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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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자가 돼 원하는 어느 시공간이라도 가볼 수 있다면 언제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로마제정기의 원형경기장, 인신공양이 행해지는 지첸이사, 수메르 문명시대의 우르크를 가보고 싶다고,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또 거기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 같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시간여행은 쉽고도 흥미진진했으니까. 그러나 이 책 『방구석 시간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를 보고 나서 생각을 좀 바꾸게 됐다. 상상 속의 시간여행이 아닌 실질적인 면을 고려한 시간여행은 고려할 것 투성이다. 마치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처럼, 아니 그 보다 몇 배 더.

 

책은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당연히 여행 가이드도 필요한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빅뱅 이전의 시간부터 바로 십 여년 전까지 원하는 어느 시대든 (이론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여행을 가게될 경우 필요한 준비 사항은 무엇인가. 책에는 물적, 심적 준비물을 세심히 안내해 준다.

 

우선 어떤 테마로 여행을 떠날 것인가에 따라 필요한 준비물이 달라진다.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는 만국박람회를 갈 수도 있고 느긋한 과거의 휴양지에 들를 수도 있다. 특정 과학자가 살던 시대로 가서 중요한 발견의 순간을 지켜보거나 공룡 왕국에서 스릴을 만끽할 수도 있다. 각 여행지 별로 숙지해야할 사항이 다르다. 만국박람회를 방문하기로 했다면 각 박람회에 특이할만한 전시물이 공개되는 시기를 알고 떠나야 한다. 이슬람 지배기의 아름다운 그라나다를 제대로 즐기려면 흑사병 유행기를 비껴서 가야한다. "지상 낙원"으로 착각할 만한 이 도시에서는 여성들이 "주변 그리스도교 지역들보다 현저히 많은 권리를 누"렸고 "당대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나폴리 여행에서는 악취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지금은 잊혀진 나라 1990년대 이전 동독에 가게될 경우엔 국가 보안부 '슈타지'의 감시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공룡시대에 간다면 주변의 움직이는 생물 뿐 아니라 식물도 절대 만지면 안된다. 어떤 식물이 어떤 독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밝혀진게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가더라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주의를 게을리하면 안된다.

 

저자는 여행지의 특이한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역사이야기를 풀어낸다. 지금 시각으로 봐선 신기해 보이는 일들이 과거에는 상식이고 일상이었다. 한 사람의 여행자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펼쳐놓다보니 각 시대를 세밀하게 관찰하게 된다. 거시사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미시사의 매력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5장 중세 , 씻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낙원'에서는 중세적 삶에 대한 진한 향취를 가늠할 수 있다. "중세에 가서 익숙해지기까지 유독 시간이 드는 분야는 위생"인데 "중세의 사람들은 대체로 씻지 않"기 때문이다. "목욕이 널리 사랑받는" "중세"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중세인들은 심지어 "청결함"이 "결혼한 여성의 정절을 망치고 귀족 가문의 딸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책은 위생에 예민한 여행자라면 차라리 중세 유럽보다는 이슬람 국가를 고려해보라고 권한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민주주의적 면은 의외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성의 토지 및 서적 소유권을 인정했고 이혼 후 지참금 반환을 청구할 수 있었으며 남편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다. "눈에 잘 보이는 커다란 열쇠"가 여성 여행자에게 추천되는 필수품이라는 대목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로웠다. 여성이 자신의 경제력과 지위을 보여줄 수 있는 장식이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단기 여행자뿐 아니라 과거에 정착을 고려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도 들어있다. 많은 사람이 환경이 오염되기 이전 시대를 그리워한다. 건강과 관련해 과거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의료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또 발전소가 없었던 시절에는 난방이 어려워서 심지어 베르시이유 궁의 왕족의 식탁에서도 식수가 얼 정도임을 미리 계산에 넣어야 한다. 저자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거주지로 한국을 추천한다.

 

시대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 따뜻하길 워한다면 한국에 정착하는 걸 고려해 보자. 이 나라에는 '온돌'이라는 바닥 난방이 대략 7000년 동안 자리한다.

p.206

 

'3부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필수 여행 정보'에서는 좀더 실질적인 정보가 제공된다. 각 시대에 적절한 '예절과 태도에 대하여', 시간여행자라는 정체성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자기 소개법, 금전관계, 의상, 이동과 숙박 등. '여러 개의 날짜와 시간'에서 각 국가 별 기준 날짜가 다른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의 1366년 1월이 피사에서는 1367년이고 포루투갈은 1405년이었다. 이 시대 각국은 어떻게 외교적 약속을 잡았을까. 물은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어느 시대던 무조건 끓여 먹어야 하고 질병에 걸리거나 다쳤을 경우 정말 위급한 경우를 제외하곤 20세기 이전의 의학적 처치를 받지 말기를 권한다.

 

시간여행자 주의사항 중 최고는 "무슨 일이 닥치든 가능한 한 과거에서 죽지 않도록 노력하자"다. "활화산의 분화구로 떨어지자 않는 한, 이 잔재(현대식 신체 보철물들)들은 나중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시간여행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여행 가이드 책 구경으로 만족하며 방구석의 안락함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구석 시간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는 시간여행을 전제로 역사의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대목들을 짚어준 책이다. 정기문 교수의 추천의 말이 이 책을 설명하기에 딱 맞춤하다.

 

주류 역사의 편견을 깨는 새로운 시각이 돋보인가.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작은 소재들을 활용해 주류 역사학이 소홀하게 여기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참신한 시각, 놀랍도록 세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책이다.

정기문, 군산대학교 역사 철학부 교수 추천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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