죽음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언니는 생전 못 읽은 책과 종교에 대한 애정을 새로이 드러낸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 가족을 앞세운 후 "사람 죽는 일이 너무 가깝고도 태연하"게 여겨질 즈음 동생에게 언니의 위급 소식이 들린다. 동생은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자문한다.

 

남편이, 아빠가, 아들이 살아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 가족에게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리라 믿었다. 그때의 내 아들과 지금의 언니는 어떻게 다른가. 정말 다른가.

그럼 나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의미가 있나.

p.42, 「매화나무 아래」 中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동생이 발견한 매화나무 겨울눈은 죽은 듯 보이는 나뭇가지 안에 생명이 여전히 맥동함을 드러냈다. 흩날리는 눈발이 내려앉은 매화나무는 꽃을 피우는 듯 보였다. 동생은 "꽃이 지기 전에 오라"던 언니의 말을 떠올린다.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라면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라면 죽음과 다름 없어 보여도 아직 삶 속에 있으며 죽는다 해도 의미 없음은 아니다.

 

작가의 말대로 「매화나무 아래」는 「오로라 밤」과 쌍둥이다. '생각나?'라는 말이 두 소설을 이어준다. '생각나?'하는 질문에는 그리움이 있다. 대화가 꼬리를 물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매화나무 아래」에서는 죽은 작은 언니에 대한 동생의 기억에 속에 '생각나?'가 숨어있다. 「오로라 밤」에는 어릴 적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로 떠나려는 쉰일곱의 나가 있다. 그녀는 '생각나?'하며 "함께 기억을 더듬을 사람"으로 시어머니를 택한다.

 

소중하게 여겨 혼자 간직한 기억들은 종종 생활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책장 아래나 침대 틈새로 들어간 머리끈처럼 사라지곤 했다. 예쁘다, 신기하다, 꿈만 같다며 함께 감탄할 사람.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밥을 먹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창 밖을 보다가 불쑥, 생각나? 하며 함께 기억을 더듬을 사람. 내게 그런 사람이 있나.

p.216, 「오로라의 밤」 中

 

이렇게 독특한 나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남편 덕(?)이다. 시어머니는 "다른 일에는 늘 합리적"이어도 아들일에 있어서만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의 부재는 두 여성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둘은 서운할만큼 "아무렇지 않게 너무 잘 살"았다. 자식과 가족에 매여 하고 싶은 일을 생각도 못했던 시어머니도 남편의 어머니가 아닌 연장자로 시어머니를 대하는 나도 서로에게 부담이 없어진 것이다. 둘은 누구에게 살림의 짐을 미루지 않고 "가사 노동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으며, 인정과 이해를 구걸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좋지. 내 인생 제일 좋은 때야, 요즘이."

(…)

"저도 좋아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랑 둘이 사는 요즘이 제일 편해요."

"준철이가 없어서 그래. 이제 내가 준철 에미가 아니고 너도 준철이 집사람이 아니잖아."

p.233, 「오로라의 밤」 中

 

「오로라의 밤」의 시머머니는 놀랍도록 유쾌한 인물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년세대 중 이렇게 삶을 긍정하는 캐릭터는 유쾌하기 그지없다. 오로라롤 보며 외친 그녀의 소원은 「매화나무 아래」의 언니가 호흡기때문에 하지 못한 말로 들렸다.

 

"오래 살게 해 주세요! 인공호흡기니 뭐니 다 달아 줘요. 죽을 때 고와 뭐해? 곱지 않더라도 오래 살 거야. 이 좋은 세상에 로래오래 숨 붙이고 있을 거야!"

p.249, 「오로라의 밤」 中

 

가부장의 부재가 가족 관계에 일으키는 변화는 「가출」에서 더 폭넓게 다뤄진다. 일흔 둘의 아버지는 정년 퇴직 후 어느 날 입은 옷 그대로 집을 나간다. "아버지의 일"이라 여긴 모든 것을 끝낸 후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쪽지를 남긴 채. 가족들은 대책을 회의를 하러 모인다. 자주 얼굴 보기 힘들었던 삼 남매는 모일 때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 함께 먹으며 이전과 사뭇 다른 관계가 된다. 점점 옅어지는 걱정과 반대로 "일상을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막내딸은 가족 몰래 아버지의 카드 승인 문자를 받으며 그의 '안녕'을 확신한다. 남은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아버지 없이도" "잘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한 사람의 권위가 자신과 가족을 눌러왔던 것이다.

 

부재의 모티브는 「미스 김은 알고 있다」로 이어진다. 신입 사원인 '나'는 입사직후 회사의 모든 일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목도한다. 회의에 필요한 자료철이 없어지고 온갖 연락처가 뒤섞여 있으며 복사기까지 말썽을 일으킨다. 일이 생길 때마다 들리는 이름 '미스 김'. 이름도 없고 직책도 없는 미스 김은 중요 고객 미팅에서 허드렛 일까지 회사의 온갖 일들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미스 김은 미스 김이"기 때문에 "승진시키거나 연봉을 올려줄 수는 없"기때문에 사장이 해고한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침묵으로 권력에 동조했다. 미스 김은 회사 내에 미쳤던 자신의 영향력을 철저히 지웠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회사 직원 모두가 힘들어졌지만 누구도 불평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미스 김의 '부재'에 일정의 책임이 있었으므로.

 

「미스 김은 알고 있다」의 화자 '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살던 집을 옮긴 후 낭패감을 느낀다. 전 거주자의 전 남자친구가 스토커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친구가 이사간 걸 모르고 공격을 계속하고 '나'는 공포에 빠진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그저 스토커나 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 특정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나를 에워싼 상황 같은 것. 이를테면 젊은 여자가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지며 혼자 사는 일.

p.140, 「미스 김은 알고 있다」 中

 

일상에서 여성이 감당하고 있는 위협은 이렇게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삶을 잠식하기도 한다. 「현남오빠에게」가 그런 경우다. 오빠는 "다 너를 위한 거야."라며 신입생 시절부터 '나'를 돌봐줬다. 오빠는 자기 유리한 대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나'를 위한 행동인 것처럼 믿게 만들었다. 10여년이 지난 후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오빠와의 관계에 눈을 뜬다. "한 켠에" 미뤄뒀던 "미심쩍은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 인생이 내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남오빠에게」는 '가스라이팅'이라 불리는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사람의 정신을 압도하는 수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모른 척 하는 일이 고통이 되어 돌아오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화자 '나'는 가정폭력상담소를 운영하는 엄마에게 찾아오는 피해자를 보며 자랐다. 여성이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상처들은 '나'의 뇌리에 각인됐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딸이 자라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에 연루되자 덮어두려 했던 과거의 일들이 현재의 내 것이 되어 버린다.

 

내 증상과 같다. 열다섯의 나는 모르는 아줌마의 길고 선명한 흉터가 무섭고 끔찍하면서도 괜찮은 척했다. 이미 비슷한 일들을 충분히 보고 들었고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내 불안과 공포를 부정했다.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다.

p.296, 「여자아이는 자라서」 中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다, 이해해 줘야 한다, 몰래 사진 찍고 낄낄거리는 게 장난이다", "여자애들이 성적 떨어뜨리려고 남자애를 꼬신다"는 어떤 경우 폭력에 동의하는 말이 된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무마하려는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은폐하게 되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딸과 조금 가까워진다.

 

「첫사랑 2020」은 2020년을 살아가는 초등학생의 세계를 그렸다. 기성 세대와 청소년 시기를 함께 다룬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 한 단계 더 어린 세계다. 서연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4학년이 끝날 무렵 승민이에게 고백을 받고 사귀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 수 폭발은 어린 두 연인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고 둘 사이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서연이의 헤어지자는 말에 눈물바람을 하는 승민이를 달래는 선생님의 말이 내맘같았다. "미안해" 어른인 우리가 미안하다. 서연이와 승민이의 애틋한 첫사랑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은 모두 미안해야할 일이다.

 

「오기」는 우리 모두의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그리고 우리 하나하나는 자신의 상처를 얼마나 개인적인 것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인 '나'는 옛 선생님을 만난 후 떠오른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쓴다. 소설은 가정 내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설 발표 후 선생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훔쳤다며 화를 내고 '나'는 늘어나는 악플 중에 선생님의 것이 섞여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많은 독자들은 소설과 비슷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누군가에게 풀어내야 할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가 또다른 누군가에게 처음과 같은 뜻으로 가 닿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까 그 밤 우리 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깊이 이해했는지, 얼마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를 이렇게 아름답고 애틋하게 쓸 수 있었겠지. 그리고 내 흔적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그렇게 모욕적인 글들을 남겼고. 그 두 마음은 얼마나 다를까. 과연 다를까.

p.78, 「오기」 中

 

조남주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 단편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제 경험담은 아"니라고 적었다. 그러나 에피소드에 드러난 이야기하기의 고단함만은 작가 본인의 것이리라.

 

비교적 긴 기간 동안의 작품을 묶은 단편집을 읽고 보니 조남주 작가가 그동안 써온 길을 따라가본 기분이다. 장편과 단편에서 고르게 빛을 발하는 작가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가 쓴 것』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본다. 누가 정했을까. 조남주 작가? 박혜진 편집자? 그 사람은 지금의 세계를 의미있게 하는 이런 책을 '우리'가 썼다고 불러준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우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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