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공주 해적전 소설Q
곽재식 지음 / 창비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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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필사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팟캐스트에서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라는 책 광고를 들었을 때. 쓰기의 기술도 그렇지만 작가적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방법까지 가르쳐준다고 했다. 성우의 목소리도 코믹했고 "어떻게든" 쓰게 만들어주겠다는 작가의 단언도 인상에 남았다. 그가 누구든 '다른 사람이 글을 쓰게 해줄' 작가의 책은 만나기 어렵겠다 생각했었다. 실용서를 많이 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역시나 삶에 있어서 예단은 금물. 그 작가, 곽재식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신라 공주가 어쩌다가 해적이? 책 『신라 공주 해적전』, 제목이 특이했다. 가제본을 받아 작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다. 누군가에게 말하듯 술술 풀어내는 내용을 읽고 있자니 어릴적 할머니 팔을 베고 옛날 이야기를 듣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꿈과 모험이 가득한 나쁜 사람은 벌받고 착한 사람은 복을 받는 이야기. 할머니의 이야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 더 매력적이라는 것 그리고 다 못 듣고 잠들 수 없다는 것.


『신라 공주 해적전』 가제본



책의 분량도 그렇거니와 빠르게 읽히는 책이었다. 해적이 나오는데 흥미진진하지 않기도 힘들다. 때는 신라 말, 장보고가 죽은지 10년 후다. 장보고와 함께 바다를 누비던 여인 장희가 생활고를 해결하고자 공터로 나서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아무 밑천 없이 그저 꼬마때부터 장보고 무리를 따라다니며 익힌 말재주 하나를 믿고 나선 길이다.


그곳을 한번 둘러본 장희는 목이 좋은 공터에 자리를 펴고 앉은 후에 깃발을 내걸었다. 깃발에는 직접 크게 글씨를 썼다.

"행해만사(行解萬事)"

즉 무슨 문제든지 말만 하면 다 풀어준다는 뜻이었다.

p.10


가까스로 끼니를 때운 개업 첫날 짐을 쌀 무렵 한 남자가 다급히 장희를 잡는다. 자기가 가진 재물을 다 내놓을 터이니 자신을 도망치게 해달라는 요구와 함께. 순박한 남자 한수생의 재물을 손에 넣고 적당히 떼어버리려던 장희는 그의 절박한 사연에 발목이 잡힌다.


한수생의 사연이 또 기가 막힌다. 자식을 공부시키려는 부모 밑에서 학업에만 정진하던 그는 갑자기 인도구경을 하러 떠난 부모의 농사를 물려받는다. 농사라곤 지어본 적이 없지만 노력하는 그와 다르게 마을의 다른 청년들은 서라벌 병이 든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최소한 좋은 노래와 춤을 즐길 줄 알고, 또한 아름다운 시의 멋과 옛 성현의 지혜를 배우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그저 밥 먹을 걱정, 굶지 않을 걱정만 한다면 그것은 짐승의 삶이지, 사람의 삶이라고 할 수 있는가?

p.16


'배부른 돼지가 되는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한수생은 "스스로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을 말하고 "서라벌 나들이를 하며 재물을 써버린다면 나중 일은 어찌"할 것인지를 청년들은 한수생을 "그저 모든 것이 밥 먹는 일인 줄로만 아는 소같은 놈"이라고 비웃는다. 겨울이 왔다. 흉작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마을 청년들의 생각이 달라진다. 자신들은 '짐승의 삶'이 아닌 '사람의 삶'을 택했었다. 그러나 "사람의 삶"도 결국은 "짐승의 삶"이 해결돼야 가능한 거였다. 마을 청년들은 짐승이 되길 선택한다. "옛 시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글에 눈물 흘릴 줄 아는" 자신들이 "재물만 탐내는 벌레"같은 한수생에게 끼니를 의지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떳떳하게) 살기 위해서는 한수생을 죽일 수밖에 없다며 낫과 칼을 든다. 한수생은 뒷문으로 도망친다.


농사를 업으로 삼는 촌에서 자식의 성공을 위해 공부만 시키는 부모들, 부모의 경제적 바탕아래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책임질 생각이 없는 자녀들, 좋아 보이는 것, 이상적인 것을 쫒느라 현실의 조건을 무시하는 일, 어려움이 닥치면 문제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태도. 한수생의 이야기에는 이런 사람 살이가 녹아 있다.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이야기지 않은가.


마을 청년들을 피해 도망가던 장희와 한수생 앞에 서해 해적의 강자 대포고래가 나타난다. 노예 신세를 면하려고 가까스로 탈출한 끝에 누군가에게 끌려간 섬에는 200년전 멸망한 백제의 재건을 외치는 무리가 살고 있다. 자칭 백제국의 공주는 한수생을 남편으로 지명하고, 남편감으로서의 자질을 증명하지 못하면 죽을 위험에 처한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위험의 고비마다 장희의 말빨과 지략이 빛을 발한다. 신라를 멸하고 그 땅에 백제를 세우기 위해 백제 공주의 섬 사람들에겐 돈이 필요하다. 장희는 백제의 부흥을 위해 마지막 태자 '풍'이 남겼다는 보물을 찾아주겠노라 장담한다. 내심은 보물찾기 와중에 탈출할 심산이다. 마지막 모험이 시작된다. 누군가는 한 나라의 마지막 태자가 숨긴 황실의 보물에 눈이 멀고 누군가는 사라진 나라의 재건을 꿈꾼다. 그 틈바구니에 낀 장희와 한수생의 탈출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신라판 '신드바드의 모험'을 읽은 기분이다. 바다를 배경으로 생명을 건 모험이 펼쳐진다. 신라, 백제, 장보고를 비롯한 여러 왕들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주요인물이 아니고 배경일뿐이다. 역사 문외한이라고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소설의 주는 모험이고 그 모험 와중에 드러나는 사회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다.


본시 벼슬아치들이란, 자기에게 귀찮은 일이 떨어지는 것ㅇㄹ 고양이가 목욕 싫어하듯 하는 법이오.

p.33


본시 사나운 기세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어서게 되면, 중간에 그게 아니다 싶은 느낌이 들 때가 있어도 그냥 그 기세에 눌려 일을 저지르게 되는 수가 많은 법이오. 더군다나 자신은 현명하여 세상의 이치를 잘 아는데 주위에는 멍청한 자들뿐이라고 믿고 함부로 말 떠들기 좋아하는 놈이 한둘만 섞여 있으면 일이 험악해지는 것은 더 쉬워지게 마련이오.

p.25


장희와 한수생은 어찌보면 비슷한 사람이다. 장희는 약삭빠른 말재주꾼이고 한수생은 공부와 농사 밖에 모르고 산 순둥이지만 둘은 본능적으로 사람에 대한 신의를 따르는 인물이다. 장희는 재물을 받고 한수생을 버릴 수 있었지만 되돌아왔다. 한수생은 노예나 다름 없는 공주의 남편 자리에서 탈출한 기회를 두고 싸움터로 돌아갔다. 공주에 대한 의리를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면서. 소설 속의 신의는 나름의 보답을 받았다. 현실 속의 신의는 어떠한가.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 내가 먼저 누군가에게 등돌리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이 더 중요하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모두를 의심하기보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타당한 '사람의 삶'이 아닐지.


제목의 '신라 공주'는 장희를 말하는 호칭이었다. "작은 나라의 공주처럼 꾸미고 다니는 해적 두령"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장희가 얻은 별명이 '공주 해적'이다. 애초 책 제목이 흥미로웠던 것은 '신라 공주'였다. 막상 책을 읽고 보니 제목의 방점은 '해적'에 찍혀있었다. 즉 '역사' 보다는 '모험'에 촛점을 맞춘다면 예상을 뒤엎는 내용의 걸죽한 판소리 한판과 같은 이야기를 즐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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