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삼킨 소년
트렌트 돌턴 지음, 이영아 옮김 / 다산책방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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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지막은 죽은 솔새. 소년, 우주를 삼키다. 케이틀린 스파이스.

이 말들이 답이다.

의문들에 대한 답.

p.32


트렌트 돌턴의 소설 『소년, 우주를 삼키다』는 세 가지 키워드를 풀어가는 과정이다. 너무 일찍 "어른의 마음"을 갖게 된 아이의 '기적에 가까운 성장소설'이라는 홍보 문구와 다르게 이 소설은 내게 스릴러의 외피를 갖춘 심리소설이었다.


주인공 엘리는 마약 중독에서 벗어난 엄마와 마약 중계상인 라일 아저씨 집에서 형 오거스트와 함께 산다. 엄마와 라일 아저씨의 의심스런 외출 시간동안 옆집의 슬림 할아버지가 형제를 돌본다. 엘리의 형 오거스트는 어린 시절 어느 날 말을 잊었지만 동생에겐 세상의 전부다. 슬림 할아버지와 형의 보호가 있지만 엘리의 학교 생활은 녹록치 않다. 게다가 중계상의 위치에서 단독거래를 하려던 라일 아저씨가 마약 거물에게 잡혀가고 엄마가 구속되는 일이 일어난다. 아이들은 낯선 아빠와 함께 살아야 하는 고달픈 상황에 처한다. 오랫동안 못봤던 아빠는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며 책만 보고 술로 밤을 지새는 사람이다. 엘리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감옥에 수감된 엄마를 보러 가고 라일 아저씨 실종의 미스터리도 풀려고 한다. 범죄 보도 기자가 되고 싶은 꿈을 이루는 길도 차근차근 밟아간다.


『소년, 우주를 삼키다』를 읽고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다시 읽었다. 제제의 성장에서 한 발 더 나간 성장기라는 책의 홍보 문구를 확인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제제의 성장에도 이런 혹독함이 있었던가 싶었다.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가 (여섯 살이고픈) 다섯 살 아이의 시야로 본 세상이라면 『소년, 우주를 삼키다』는 확실히 십대의 세상이다. 제제를 언급하는 홍보문구에 아이를 대상으로 하거나 아이가 그려지는 소설을 생각하면 오산이다. 처절한 교도소 생활과 잔혹한 마약상들이 등장하고 그 속에 고통인줄도 휩쓸리는 아이들이 있다.


소설이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점에 눈에 띄었다. 호주는 국가에 대해 다른 이미지를 떠올리게 됐다. 청정 자연으로 기억했던 나라의 도시 변두리 슬럼가를 속속들이 들여다본 기분이다. 어디까지가 작가의 실제 경험의 경계인지 궁금하다.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사건도 예사로운 건 없었다. 그중 무엇 하나라도 그것이 실제 일어난 일이라면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을 게다.


소설 속에 현자 또는 해결사처럼 등장하는 슬림 할아버지는 '택시 운전사 살인사건'으로 복역하며 수 차례 탈옥해 유명세를 떨친 실제 인물 '보고 로드의 후디니'다. 호주에선 탈옥 사건으로 유명한 인물로 관련 책도 나와 있었다. 이런 인물의 출소 이후의 삶을 소설에 대입한 시도는 호주 독자들에게는 더 흥미롭게 느껴졌을 것 같다. 작가가 슬림 할아버지를 그린 시각은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좋은 사람"이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


"난 좋은 사람이야." 슬림 할아버지가 말한다. "하지만 나쁜 사람이기도 하지. 누구나 다 그래, 꼬마야. 우리 안에는 좋은 면도 나쁜 면도 다 조금씩 있거든. 항상 좋은 사람이 되는 건 어려워.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안 그렇지."

p.223


엘리는 범죄 사건 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 누군가가 "어쩌다 범죄자가 됐는지"가 궁금해서다. 엘리는 범죄자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나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그 순간"을 찾고 싶어 한다. 슬림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되는 일이 "선택"의 문제라고 말한다. 누구나 "선택의 여지"가 있고 그에 따른 결과가 있다고. 슬림 할아버지는 엘리의 모든 선택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의 모든 선택에 도움을 준다. 엘리가 할아버지 자신이 꿈만 꾸던 일을 할 수 있도록.


책의 서두에서 던져진 키워드는 책장이 줄어들면서 하나씩 하나씩 풀려간다. "너의 마지막"과 "죽은 솔새"가 어떤 관계인지, "케이틀린 스파이스"가 누구인지, "소년"이 "우주를 삼킨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러나 이 중요한 말을 엘리의 형 오거스트가 무심코 손가락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는 명확히 그려지지 않는다. 그저 아이들이 "다시 돌아왔기"때문이라는 추정만 가능할 뿐이다. 이 소설에 판타지의 요소가 가미되는 대목이다. 엘리는 자기에게 일어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렇게 호소했다. 내가 작가에게 한 번쯤 해보고 싶은 말이었다.


"그냥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면 안 돼요? 띄엄띄엄 듣는 건 이제 넌더리가 나요. 어른들은 맨날 단편적인 얘기만 하고 구체적인 내용은 꼭꼭 숨겨두죠. 더 크면 말해줄 거라더이 이제 나도 컸는데 엄마는 오히려 더 애매한 얘기만 하잖아요. 앞뒤가 안 맞아요. (…)"

pp.490-491


모든 걸 명확하게 제시하고 시작하는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 또 그런 소설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어딘지 모를 캄캄한 숲 속을 질주하는 차안에서 형에게 매달려 있던 다섯 살 엘리는 자신의 주변에 얽힌 모든 사건을 해결할 때까지 버틸 수 있는 열 일곱 살이 됐다. 희망을 걸어볼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소년 엘리는 꿈을 꾸었고 거짓말 같이 그를 돕는 손길들이 나타났다. 그리고 자기 앞의 우주를 삼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우주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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