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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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만나는 지점이고물자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경성의 길목이었다. p.107


황석영 장편소설 『철도원 삼대』에 눈길을 두게 만든 한 문장이다. 소설이 배경이 된 '영등포', 그 장소에 이끌려 책을 들었다. 이젠 떠났지만 내가 나고 자란 곳이다. 지금 시대는 고향의 의미가 크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따라 혹은 거주 조건에 따라 수시로 이주하는 삶을 산다. 그럼에도 40년 가까이 산 동네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유년기의 기억이 흩어져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게다. 공기 중에 항상 희미하게나마 기차 철거덩 거리는 소리가 들리던 동네, 오갈데 없는 노숙자들이 곳곳에 누워있는 풍경이 일상인 역주변, 80년대까지 다다미 깔린 2층이 있는 적산가옥이 있던, 홍수가 지면 침수를 걱정해야 하는 동네, 기억 속 영등포의 과거가 책에 들어 있었다. 함께 자란 오랜 친구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린 내가 등장하는 오래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책은 발전소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하는 이진오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아파트 십육층 높이, 사십 오 미터 상공에서 위장 파산 후 해외로 공장을 옮긴 사측에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자리를 잡았다. 폭 일미터 남짓에 열여섯걸음 쯤 되는 공장 굴뚝 테두리 위의 생활이다. 이진오는 아무도 없는 적막한 하늘 위에서 꿈인듯 환상인듯 자신을 찾아온 친구와 가족들을 만난다. 그는 "지상에서의 시간을 벗어났고 굴뚝의 일상은 이미 현실이 아니게 되었다." 강화 출신의 증조할아버지 이백만이 일거리를 찾아 오면서 영등포 생활이 시작된다. 마포 나루에서 처음 기차를 본 이백만은 달리는 무쇠덩어리에 매료되고 유달리 좋았던 손재주 덕어 영등포 철도 공작창에 일자리를 잡는다. 이백만, 이일철, 이지산으로 이어지는 철도 삼대의 시작이다.


'영등포'라는 장소는 이야기의 배경으로 또는 주요 사전의 소재로 소설 속에 녹아있다. 철도와 인연을 맺은 이백만은 가족을 이루고 아들, 손자, 증손자에 이르도록 영등포에 삶의 터를 두었다. 영등포 역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가 옛 지명으로 등장한다. 영등포 시장, 문래동 방향에 있던 방직공장, 당산, 옹기말 그리고 나의 옛집이 있던 고추말까지. 영등포는 '진등포'라고 불릴 정도로 진 땅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여름 장마가 오래가면 마당 하수도를 근심스럽게 바라보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등포의 침수는 이백만 가족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이백만이 일하러 나간 사이 삽시간에 집과 동네가 물에 잠긴다. 다행히 이백만의 아내 주안댁의 기지로 위기를 모면한다. 영등포가 도시로서 거친 역사가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영등포를 지나는 철도가 놓인 때는 일제 강점기였다. 경부선, 경인선 등의 철로가 지나가는 자리의 땅은 강제로 몰수되고 철도건설 노역에 조선인들이 강제 동원됐다. 일제 수탈을 위한 기반 시설 공사에 조선 인민이 희생되었다. 때문에 의병들의 공격 목표가 됐었다고 했다. 조선인의 피땀으로 지은 시설물이 조선 사람들을 황폐하게 하는 도구가 되었다. 결국 조선인이 파괴해야하는 절박한 상황이 된 것이다.


철도가 놓이면서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부역에 끌려나와 고생하고, 가족이나 친척이 살해당한 조선 백성들은 전국 곳곳에서 열차 운행과 철도공사를 끈질기게 방해하기 시작했다. 이맘때에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가 망하여 일어나게 된 의병들도 철도를 주요 공격의 목표로 삼곤 했다. p.79


그러니 어찌 철도가 조선 사람의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지 않았겠는가. p.83


책은 이진오의 고공 농성 과정 사이 사이에 이백만 가족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엮어 넣고 있다. 증조부모인 이백만과 주안댁, 조부모 이일철과 신금이, 아버지 이지산과 윤복례의 삶이 신화처럼 펼쳐진다. 특히 주안댁과 신금이 이야기가 특별했다. 인천 바닷가 출신의 주안댁은 홍수로 고립된 남편을 땟목을 만들어 구하고 사람이 깔린 짐마차를 거뜬히 들어올릴 정도로 장사다. 무뚝뚝하면서도 생활력 강한 주안댁은 어려웠던 시절 어떻게든 가족의 삶을 꾸려나갔던 어머니들의 모습으로 느껴졌다.


이일철의 아내 신금이는 당시 보통학교까지 나온 엘리트 여성이었다. 방직공장에 취직했다가 공산주의 운동을 하는 이이철을 통해 그의 형 이일철과 맺어졌다. 그런데 신금이는 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신기라고 할 법한 눈이 있었다. 그녀는 사람의 미래 또는 마음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미래에 시동생이 될 이이철을 만났을 때 그의 몸에서 감옥의 창살이 드리울 줄무늬를 봤다. 가제본에서 다 읽지 못한 그녀의 삶이 궁금해지는 이유다.


철도 직원이었던 이일철은 월북한 사람으로 나온다. 월북하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던 아들 이지산은 반공포로가 되었고 한 쪽 다리를 잃는다. 이들이 그렇게 된 이유 또한 책의 후반부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윗 세대는 일제의 수탈에 맞섰고 그 자손인 현재의 이진오는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항해 노동운동을 한다.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는 농성현장을 찾아 아들을 격려한다. 아들이 위험을 무릎쓰고 하고 있는 행동, 노동 운동의 의미를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런 꼿꼿한 말을 굴뚝 꼭대기에 위태롭게 선 아들에게 할 수 있기까지는 대체 어떤 세월이 있었던 걸까. 월북한 시아버지 때문에 겪었을 서슬퍼런 공포, 불편한 몸이 된 남편을 대신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을 고난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아들에게 이런 당당한 말을 건넬 수 있다니.


"노동 투쟁은 원래가 이씨네 피에 들어 있다. 너 혼자 호강하며 밥 먹자는 게 아니구, 노동자 모두 사람답게 살아보자 그거 아니겠냐?"

"한두달 새 내려올 생각 아예 마라. 쩌어 예전부터 지금까정 죽은 사람이 숱하게 쌨다."

그녀가 하는 말은 큰 할아버지 이백만과 할아버지 이일철과 아버지 이지산이 늘 입에 달고 쓰던 말이었다. 그 말은 이진오의 어머니 윤복례도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동의했고 자신의 생각이기도 한 말이었다. pp.155-156


고공 농성을 시작하던 때 공장 굴뚝에 올라간 이진오가 현수막을 거는 장면이 나온다. 난간에 붙잡아 맨 현수막을 안쪽에서 바라보는 이진오의 눈에 글자들이 거꾸로 보인다.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이진오의 농성이 그리고 조금 더 낫게 살기 위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노동자들의 노력이 모두 거꾸로 된 글씨처럼 허망해지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라하장보동노용고 지저각매할분'이라는 글씨는 농성의 이유를 밝히는 제목답게 크게, '!직복원전 계승조노'라는 글씨는 소제목처럼 그 아래 작게 썼다. 이진오는 그것을 올려다볼 사람들의 세상 반대쪽에서 거꾸로 보이는 글씨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p.12


가제본만 읽은 터라 책의 후반 내용은 알지 못한다. 책의 나머지 반에는 이일철이 월북하게 되는 사연, 이이철이 옥사하게 된 이유, 이지산과 윤옥례가 맺어지게 된 과정이 담겨 있으리라. 작가는 이진오의 고공농성의 끝도 알려줄까. 『철도원 삼대』가 풀어놓는 영등포와 철도 그리고 노동자에 대한 이야기, 우리의 삶과도 이어질 그 마지막이 얼마간 희망적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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