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친밀한 배신자
마사 스타우트 지음, 이원천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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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 누구나에게 있지는 않겠지만 접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일말의 의심없이 믿었던 사람에게 당하는 배신은 믿음의 크기만큼 실망감도 크다. 실망과 함께 찾아오는 자괴감때문에 괴로움은 더하다. '그런 사람을 믿다니…'. 정말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까지 의심의 눈길을 보내게 만드는 배신자들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걸까.


마사 스타우트의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2005년에 출간되어 2008년 『당신 옆의 소시오패스』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나왔던 책이다. 출판사와 번역자를 달리하고 표지와 제목을 바꿔 새롭게 출판됐다. 이전 판에 원래의 제목 'The Sociopath Next Door'에 더 가까운 것이라면 바꾼 제목은 '친밀'과 '배신'이라는 대립하는 의미의 단어를 넣어 주목성을 높였다.


15년 전에 출판됐던 책이 판권 만료 후에 다시 나울 수 있던 이유는 우리 곁의 '배신자' 즉 '소시오패스'의 문제가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커졌기 때문 아닐까 싶다. 저자가 정의하는 '소시오패스'는 이른바 '양심 없는 사람'이다. '무슨 짓을 해도 죄책감이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타인의 삶에는 일말의 관심조자 없는' 사람들 말이다. 직접 대면하기보다 네트워크에서 만나는 일을 더 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다. 만남과 연결의 기회는 늘고 깊이 있는 교제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사회적 조건들이 '양심없는 사람'의 운신의 폭을 넓히고 있는 건 아닐까.


많은 정신건강 전문가들은 양심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상태를 '반사회적 인격장애'라 부르는데, 교정이 불가능한 이런 성격 결함은 현재 전체 인구 수의 대략 4% 즉, 25명당 1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양심이 없는 상태는 일반적으로 '소시오패시(sociopathy)'라고 불리며, 우리에게는 사이코패시(psychopathy)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p.21


저자는 우리 주변 사람 '25명 중에서 1명은 일말의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 없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반복해 강조한다. 이 숫자는 거식증 환자의 수보다 많고 정신분열정 환자의 4배, 결장암 환자의 100배라고 한다. 일상에서 '…은 양심이 없어'라든가 '사람이 돼서 어떻게 저럴까'같은 말이 얼마나 자주 들리는가를 생각해보면 저자의 말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타인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해를 입히면서도 아무런 심적 동요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이들이 사람들 속에서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수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특별한 이 '질환'은 자신이 불편함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치료'의 가능성이 없다. 게다가 이들 대부분은 자신의 '증상'을 매우 잘 숨기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피해자가 계속 발생함에도 가해자가 드러나기 힘들고 때문에 '치료법'도 전혀없다.


…나르시시즘을 포함한 다른 정신의학적 진단의 경우 그 질환을 가진 당사자가 어느 정도는 고뇌와 고통을 경험한다는 점이다. 어떤 '질환(disease)'을 앓고 있는데도 전혀 불편(dis-ease)하지 않고 주관적인 불쾌감도 없는 경우는 소시오패시밖에 없다. 소시오패스는 자신의 삶에 아주 만족하는 사람이 많으며, 이 때문에 효과적인 '치료법'도 없는 듯하다. 법원에 회부되어 재판에 유리한 점이 있는 경우나 환자가 되어 부차적인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소시오패스들은 치료를 받지 않는다. 좋아지기 위해 스스로 치료를 받는 일도 거의 없다. 이런 면 때문에 양심이 없는 상태가 정신질환이나 법적 명칭, 아니면 그 둘을 합친 무언가가 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p.31


양심을 가진 대다수는 양심이 '없는' 상태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시오패스들에게 적절히 대처하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남을 이용하는 행위가 만연해 있으며 비양심적인 사업 관행이 무한한 부를 낳는 듯' 한 오늘날의 세상에서는 더더군다나 양심없는 사람들이 '잘 나가기' 쉽다. 실제로 '수천 년간, 그리고 바로 지금까지도 전혀 도덕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다. '양심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되긴 하는 걸까, 양심의 부재는 본성의 문제인가 양육의 문제인가, 소시오패스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과정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저자는 정신과 교수로 오랫동안 심리적 트라우마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를 상담해왔다. 책은 상당 부분 저자의 상담 내용에 토대한 사례들로 채워져 있다. 저자는 소설가 못지않은 필력으로 서사를 구성해 낸다. 심리스릴러를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커리어만을 추구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가, 거짓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환자를 희생시키는 심리상담가, 반듯해보이는 사회적 모습과 달리 범죄조직에 가담하고 딸을 심리적으로 조종하는 교장선생님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온갖 책, 소설, 영화가 떠올랐다. 그 이야기들이 특별한 상상 속 사례를 다룬 게 아니라는 걸 깨달으며 섬뜩해졌다. 정유정의 『종의 기원』, 손원평의 『아몬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우리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숨쉬고 산다는 말이 아닌가. 화성연쇄 살인사건의 범인과 같은 심리구조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지만 드러나지 않게 자신을 잘 위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양심을 '감정적 애착을 바탕으로 한 의무감'이라고 정의한다. 양심은 '깊은 애정'을 전제한다. 양심은 비교적 최근의 진화과정에서 발생한 감각이기 때문에 모두가 가지지는 못했다고 서술한다. 즉 양심있는 사람들이 자연선택에서 더 유리했다는 말이다.


심리학적으로 말한다면, 양심은 본질적으로 인간을 비롯한 다른 생명체 또는 사람들의 모임, 심지어는 인류 전체에 대한 감정적인 애착을 바탕으로 하는 의무감을 말한다. 사람 또는 생명체에 대한 감정적 유대감이 없는 양심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은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의 영역과 굉장히 유사하다.

p.50


오감(시각,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이 신체적인 감각이고 '제6감'이 직관에 관련된 감각이라면 양심은 기껏해야 7번째의 감각 증, '제7감'에 불과하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뒤늦게 발달하기 시작한 양심은 아직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감각이 되지는 못했다.

p.52


책은 양심의 정의와 비양심이 드러나는 사례를 제시한 후 멀쩡하게 보이는 양심이 무뎌질 수 있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우리의 양심은 언제나 같은 견고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권위에 눌리거나 한 눈을 팔면 놓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기술에 탁월하다. 때문에 알아채기 힘들다. 이들을 구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저자는 '동정연극'을 제시한다. 소시오패스들은 자신을 측은하고 불쌍하게 보이게 계속 가면을 쓴다. 저자는 소시오패스의 원인을 본성과 양육의 차원에서 검토한다.


이런 연구들을 종합해 보면, 소시오패시는 대뇌피질 수준에서 감정적인 자극을 처리하는 기능에 변형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형이 왜 일어나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전적인 신경 발달의 차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신경 발달의 차이는 양육 환경과 문화적인 요소에 의해 약간 보완되거나 혹은 더 악화될 수 있다.

p.206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조카딸 메리 트럼프가 출판한 책 『이미 과한데 결코 만족을 모르는:나의 가문이 전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냈는가(Too Much and Never Enough: How My Family Created the World’s Most Dangerous Man)』에서 그녀는 삼촌을 '소시오패스'라고 묘사했다고 한다. 메리 트럼프는 권위주의적인 프레드 시니어에 의한 트라우마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의 인간점 감정 발달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서술했다고 한다. 조카의 폭로에 따르면 트럼프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피해자인 동시에 전형적인 소시오패스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사 스타우트의 연구를 대입해보면 양심없는 부친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트럼프 대통령은 성장기 동안 부친의 강력한 영향으로 소시오패스가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양심없는 사람들의 사회적 성공은 일반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한다. 양심껏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주지 않고 살아온 삶이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삶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저자가 제시하는 양심의 혜택은 행복이다. 책은 양심없이 세상 혼자 사는 여성의 사례를 제시하며 양심의 부재 상태에서는 행복도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때문에 '어쨌든 양심이 없는 삶은 실패한 삶'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본성은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며 티벳 불교 수장 달라이 라마의 어록으로 마무리하는 저자의 결론은 심리학의 '과학적'인 색채를 바라게 만드는 듯하다. 저자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양심을 이미 장착한 다수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비양심적인 그들을 요령껏 알아보는 것 외에 달리 대안이 없다. 명백히 소시오패스인 그들이 아무리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은 성공을 위한 자신의 게임에 몰입할 뿐 어떤 의미도 행복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저자가 지적했다시피 양심있는 사람은 양심없는 사람이 자신들과 같을 거라 생각에 자주 함정에 빠지곤 한다. 성공한 소시오패스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는 걸 애써 떠올리려 하지 않는 한 다수의 양심있는 사람들은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 그러니 우리의 행복을 위해 '양심있는 자가 더 행복하다'는 저자의 주문에 자발적으로 동의할 밖에



다른 사람의 행복을 걱정하는 바로 그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듯하다.

p.335 『파괴적인 감정들: 달라이 라마와의 과학적 대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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