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 치마 마트료시카 오늘의 청소년 문학 27
김미승 지음 / 다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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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동글 예쁜 마트료시카 인형이 한복을 입었다. 마트료시카는 인형 속에 작은 인형 그 속에 더 작은 인형이 들어있는 얼마나 작은 인형까지 나올까 하며 계속 속을 들여다보게 하는 러시아 전통 인형이다. 마트료시카는 행운을 상징한다. 한복 입은 마트료시카 인형에는 어떤 행운이 깃들어있을까.


『검정 치마 마트료시카』는 김미승 작가의 세 번째 청소년 역사소설이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가수의 꿈을 쫒는 소녀의 이야기 『저고리 시스터즈』와 궁녀에서 혁명가로 변신한 여성을 소재로 한 『세상에 없는 아이』를 앞서 발표했다. 작가는 처한 환경에 굴하지 않는 용기를 가진 여성의 이야기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작가의 손을 거쳐 한줄의 역사로만 기록됐던 인물들이 생생한 이야기로 살아났다. 『검정 치마 마트료시카』는 러시아의 고려인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김알렉산드라와 사할린(가라후토) 강제 징용 노동자 김윤덕의 삶을 담고 있다. 러시아 국적을 가졌음에도 천대받았던 카레이스키와 일제에 의해 강제 납치 감금된 노동자의 삶이다. 힘없는 나라는 국민들의 고난을 막지 못했다. 그들은 나라없는 국민, 아무도 그 존재를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민족을 보듬고 서로를 일으켜 세웠다.


책은 쑤라의 졸업식에서 시작한다. 최우등 졸업자인 쑤라는 카레이스키라는 이유로 시상에서 제외된다. 쑤라의 아버지는 러시아로 귀화한 조선인이다.


아버지는 조선 태생이지만 지금은 러시아에 귀화해 러시아 이름을 가졌다. 그래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건가. 예전부터 카레이스키('고려인'을 이르는 말로, 러시아에 살고 있는 우리 겨레를 뜻한다)라는 말에는 왠지 억울함과 불안이 함께 느껴졌다.

p.14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가 불안정해지면서 일본 식민지 조선인의 지위도 덩달아 흔들렸다.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기도 했다. 일본의 밀정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였다. 조선인은 이중고를 감당해야 했던 거다. 식민지로 일본에 착취당하는 와중에 일본의 동북아시아 지배 야욕에 동조하지 않을까 하는 주변국의 의심을 받았다. 쑤라가 '카레이스키'라는 호칭에 '억울함과 불안'을 함께 느낀 이유일 게다. 가난을 피해 만주로 러시아로 전전했던 쑤라의 아버지는 타지에서 딸이 느낄 감정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때문에 아버지는 딸에게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기죽지 마라. 항상 당당해야 해.'

p.14


기댈데 없는 조국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러시아인이 되기 위해 귀화했으면 그만이지 생사가 오가는 조국의 독립에 매달리는 걸까. 지금의 우리에게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 있다. 조국을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분들과 그 가족들, 후손들이 어떤 삶을 살게 됐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쑤라와 그 아버지는 미래를 몰랐기 때문에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지.


그러나 쑤라는 아버지가 온전히 이해되지는 않았다.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지금은 러시아 통역관으로서 인정받으며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빼앗긴 지 수십 년이 넘은 나라를 되찾겠다고 어려움을 자초한 것일까.

p.42


쑤라는 밀정 노릇이 탄로난 아버지가 멀리 사할린 땅으로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늘 아래 단 하나의 혈육인 아버지를 따라 쑤라의 여행이 시작된다. 아버지에게 혹독하게 교육받은 외국어 실력을 밑천 삼아 일본에 점령된 극동의 섬으로 향한다. 쑤라는 아버지를 만나게 될까.

마트료시카에는 '행운'의 의미와 함께 '어머니'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한다. 속에 작은 아이를 품고 있는 어머니. 어머니를 일찍 잃은 쑤라에게 아버지가 선물한 마트료시카 인형은 아버지마저 잃은 아이에게 중요한 의미가 된다. 겹겹이 감싸는 부모를 의미하기도 하고 자신 안에 숨어 있는 미처 알지 못한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쑤라의 여행은 마트료시카 인형의 의미를 찾는 여행이기도 하다.


쑤라는 마트료시카를 바라보며 아버지가 왜 마트료시카를 졸업 선물로 주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지금처럼 슬프로 막막한 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는 또 다른 내가 있다. 또 다른 나를 꼭 찾아야겠다.

pp.106-107


아버지를 찾는 길에서 만난 조선인 노동자들과 부대끼며 쑤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패망한 일본인이 철수하고 사할린 섬의 노동자들이 조국으로 돌아갈 꿈에 부풀었을 때다. 쑤라는 조선땅을 밟아본 적이 없다. 러시아에서 카레이스키라고 멸시당하는 처지지만 낯선 조선에서 사는 일도 막막하기만 했다.


나는 누구일까. 조선인 부모에게 태어났으니 조선인일까. 아니면 러시아 땅에서 태어나 러시아 국적을 가졌으니 러시아인일까. 쑤라는 갑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이 일었다.

'나는 어디서 살아야 하나.'

p.182


귀국선은 오지 않았고 사할린의 강제 징용 노동자의 삶도 바뀌지 않았다. 착취자의 얼굴색만 바뀌었을 뿐. 일본인에서 소련인으로.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된 노동자의 삶 속에서 쑤라는 자신의 자리를 찾는다. 조선어 학교를 세워 노동자 아이들이 우리글을 잊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쑤라의 마트료시카가 첫 번째 뚜껑을 연 것이다.


쑤라는 이제 분명히 알 것 같았다. '어디서 살까'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까'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버지, 이제 내 안에 있는 나를 하나 꺼냈어요.'

p.193


실존 인물 김알렉산드라도 강제 징용된 벌목공 노동자들을 위해 일했다. 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를 직업으로 한 평단한 삶을 버리고 노동자와 조국을 위한 삶을 살았다. 책을 읽으며 여성 혁명가의 생애와 함께 사할린 강제 징용 노동자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접할 때마다 분통이 터진다. 그런 답답함때문에 알아야 한다는 의무감에도 자주 읽게 되지 않는다. 이 책으로 사할린 강제 징용 노동자들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시간의 더께 속에 뭍힌 인물들을 발굴하고 기억하는 일, 역사에서 배우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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