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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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읽다가 멈춘 책이다. 라스콜니코프가 살인하는 장면, 전당포 노파를 살해하고 노파의 동생에게 우발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는 장면에서 책을 미뤄뒀었다. 몇 십 년 전 일이다. 이야기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기억에 없었다. 그러나 도끼로 노파의 머리를 가격한 장면, 벌벌 떨며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또다른 피해자에 대한 붉은 이미지는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내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선혈이 낭자한 범죄로 구성된 추측이었다. 추측을 사실로 대체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 전집으로 『죄와 벌』을 발간하면서 다시 읽을 기회가 왔다.


책은 책임질 수 없는 이상을 쫒아 살인을 저지른 라스콜니코프가 고뇌 끝에 자수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가족, 친구, 사건을 수사하는 경찰과 거주지 인근에 사는 주변 인물들의 사연이 라스콜니코프 이야기의 사이사이에 끼어든다.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실행한 살인은 주인공에게 공포 이외에 아무 것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자신의 범죄가 밝혀질까 두려워하고 그런 두려움 때문에 쇠약해져가는 자신에게 환멸을 느낀다. 그의 두려움에는 죄책감이 담겨있지 않다.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한 죄스러움이나 후회가 없다. 그저 자신이 스스로 생각했던 사람이 아니라는 단 하나의 사실에 좌절한다.


다시 읽은 『죄와 벌』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부분은 이 책이 ‘심리해부서’라는 것이었다. 작가는 일찌감치 살인 사건의 범인을 드러내고 그가 자수에 이르기까지의 심리를 철저히 묘사한다. 라스콜니코프는 살인을 저지르기까지 무척 망설였다. 막연히 세운 범행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를 미뤘었다. 그러나 우연히 엿듣게 된 대화가 범행을 촉발한다. 잔인한 행동에 대한 두려움, 망설이는 자신에 대한 실망이 교차하는 심리가 촘촘히 이어진다.


‘정말 그렇게 끔찍한 생각이 내 머릿속에 떠올랐단 말인가? 내 마음이 그렇게 더러운 걸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도 더럽고 지저분하고 추악하다, 추악해! 그런데도 나는, 한 달 내내……’ 

1권 p.19


하지만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하고, 그렇게 결정적이며, 동시에 그렇게 순전히 우연한 만남이 센나야 광장에서(더구나 그 길로 갈 필요도 없었는데), 하필 바로 그 시간에, 인생의 그런 순간에, 다시 말해 운명 전체에 너무나 결정적이고 너무나 최종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그런 기분과 그런 상황에 자신이 놓여 있을 때 그것이, 그 만남이 다가왔을까?라고 그는 항상 묻곤 했다. 꼭 일부러 거기서 그를 기다리기나 한 듯이 말이다!

 1권 p.97


전당포 노파와 그 동생을 살해한 후 라스콜니코프는 혼돈에 빠진다.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살인의 광경에 더해 누군가 자신의 범행을 알아챌까 전전긍긍한다. 자신을 돌봐주려는 친구와 오랜만에 상봉한 어머니, 여동생까지 밀쳐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고독감을 느낀다.


이 순간 스스로를 모든 사람, 모든 것으로부터 가위로 도려낸 것처럼 느껴졌다. 

1권 p.179


노파를 살해하고 괴로워하는 라스콜니코프를 보면서 ‘대체 왜 살인을 저지른 걸까’라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사건의 희생자는 없는 사람들의 푼돈까지 끌어모으는 밉상이긴 했지만 직업이 그런 것일뿐 잘못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또 돈이 궁색해져 살인을 저질렀다면 훔쳐낸 금품을 잘 이용해야하지 않는가 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범죄현장에서 허둥지둥 챙겨 온 금품이 뭔지도 알려하지 않고 땅에 묻어버린다. 게다가 자신에게 있는 얼마 안되는 돈도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스스럼없이 줘버린다. 그렇다면 그의 범죄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핵심은, 이분 논문에서는 모든 사람이 어떻게든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으로 분류된다는 거지. 평범한 사람은 순종하며 살아야 하고, 법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지 않아, 왜냐하면 알다시피 그들은 평범하니까. 반면 비범한 사람은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온갖 방법으로 법을 뛰어넘을 권리를 갖는데, 그건 그들이 말 그대로 비범하기 때문이야.“

 1권 p.401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길 원했다. 법을 초월한 권리를 가진 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에 역사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은 범죄에서 자유로웠다. 그러므로 ‘비범한’ 자신이 세상의 피를 빠는 ‘이’같은 존재인 전당포 노파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성공적일 수 있었다. 그를 의심할 수 있는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자신이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는 ‘비범’하지 않았다.


“난 당신에게 절을 한 게 아니야. 난 모든 인류의 고통에 절을 한 거야.”

“내가 당신에 대해 그렇게 말한 건 수치와 죄가 아닌, 당신의 크나큰 고통 때문이야. … 당신이 죄인인 이유는 무엇보다 자신을 헛되이 죽이고 배반했기 때문이야. … 자신이 그렇게 증오하는 더러운 삶을 살면서, 동시에 그러다 한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를 어떤 것으로부터도 구원할 수 없다는 걸 스스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끔찍하지 않을 수 있겠어!” 

2권 p.75


소냐의 고통은 라스콜니코프에게 동류의식을 일깨웠다. 그녀가 ‘자신을 헛되이 죽이고 배반’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판다. 그녀의 희생에도 가족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데다 아버지는 딸의 몸값으로 술독에 빠져 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냐의 값없는 희생이 마치 자신의 것과 같다고 느꼈다. 소냐를 만난 후 그는 ‘강렬한 생명의 느낌’을 경험한다.


그는 온몸에 열이 났지만 그걸 의식하지도 못한 채,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걸어내려갔는데, 어떤 새롭고 무한하며, 갑자기 밀어닥친 충만하고 강렬한 생명의 느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 느낌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이 느닷없이 뜻밖의 사면을 받았을 때의 느낌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1권 p.290


"신기루야 사라져라, 거짓된 공포도 사라져라, 환영이여 사라져라!…… 삶이 있다! 나는 지금 살아있지 않은가? 내 삶은 아직 늙은 노파와 함께 죽어버리지 않았다! 하늘의 왕국이 노파에게 임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노파여, 이제 편히 쉬시라! 이제 이성과 빛의 왕국이, 그리고…… 의지와 힘의 왕국이 도래하리니…… 어디 두고 보자! 한번 겨뤄보자고!“ 어떤 어두운 힘을 향해 도전하듯 그가 오만하게 덧붙였다. ”난 이미 1아르신의 공간에서 사는 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1권 pp.292-293


사건을 조사하던 예심판사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의 심리를 꿰뚫어 본다. 예심판사는 라스콜니코프가 잡지에 게재한 논문과 사건 후 그가 보인 행동을 분석한다. 다른 일을 가장해 예심판사를 찾아간 라스콜니코프를 우회적으로 추궁하는 장면은 심리묘사의 절정이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듯 질문하는 포르피리와 교묘히 피해가는 라스콜니코프의 대화는 긴장의 연속이다. 포르피리는 라스콜니코프가 무엇 때문에 범행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지까지 내다보고 있다.


현실과 본성은 말입니다, … 때로는 대단히 통찰력 있는 생각도 쓸모없게 만들어버리지요! … ‘모든 장애를 넘어서려는’ 젊은이는 자기 재치에 푹 빠져서 이점은 생각조차 못합니다. … 본성이라는 거울은, 그 거울은 정말 투명하게 비춰주지요! 

2권 pp.107-108


도망은 추악하고 고단한 일이지만, 당신에겐 무엇보다 삶과 일정한 지위, 그에 상응하는 공기가 필요합니다. 자, 그곳에 당신에게 맞는 공기가 있을까요? 도망쳐도 스스로 돌아올 겁니다. 당신은 우리 없이는 안 되니까요

2권 p.297


라스콜니코프는 범행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범행이 죄라는 생각에 짓눌린 자신 때문에 자수를 생각한다.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의 일이다. 소냐와 함께 한 순간은 그에게 ‘이해받는’ 시간이었다. 소냐가 그의 행동 모두를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으로 다 이해해”보려 했다. 이해해보려는 마음, 라스콜니코프를 움직인 것은 그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저 지금에 와서야, 이 불필요한 수치를 감당하러 가기로 결심한 지금에 와서야 내 소심함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확실히 알겠구나! 난 단지 내 비열함과 무능함 때문에 그렇게 결심한 것뿐이야, 더구나 어쩌면 그게 더 이로울 테니까, 그…… 포르피리가 제안했듯이 말이야!……”

 2권 p.386



라스콜니코프는 속죄하지 않았다. 자수를 통해 쫒기는 자로서의 고통을 덜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평범한 사람과 법을 뛰어 넘는 사람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고수한 채이다.


‘자, 어째서 내 행동이 저들에게 그렇게 추악하게 여겨지는가? … ‘악행이라서? ’악행‘이란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 양심은 평온하다. 물론 형사상의 범죄를 저질렀다. … 자, 그러니 법조항 대신 내 목을 가져가란 말인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당연히 권력을 물려받지 않고 스스로 쟁취한 많은 인류의 은인들조차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처형당했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자신의 걸음을 견뎌냈고, 그래서 그들은 옳다. 하지만 난 견뎌내지 못했고, 그래서 그 걸음을 자신에게 허용할 자격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그가 인정한 유일한 자신의 죄였다. 첫걸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자수했다는 것, 그뿐이었다. 

2권 p.425


라스콜니코프는 8년간의 수감을 선고받고 유형을 떠난다. 소냐는 유형지로 그를 따라 나선다. 에필로그에는 소냐의 정성과 라스콜니코프의 감화가 드러나 있다. 내겐 에필로그가 사족처럼 느껴졌다. 급조된 해피엔딩의 느낌이랄까. 작가가 그런 행복한 결말을 위해 긴긴 이야기를 끌어온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럴 요량이었다면 등장인물의 심리를 생각의 세밀한 토막까지 서술하는 작가가 이렇게 짧게 처리할리 없다. 라스콜니코프의 참회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그 역동적인 과정을 놓쳤을 것 같지 않았을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는 라스콜니코프와 같은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죄와 벌』을 썼던 거라고 생각한다. 현실과 괴리된 이상으로 가득 찬 채 고립된 골방에서 나온 청년이 어떤 사건을 겪고 어떤 마음의 소용돌이를 지나 운명적인 장소에 가닿는지를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7월 초 몹시 무더운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살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로 향했다. 

1권 p.9


그 순간 라스콜니코프는 이제 소냐가 영원히 그와 함께할 것이며, 운명이 이끄는 대로 세상 끝까지라도 그를 뒤따를 것임을 단번에 느끼고 이해했다. 심장이 온통 뒤집어졌다……하지만 그는 이미 운명적인 장소에 도달했다…… 

2권 p.398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책이다. 길고 여럿으로 불리는 이름 덕에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고전 중의 고전인지라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해설도 다양하다. 한 번 읽고 이 모든 것을 소화하기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지 싶다. 우선은 쉴 새 없이 읽히는 가독성 있는 책이라는 것, 더 치밀할 수 없을 만큼 자세한 인물 심리분석이 펼쳐진 책이라는 점을 안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 고전이라는 이름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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