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무얼 부르지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4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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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하다. 작가의 이름만큼이나 묘한 책이다. 젊은 작가들을 언급할 때 들어 알고 있는 이름이었지만 실제로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이다. 작가가 초대된 모 팟캐스트를 들으며 이 작가의 작품은 내 이해 정도를 넘어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작가의 책을 만났다. 반 정도는 이해한 것도 같고 납득하지 못한 부분이 반 넘어인 것도 같기도 하다. 작가가 젊기 때문일까 추측도 했지만 이해의 어려움은 꼭 세대 차이때문만은 아닌 듯 하다. 작품 해설에서 힌트를 얻었다. 박솔뫼 작가는 이런 말을 했다.


정말 이상한 것을 써야지. 예쁨 받을 수 없는 것을 써야지. 나는 그런 마음을 가졌다. 금요일 밤의 마음. 차가운 한밤중 홀로 어딘가를 달려 나가는 마음. 내가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여기는 것은 아무래도 그뿐이었다.

p.241, 박솔뫼, 「수상소감ㅡ 제1회 자음과 모음 신인상」, 《자음과 모음》, 2009년 겨울호, 23쪽


'이상한 것', '예쁨 받을 수 없는 것'을 쓰겠다는 작가였다. 작가로서 그런 작품을 작정하고 쓰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다. 작품을 쓴다는 것, 책의 형태로 세상에 내놓으려한다는 것은 독자를 전제한 일일테다. 그런데 이상하고 예뻐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 봐주길 바라며 만들어낸다니 작가의 책이 묘한 이유가 있다 싶었다.


더 이상한 일은 책장을 넘겨가면서 일어났다. 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이 사과와 오렌지를 깎으며 삼각형을 꿈꾸는 바 직원 이야기, 원인과 결과를 도무지 이어붙일 수 없는 노래방 납치 사건, 서커스단 단장이 스크린 밖으로 튀어 나오는 영화를 보고 난 후 사람이 테이블이 되어가는 이야기 등을 '읽을 수' 있었다. "납득할 수가 없군" 생각하면서도 "그래서 다음은, 다음은" 책장을 넘겼다. 이런 일이 작품 해설에서 말하는 '사건적 성격'의 시작일까.


작가와 이야기 사이의 관계가 이렇게 서로 무심함에도 불구하고 박솔뫼의 글이 문예지에 발표되는 소설의 형태로, 출판사에서 출간되는 책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것을 아끼는 사람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읽히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사건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할 것이다.

p.240, 작품 해설 中


책에 실린 7편의 단편 중 흥미를 끈 것은 「해만」, 「해만의 지도」, 「그럼 무얼 부르지」 세 편이었다. 해만이라는 이름의 섬을 방문한 나의 서술로 이어지는 앞의 두 단편은 여행이라는 모티브가 친근했다. 여행지에서 있을 수 있는 목적없는 그러나 기억을 남기는 만남이 그려진다. 


해만에서 우리는 문을 열고 인사를 하고 그러다 말이 없고 흔들흔들거리고 떠나고 돌아가고 그리고 생각한다. 그처럼 해만에서 내가 보았던 것은 천천히 모든 것이 멀어지고 사라지는 것이다. 사라지고 나면 무엇이 남나요? 사라진 곳에 대고 묻는다. 결국 텅 비어 버린 자신이 강렬해질 뿐이지. 아, 정말 그렇지? 질문들도 빠져나간 텅 빈 곳에 대고 대답했다. 아, 그렇네 하고.

p.94, 「해만」


아버지를 살해한 존속 살인범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서사의 큰 줄거리와는 관계없다. 등장 인물들이 대화하는 소재로 쓰일 뿐이다. 정해진 목적없이 그냥 떠나는 여행에 대한 느낌, 여행지의 환경과 사람에게 느껴지는 낯섦과 호기심같은 것들에 공감해서 이해해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쉬운 단어들로 쓰여진 다른 단편들이 어렵게 생각됐던 것은 작가가 가진 생활의 배경과 나의 것이 너무 다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혹은 생활 속에서 풍겨져 나오는 여러 감성의 자장을 나와는 아주 다르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럼 무얼 부르지」는 광주 태생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광주'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교토에서 그리고 광주에서 '광주'를 소재로 타인들과 대화를 이어간다. 이야기는 보통의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나'는 광주의 역사성을 모호하게 느끼고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광주'와 '나' 사이에는 '장막'이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런 명확한 세계에 없었다. 마치 아주 복잡한 지도를 보고 있는 것처럼 거기는 어디지? 하고 들여다보아야만 했는데 그렇다고 무언가가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들여다보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사자는 아니며 또한 명확한 세계의 시민도 아니었다. 내 앞에는 장막이 있고 나는 장막을 걷을 수 없었으므로.

p.145, 「그럼 무얼 부르지」


광주를 보는 지금의 시점을 그렸다고 생각했다. 광주는 아픈 과거이지만 지금에 와서는 누구나 그 역사를 '당사자'로서 느끼기 어렵게 됐다. 그렇게 말하는 것 또한 죄스러운 일이라 또 솔직하기 어렵다. 작가는 그 어려움을 담담히 쓴 것으로 보였다. 그것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나'에게 '광주'의 시간들은 "내가 모르는 시간으로 내가 더하거나 내게 겹쳐지지 않는 시간들'이다. 주인공은 애써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광주'를 기억하는 실마리가 남아있는 것이 보였다. 


이어서 내게 너도 광주 사람이지 하고 말했는데 그때 나는 순간적으로 아득함을 느끼고 고개를 휙 돌리고 반응도 하지 않고 맥주만 마셨다. 반대편의 말끔한 중년 남자는 매실이 들어간 술을 금세 비웠으며 몇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매실이 들어간 술을 마신 적이 없다.

pp.150-151, 「그럼 무얼 부르지」


'매실이 들어간 술'을 마지지 않는 것,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이런 행동이 지금 광주에 대한 기억을 고통스러워하는 것 아닐까. '80년에 광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으며 본 매실이 들어간 술을 피하는 일 말이다.


소설가가 말하고자 했던 어떤 것 근처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만 같은 책읽기였다. 이해의 정도를 신뢰할 수 없으니 참신하다고도 신선하다고도 말할 바가 못된다.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작가의 의도 언저리에 닿기라도 한 것이길 바란다. 부디 그 의도에서 그린 먼 곳은 아니었길.


우리는 어디에 닿았을까? 거기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피면 결국 그리 먼 곳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딘가겠지 그곳은. 여기가 아니라 어딘가.

p.202, 「안나의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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