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31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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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우연도 우연히 일어나지는 않는다.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다.

p.9


있는 줄도 몰랐던 외진 산골 수도원 폐허에서 벽서가 발견되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벽에 그린 그림이 벽화이니 벽서는 벽에 쓴 글 혹은 문장이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산 정상의 수도원 벽서를 최초로 세상에 알린 여행 작가는 어떻게 그 장소를 알게 됐을까.

소년 후는 사촌 누나를 버린 군인에게 칼을 휘두른 후 수도원으로 숨어든다. 아끼는 누나가 집을 떠나게 만든 그를 단죄하고 싶었던 것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수도사로 사는 삶에 익숙할 무렵 예상치 못한 외부의 힘이 소년을 다시 밖으로 몰아낸다. 이미 집과 부모를 잃은 후는 유일한 혈육인 사촌 누나 연희를 찾아 나선다.

한정효는 세상을 뒤집은 권력의 측근이었다. 선글라스로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고 옳지 않다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한채 통제와 억압을 일삼았다. 신실한 아내의 죽음은 그에게 변화를 가져왔다. 아내가 간구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신이 애써 보려한 진실이 무엇인지 깨달은 그는 오지의 수도원에 유폐되기를 자처한다.

여행 작가, 소년 후, 한정효는 어느 시간 수도원과 인연을 맺는다..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는 가파른 산 꼭대기에 외부와 단절된 자급자족의 장소. 천산수도원이다. 그들이 천산수도원을 알게된 것도 머물게 된 것도 모두 우연이다. 아무런 이유없는 일들처럼 보이는 이들의 운명이 하나로 엮이며 이야기가 이어진다. 작가는 '운명을 만드는 것은 누군가의 욕망'이라고 말함으로써 이들의 운명을 움직인 욕망을 이야기 한다.




소설의 인물들이 자신의 운명을 따라 가는 길은 각자의 욕망이 투사되어 있다. 박 중위는 자신의 첫사랑을 닮은 연희를 운명으로 느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단지 그의 욕정뿐이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여인에 대한 욕정, 그 욕정을 채우기 위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속이고 비겁함을 은폐했을 뿐이다. 누나에 대한 복수를 위해 박 중위를 해쳤다고 생각했던 후도 혹독한 시련 끝에 자신의 본 마음을 깨닫는다. 자신이 친척 누나 연희의 육체를 갈구했으며 그것을 가로챈 박 중위를 질시했다는 걸. 군인에서 권력자로 변신한 한정효는 신앙심 깊은 아내를 데려간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지만 그의 원망 또한 자신의 죄책감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권력을 뒷받침하는 일에 몰두하고 아내에게 충실하지 못한 죄책감, 옳은 길이 아님을 완곡히 알리는 아내를 오랫동안 외면한 죄책감이 깊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다른 선택의 가능성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정작 행동의 이유는 달랐다. 누군가는 자신을 성찰하고 이해할 기회를 얻지만 누군가는 자신 합리화하는 인생을 산다. 후와 한정효는 종교라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본 후 스스로의 내면에 숨은 추악함을 알게 된다.


그는 그녀가 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 모르길 바랐고, 모를 줄 알았다.

p.354


정리되지 않은 많은 많은 생각들이 혼자 있는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대면하지 않으려고 했던 죄책감과 만났다. … 신실한 아내의 몸에 병균을 집어넣어 죽게 한 것이 그녀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인 것처럼 불만을 터뜨린 것은 실은 그 죄책감과 대면하지 않으려는 속임수이고 비겁한 전가였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p.221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 없는 것을 납득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 그날 밤 후는 자기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해하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pp.321-322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한 부정적인 욕망을 은폐하는 무엇을 내세운 이들의 공통점은 이유를 궁금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떻게?'만 질문할 뿐 '왜?'를 의문시 하지 않는다. 그 시대는 '어떻게?'는 물을 수 있었지만 '왜?'는 물을 수 없'는 때였다. '모든 이해가 행동을 수반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모든 행동이 이해를 동력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당연시 된 시대였다. 우리에게도 궁금함이 위험한 일이던 시기가 있었고 이때 일어난 '엄청난 일들'은 여전히 숨겨져 있거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왜'를 잊은 결과다.


군인들은 성실하게 보초를 서고 철저하게 순찰을 했을 뿐 자기들이 왜 보초를 서고 자기들의 순찰이 무엇에 기여하는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훈련의 결과였지만 그들이 속한 시대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작용이기도 했다. 시대의 공기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정신 속으로 스미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빚어낸다. 존재를 만드는 것은 공기다. 공기를 마시고 살면서 공기를 마시지 않고 사는 것처럼 살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의 수인이다.

p.177


젊은 군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 채,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엄청난 일을 했어. 하기야 대부분의 엄청난 일들이 이런 식으로 일어나지. 무엇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p.259


궁금증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고 세뇌되었으니까. 궁금증이 위험한 것은 무엇을 알게 되면 어떤 행동을 하라는 부추김에 시달리거나 어떤 행동을 하는 데 망설이게 되기 때문이지.

p.253


교회사 강사 차동연은 천산수도원 폐허에 숨겨진 참혹함을 직접 확인하기 전에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그 이야기가 '괴담 대신 미담'이길 바랬다. 차동연 곁에서 버려진 돌더미를 앞에 둔 것만 같은 독자로서 나의 마음도 그랬다. 이 소설이 미담으로 마무리 되는 소설이길 바랬다. 아름다운 벽서가 종교와 예술의 산물이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끔찍한 살육의 괴담 대신 신성하고 숭고한 미담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했다. 그는 건물 지하의 벽서에 심취했고, 천산 공동체를 천산의 벽서로만 알리고 싶었다.

p.383


여전히 상흔이 가시지 않은 사건을 읽는 일은 고되다. 소설화 되어 있고 가공의 인물을 전제하기만 살아있는 실체였던 인간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왜?'에 대한 고뇌가 없었던 그들, 자신의 행동에 숨은 욕망을 들여다 볼 수 없었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일들'이 아직 현재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상의 노래』는 천산벽서의 사연을 파헤치는 스릴러로 읽을 수도, 개인의 종교적 해탈에 관한 이야기로 읽을 수도 있는 소설이다. 나에게는 이 소설이 운명을 만들어가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기, 그 욕망을 이해하기 위한 질문 '왜?'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다. 수많은 독해의 가능성이 행간마다 산재한 소설 『지상의 노래』, 다시 들어도 귀에 맴도는 음율같은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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