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 - 메이지 이후의 일본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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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의 저자 강상중은 일본에서 태어난 재일 한국인 2세다. 같은 재일 한국인 2세인 서경식 교수의 『내 서재 속 고전』을 읽으며 디아스포라의 관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었기에 강상중 교수의 책에도 기대를 가지게 됐다. 국내 저자와 비교해 볼 수 있는 국외자로서의 시점이 궁금했다.


강상중 교수의 『떠오른 국가와 버려진 국민』은 자이니치의 눈으로 일본의 현재 모습을 비판한 책이다. 저자는 현재의 일본이 150년전 메이지 유신의 시대에서 미래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고 말한다. 19세기 서구에 맞선 메이지 일본의 국가 전략을 세계화 시대에 다시 불러내려 한다는 말이다. 메이지의 정신은 국가주의와 일맥상통한다. 즉 '국민의 정부가 어떤 죄를 저지르더라도, 때로 시민이 그 죄에 어떤 방식으로 가담한다 하더라도 네이션은 궁극적으로 선하다'고 여긴다.




저자는 일본에서 반복되는 원자 폭탄 투하, 미나마타 병, 원전 폭발과 같은 역사적 비극의 원인을 메이지 정신에서 찾고자 한다.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했을 때 권력집단이 국가나 기업, 조직이나 제도 뒤로 몸을 숨기는 '무책임 체제'를 드러내 보이려 한다.


비극은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의 책임인가. 무엇을 해야 비극 안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을 찾을 수 있을까. 비극이 되풀이되는 이유를 밝히지 않고, 한갓 자연재해로 치부하고, 망각이라는 안전지대로 도망가서 희극적 일상을 계속하는 것이 일본 근대의 패턴이란 말인가.

p.20


비극의 최대 희생자는 변경으로 벗어난 사람들이다. 소수자들은 사회 곳곳에서 고통받았다. 그 고통의 현장을 찾고 기록하기 위해 저자는 사회가 침묵하는 문제의 지점들을 방문했다.


군함도와 미이케 탄광에서, 후쿠시마와 미나마타에서,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중산간 지역에서, 아시와 광독 사건이 벌어진 야나카무라에서, 대도시의 슬럼과 미군기지에 짓눌린 오키나와에서, 그리고 코리아타운에서. 거기에는 떠밀려난 이들의 비극이 있다. 희미하게 빛나는 희망도 있다. 인간적, 사회적 특징은 벗겨내고 '단일하고 순수한 일본인'으로 환원된 네이션의 선성을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역사가 떨치는 빛이다.

p.21


생명 보호를 위한 어떤 조치도 없이 국부를 위해 채탄 노동에 동원된 사람들이 있다. 국가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발생한 원전폭발의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에게 전가됐다. 권력층과 기득권의 어느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다. 삶의 터를 통째로 빼앗긴 사람들은 사회적 원인의 고통을 고스란이 개인의 문제로 떠안고 있다. 기업 활동의 결과로 발생한 수질 오염은 지역 주민을 병들게 했다. 놀라운 것은 패해가 확인되고도 12년이 지나서야 오염물질 방출 시설이 멈췄다는 것이다. 환자 단체와 협의는 40년이 지나서야 이뤄졌다. 병든 주민들은 오히려 차별에 내몰려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도쿄 수원지 오염을 보호하기 위해 산간 마을 하나를 통째로 수몰시킨 사례도 있다. 기업의 무모한 벌채로 홍수가 발생하고 인근 광산의 독성 물질이 유출된 것이 원인이었다.원인을 제공한 기업은 책임지지 않았다. 주민이 소개되고 집들은 물에 잠겼다. 사회적 원인으로 발생한 병이든 유전적 원인으로 발생한 병이든 아픈 사람이 차별을 받고,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주민들도 정상적인 국민에서 배제되긴 마찬가지다. 책은 사회에 재난이 발생했을 때 그 사회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우리 사회의 강점과 약점을 폭로했다. 재난이 닥쳤을 때 지역, 사회, 국가의 '본성'이 드러난다. 강점과 약점, 그리고 각 개인의 삶과 죽음을 드러낸 대지진은 전쟁에 필적할 정도로 강렬하게 우리에게 물었다. "너희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느냐?"

p.72


사회적 차별의 원인은 차별받는 쪽이 아니라 차별하는 쪽에 있다. 이러한 점에서 차별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질서와 규범, 공통의 인간성과 감수성이 드러난다.

p.157


재일 한국인으로서의 고통을 서술한 대목이 절절했다. 저자 본인의 경험이 생생해서다. 일제시대에 일본 땅으로 건너간 조선인의 후예는 어느 순간 '제국의 신민에서 외국인으로 강등'된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저자를 비롯한 일본의 자이니치는 공생을 희망하고 있었다. 과거와 달라질 수 있는 미래를 위한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은 지역과 사회, 국가와 공생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각오였다. 함께 살아가고 싶다, 민족을 넘어 한 지역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로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p.193


저자는 일본을 '약한 사회 위에 우뚝 솟은 국가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하며 '한국은 여러 한계를 극복하며 착실하게 시민과 사회운동의 힘을 키웠다'고 평가했다. 책 내용을 들여다보며 '정말 그런가?'라는 의문이 계속 들었다. 소수자를 차별하고 가진자의 권리와 이득이 우선되는 한국의 현실이 일본과 얼마나 다를까 싶었다. 정도의 차이일 뿐 한국에서도 다르지 않은 문제인듯 보였다. 다르다면 일본에는 국외자의 시선으로 비판을 가하는 강상중 교수같은 비판자가 있다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현실을 조목조목 따지고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 전국의 현장을 발로 누비며 피해자를 만나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기록하는 지식인이 있는가. '일본과 한국은 지금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는 저자의 단언이 맞는 것이라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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